아들의 연인, 나의 연인

<제인 에어>의 '사랑'과 '반항'에 대하여

등록 2002.10.07 06:27수정 2002.10.10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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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중이었다. 거실에서 잠을 자고 있는데 아들녀석의 방에서 신음소리 같은 것이 들려와 달려가 보니 아들녀석이 잠을 자면서 잠꼬대로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가만 들어보니 우리말 이름이 아니 듯싶었다. 좀더 귀를 기울이고 자세히 들어보니 내 귀에도 익숙한 영어 이름이었다. 방에 불을 켜고 보니 아들녀석의 머리맡에는 소설 <제인 에어>가 놓여 있었다.

아들녀석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름이 소설의 주인공인 '제인 에어'로 확인되자 나는 갑자기 기분이 묘해졌다. 내 나이가 아들녀석의 나이와 엇비슷하던 시절, 내 입에서 최초로 발음된 소설 속의 여자 주인공이 바로 '제인 에어'였던 것이다. 그러니까 아들녀석과 나는 한 세대를 사이에 두고, 아무리 소설 속의 여인이라지만, 동일 여성을 흠모하고 있었던 셈이었다.

중 2때까지만 해도 아들녀석은 여자아이들을 돌보듯 하는, 말하자면 그런 쪽으로는 늦된 감마저 있는 아이였다. 그 점만을 본다면 아들녀석이 내 자식이라고 말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그러던 아들녀석이 어떻게 소설 속의 한 여자 주인공을 꿈속에서까지 이름을 부르며 찾아 헤매게 되었을까?

제인 에어. 외모는 그다지 예쁜 편이 아니지만 눈빛이 맑고 총명한 소녀. 그런데 그 총명함 속에는, 어려서 고아가 되어 가난하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 자란 탓이겠지만, 누군가에 대한 깊은 원망과 반항심이 깃들어 있다.

내가 '제인 에어'를 처음 만난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였다. 그리고 대학 시절 또 한 번 그녀를 만나게 되는데, 그 두 번의 만남을 통해서 '제인 에어'는 나의 뇌리 깊숙이 이상적인 여성상이 되어 박혀 있었다.

<좁은 문>의 '알릿사',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롯데', 그리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을 따돌린 그의 매력은 강한 자의식과 이지적인(결코 이기적이 아닌) 반항심, 바로 그것이었다. 나는 그녀의 반항심이 어떤 진실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것 같다. 물론 지금도 그 믿음은 변함이 없지만.

아들녀석이 '제인 에어'를 좋아하는 것을 보아 이상적인 여성상이 나와 크게 다를 것 같지가 않다. 그런데 그렇다면 큰일이다. 아내와의 충돌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아내는 요즘 들어 늘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는데, 집안이 잘 되려면 며느리가 잘 들어와야 한다는 것이다. 아내 나이에 벌써부터 며느리 타령이 가당치도 않지만,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아내의 잣대로 매겨지는 일등 며느릿감의 필수 조건은 '예의 바르고 순종 잘하는 여성'일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였을까? '제인 에어'와 아내의 사이에 심상치 않은 일이 생겨났다. 아들녀석이 한참 '제인 에어'에게 빠져 있을 때 문제의 중간고사가 코앞에 닥쳐 온 것이다. 아들녀석은 시험을 하루 앞두고 {제인 에어}를 끼고 다니다가 아내에게 혼줄이 났다. 그래도 아들녀석은 지지 않고 한 시간 공부하고 십 분 쉬는 시간에 보는 거라고 변명을 늘어놓았다.

"십 분 쉬는 시간에 멍하니 있는 것보다 책을 읽는 게 더 낫잖아요? 세상에 이렇게 훌륭한 아들이 어딨어요? 그냥 재미로 보는 책도 아니고 '제인 에어'인데."
이렇게 말하면서 아들녀석은 제목을 보라는 듯이 아내의 코앞에 책을 들이민다. 그러자 아내는 자기의 얼굴 앞에서 어른거리는 책을 확 낚아채더니 이렇게 응수한다.


"십 분 쉬는 시간에 공부를 좀더 하면 되지. '제인 에어'는 무슨 '제인 에어'야? 왜 하필이면 시험을 앞두고 그렇게 두꺼운 책을 읽느냐 말이야?"

나는 아내와 아들녀석이 '제인 에어'를 사이에 두고 입씨름을 하는 광경을 바라보면서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만약에 아들녀석이 본 소설책의 제목이 남자 주인공의 이름을 딴 '데미안'이나 '돈 키호테'였다고 해도 아내가 아들녀석에게 시비를 걸었을까?

그후 며칠이 지났다. 나는 아들녀석의 시험도 끝났고 해서 비디오 가게에서 <제인 에어> 비디오 테이프를 빌려와 가족들과 함께 보았다. 영화가 끝나자 나는 아들녀석에게 넌지시 물었다.

"영화 재미있게 봤어?"
"네. 그런데 소설보다는 못한 것 같아요. 영화가 좀 싱겁고 아쉽고 그래요."
"어떤 장면이 가장 인상에 남든?"
"마지막 장면요. 불구자나 다름없는 로체스터를 찾아가 구혼을 하잖아요. 다른 여자 같았으면 그러지 않았을 거예요."

"왜?"
"손해 본다고 생각했을 테니까요."
"그런데 제인 에어는 왜 로체스터에게 구혼을 하면서도 손해 본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그건, 그러니까, 제인 에어는 로체스터를 사랑했기 때문이죠. 사랑하면 손해 본다는 생각 같은 것은 하지 안잖아요. 그런데 아빠는 어떤 장면이 인상에 남으셨어요?"

"응, 아빠는 제인 에어가 고아원에서, 또 고모집에서 어른들에게 반항하는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었어. 물론 나중에 그 고모를 용서해 주는 장면이 더 인상적이었지만. 아빠는 제인 에어가 그 고모에게 반항할 수 있는 주체적인 여인이었기 때문에 나중에 그 고모를 용서할 수도 있었다고 생각해. 넌 그런 생각 안 들었니?"

"영화 볼 때는 생각을 못했는데 아빠 말씀이 맞는 거 같아요."
이쯤에서 나는 얼른 아내의 표정을 살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불온하기 짝이 없는 대화가 오고 간 뒤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내는 무엇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치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흐뭇한 눈빛이 입가에까지 흘러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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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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