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리, 워싱턴, 바그다드, 평양...

등록 2002.10.17 20:53수정 2002.10.18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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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리에서 알카에다가 연계된 것으로 보이는 폭탄테러가 벌어져 500여 명이 죽고 다치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하고 있을 때 워싱턴에서는 열번째, 열한번째 무차별 저격 살인 사건이 발생하고 있었다.

한편으로 후세인의 7년 임기 연장에 이라크 국민들은 100퍼센트라는 기록적인 수치로 찬성표를 던지고 있었는데, 오늘 아침에는 급기야 지난 5년간 북한이 비밀리에 핵개발을 추진해 왔다는 사실이 언론에 공개되어 이 밤까지 시끄럽기 그지없다. 이날 민주당에서는 탈당 도미노 현상이 벌어져 며칠 전 몇몇 국회위원들이 한나라당으로 넘어가 버린 기록을 갱신했다.


발리, 워싱턴, 바그다드, 평양, 그리고 서울. 내일도 세계는 결코 편안치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세상이 시끄러우리라는 우려만으로 중도에서 생각을 단념할 수는 없다.

세계는 지금 두 개의 중요한 국면이 한데 얽혀 일대 혼란을 겪고 있다. 하나는 미국 및 서방 일각의 패권주의와 무차별 테러를 내세운 국제 테러리즘 조직의 대결, 다른 하나는 권력을 영속화하려는 세계 각국의 지배 그룹과 그 국민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긴장과 갈등.

먼저 그 후자의 문제부터 생각해 보자. 바그다드와 평양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후세인과 김정일이라는 독재정권이 어떤 형태로든 새로운, 조금이라도 더 민주적인 권력으로 교체되지 않는 한 이라크와 북한에 내일은 없다.

그 두 사람은 반제국주의 전선을 이끄는 영웅이 아니라 바로 그 명분으로 치장한 억압자들이기 때문이다. 바그다드와 평양에 공히 나타나는 99퍼센트가 넘어가는 찬성률은 두 사회의 정치적 부자유를 웅변해줄 뿐이다. 그 두 사람과 그들의 일족과 측근들이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벌이는 긴장국면으로 인해 고통을 겪을 사람은 그들의 반제국주의 캠페인의 표적이 되고 있는, 부시를 비롯한 서방의 매파 그룹이 아니라 이라크와 북한의 '인민'들, 그리고 세상의 무고한 사람들뿐이다.

이라크와 북한의 '인민'들은 봉건적이고 야만적인 통치 아래 신음하고 있다는 것이 진실이다. 민주주의의 가치를 믿는 이들은 이 사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바그다드와 평양에 비한다면 가히 사람 살 만한 곳이지만 미국의 경우에 과연 부시 정권과 국민들 사이에 긴장과 갈등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지금 미국의 지배블록은 소수파 정권으로 군산복합체의 이해를 대변하는 데는 기민하지만 기실 국민을 살찌울 방법에 대해서는 뾰족하게 아는 것이 없다.

부시 대통령은 테러와의 전쟁을 기치로 내걸고 있으나 그것이 국민들의 삶을 안정시킬 수 있으리라는 보장은 전혀 없다. 미국인들은 바야흐로 피해망상증에 시달리는 중이다.


그렇다면 한국인들이 살아가는 휴전선 이남의 지금 형세는 어떤가. 남한의 소수파 정권은 경제 재건, 한반도 평화, 민주주의 진전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출범했으나 부정부패, 무능력, 무원칙으로 국민의 지지를 상실하면서 자멸하고 있다.

문제가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러한 사태가 명백히 비민주적일 뿐더러 부정부패의 본산이라 할 만한 과거 정권 담당층에게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만약 그들이 집권한다면 앞으로 몇 년 동안 한국의 국민들은 그들의 선택에 따른 막대한 부담을 짊어져야 할 것이다. 그렇다 해서 현정권이 그대로 새로운 권력을 쥐게 되는 일도 있어서는 안되리라. 이것이 지금 남한의 딜레마이다.

이처럼 지배그룹과 국민들 사이의 긴장과 갈등은 서방과 이슬람 문명권의 대결 국면, 그리고 그 현재적 표현형태로서의 미국과 국제 테러리즘 조직 사이의 전쟁 상태에 촉매제 역할을 하고 있다.

가령 부시가 추구하는 전쟁의 명분을 약화시키려면 한반도에서는 비핵화와 평화체제 수립이 절실한데 김정일 정권은 오히려 그것에 역행하는 일을 벌여나가고 있다. 북한 '인민'들의 삶이 개선되기 위해서는 북한은 전면적인 개혁, 개방을 추진해야 하지만 그런 환경 하에서 김정일 정권이 유지될 가능성은 없다. 이 점은 후세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그는 정권을 위해 미국과의 대결을 필요로 하는데 그것은 이라크 국민들에게는 곧 죽음을 의미할 뿐이다.

상황은 분명 다르지만 부시의 전쟁정책 역시 미국 내 경제 불황, 지지도 약화의 산물인데 테러리즘이 그물망화되어 있는 지금 테러를 원천적으로 봉쇄할 수단은 없다. 아프가니스탄의 경우를 통해 이미 확인되었듯이 미국인은 앞으로 더 많은 테러 가능성에 노출될 것이다.

한국의 경우는 어떨까? 이미 국회를 장악한 구정권은 명실상부한 권력을 수중에 넣기 위해 현정권의 문제점은 물론 국제테러리즘의 대두, 북한의 핵개발같은 문제들을 십분 활용하려 할 것이 불문가지다. 이러한 정책은 구세력의 고토회복에는 도움이 될지 모르겠으나 기실 한국인의 안전을 위협하는 일이 될 것이다. 이미 한반도는 내일을 내다보기 힘든 불가측 국면에 접어들었다.

나는 생각해 본다. 한국인들은 그들이 처해 있는 이와 같은 상황을 냉철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다. 특히 젊은이들이라면 그들이 '누리고' 있는 민주주의의 의미와 가치를 새롭게 되새길 필요가 있다. 휴전선 이남에서도 이북에서도 민주주의는 어떤 난관에도 불구하고 증대되어야 한다. 이것은 남한의 구세력뿐만 아니라 북한의 현정권에 대해서도 냉담하지 않으면 안됨을 의미한다. 갈라진 두 땅 모두에서 동시에 민주주의의 증대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미래는 불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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