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노래의 만남 '행복한 울림'

시노래모임 나팔꽃 콘서트 <작게, 낮게, 느리게 2002> 대합창

등록 2002.10.26 08:31수정 2002.10.29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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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미한 조명에 불이 들어오자 목덜미를 덮고도 남는 긴 갈기머리에 낡은 청바지 차림의 한 사내가 나왔다. 그리고 이내 잠바차림의 한 문학청년이 나왔다. 둘이 마주보고 앉았다. 이윽고 무대에 막이 오르면서 작게 낮게 그리고 느리게 음악이 흘렀다.

시노래모임 나팔꽃 정기콘서트 <작게, 낮게, 느리게 2002> '연애편지'가 25일 밤 한양대 동문회관 소극장에서 열렸다
시노래모임 나팔꽃 정기콘서트 <작게, 낮게, 느리게 2002> '연애편지'가 25일 밤 한양대 동문회관 소극장에서 열렸다석희열

바다가 보이는 언덕위에
우체국이 있다
나는 며칠 동안 그 마을에 머물면서
옛사람이 살던 집을 두근거리며 쳐다보듯이
오래오래 우체국을 바라보았다


나는 바닷가 우체국에서
만년필로 잉크냄새 나는 편지를 쓰고 싶어진다
내가 나에게 보내는 긴 편지를 쓰는
소년이 되고 싶어진다
나는 이 세상에 살아남기 위해 사랑을 한 게 아니었다고
나는 사랑을 하기 위해 살았다고
그리하여 한 모금의 따뜻한 국물 같은 시를 그리워하였고
한 여자보다 한 여자와의 연애를 그리워하였고

이 세상의 모든 길들이
우체국을 향해 모였다가
다시 갈래갈래 흩어져 산골짜기로도 가는 것을 생각하고

그리고 외로울 때는
파도소리를 우표속에 그려넣거나
수평선을 잡아당겼다가 놓았다가 하면서
나도 바닷가 우체국처럼 천천히 늙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시인 안도현이 그의 시 <바닷가 우체국>을 마치 엷은 파스텔 분말을 반죽하여 머언 수평선 너머 바닷가를 그리워하며 흐느끼듯 읊조리고..음악이 끝나자 갈기머리에 히피차림의 가수 김원중은 객석쪽을 바라보다 한참만에 입을 열었다.

시인 안도현(왼)이 자신의 시 <바닷가 우체국>을 낭송하고 있다
시인 안도현(왼)이 자신의 시 <바닷가 우체국>을 낭송하고 있다석희열

그는 객석을 향해 "가슴 졸이며 그 누군가를 그리워하면서 연애편지를 쓰던 애틋한 감정이 지금은 많이 사라져버린 것같아 안타깝다. 오늘 여러분과 함께 연애편지를 쓰고자 한다. 연애편지를 받고 읽는 그런 설레는 기분으로 따뜻하게 오늘 공연을 지켜봐주셨으면 한다"고 속삭였다.


시노래모임 나팔꽃 정기공연 <작게, 낮게, 느리게 2002 연애편지>가 가을비가 내리는 25일 밤 서울 행당동 한양대 동문회관 소극장에서 열렸다. 2시간 30분 동안 이어진 이날 나팔꽃 콘서트는 그 동안 별거해오던 시와 노래가 한 몸이 되는 것을 보여주었다. 시는 시집 밖으로 걸어나와 비로소 자연과 인간의 친구가 되는 노래가 되어 우리 삶 속에서 새롭게 태어나고 있었다.

이날 공연의 사회를 맡은 홍순관은 추억의 노래를 소개하면서 재치있는 입담으로 사람을 곧잘 웃기곤 했다
이날 공연의 사회를 맡은 홍순관은 추억의 노래를 소개하면서 재치있는 입담으로 사람을 곧잘 웃기곤 했다석희열
나팔꽃의 나팔수 홍 순관이 턴테이블로 추억의 노래를 소개하면서 개나리봇짐을 메고 길을 떠나는 한대수가 경상도 특유의 억센 사투리로 세상을 향해 외치던 '물 좀 주소'가 이어지다 70년대 기념비적 관객을 동원했던 신성일 안인숙 주연의 '별들의 고향'에서 경아의 목소리(?)가 잠시 흘러나오자 객석에서는 한바탕 웃음이 터지기도 했다.


'살구꽃' 등 서정적인 포크음악으로 잘 알려진 싱어송라이터 이수진이 '제비꽃 편지'를 부르는 동안 객석은 온통 그의 감미로운 목소리에 취해 있었다. 김현성 손병휘 이수진 김가영이 함께 부르는 '세노야'와 '가을편지'가 이어지자 비로소 무대와 객석이 하나가 되었고 시와 음악이 하나가 되었다.

싱어송라이터 이수진은 현재 어린이 음반사 <삽살개>에서 일하고 있으며 독집 음반을 준비 중이다
싱어송라이터 이수진은 현재 어린이 음반사 <삽살개>에서 일하고 있으며 독집 음반을 준비 중이다석희열

시인 도종환 안도현 신동호 민병일 백창우를 좋아한다는 포크그룹 <노래마을> 출신의 싱어송라이터 이지상은 그의 노래 '무지개'를 부른 뒤 "어린시절 무지개를 쫓아서 한번쯤은 길을 나서 본 사람은 그것을 잡을 수 없다는 걸 알게 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얻었던 수많은 경험들이 커가면서 우리들 삶에서 너무도 아름답게 빛나고 있다"며 노랫말을 소개했다.

시인 고은 선생은 "시와 노래가 만나서 한 몸이 되는 것은 아주 소망스럽고 아름다운 일"이라며 시노래모임에 대한 격려를 해주고 있다
시인 고은 선생은 "시와 노래가 만나서 한 몸이 되는 것은 아주 소망스럽고 아름다운 일"이라며 시노래모임에 대한 격려를 해주고 있다석희열
이날 초대손님으로 나온 시인 고은은 그의 시에 김광희가 곡을 붙여 70년대 양희은이 불러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던 '세노야'에 얽힌 얘기를 들려주었다. 그는 "60년대 중반쯤 어느 땐가 시인 서정주와 육군대학 강연을 마치고 육군대학에서 내준 배를 타고 통영 앞바다를 돌아다녔는데 멸치잡이 작은 고깃배에서 어부들이 '세노야'를 외치고 있었다. 당시 '세노야'는 한국 중국 일본 연안 일대 어부들의 약속된 공통의 국제언어였던 것같다"며 '세노야'의 노랫말이 어부의 노래에서 유래된 배경을 설명했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눈물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꼭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1989년 3월 서울 종로의 한 심야 극장에서 시집을 출간을 준비하다 만 스물 아홉의 젊은 나이로 요절한 천재시인 기형도..그래서 그가 남겼던 시 <빈집>은 남아 있는 우리들에게 그의 천재성과 미학적 감수성이 더욱 눈부시게 다가오는 것일까-?

시인이며 싱어송라이터 백창우
시인이며 싱어송라이터 백창우석희열

늘 허름한 옷에 고무신을 신고 다녀도 아무렇지도 않은 그래서 기대보고 싶은 남자, 노래하는 시인 백창우가 기형도의 시 <빈집>에 곡을 지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애끊는 그의 노래에 객석에선 한순간 숨을 죽였고 그저 숨죽여 바라볼 뿐 미동이 없었다. 그리고 그가 퇴장했다. 진한 여운이 남아서일까. 관객들의 박수가 끝없이 이어졌다.

뜨거웠던 지난 80년대 '바위섬'과 '직녀에게'를 불러 단숨에 최고의 스타반열에 오르기도 했던 광주의 가수 김원중이 마지막으로 나와 도종환 시에 백창우가 곡을 쓴 '봉숭아'를 노래했다. 저문 가을 뜨락만큼이나 애달픈 노랫말이 가슴 속을 파고 들었다.

80년대 그의 히트곡 '바위섬'을 부르고 있는 광주의 가수 김원중
80년대 그의 히트곡 '바위섬'을 부르고 있는 광주의 가수 김원중석희열

무르익은 가을 밤 플롯과 바이올린 선율에 취했던 객석을 가득 메운 200여 청중들이 일제히 박수로 앵콜(encore)을 요청하자 이날 공연을 함께 한 모든 출연자들이 나와 '우리의 노래가 그늘진 땅에 햇볕 한줌 될 수 있다면 2'를 합창하며 화답했다.

한편 나팔꽃 공연은 26일에도 한양대 동문회관 소극장에서 계속된다. 오후 4시와 7시30분 두차례 공연이 예정되어 있다. 4시 공연에는 도종환 안도현 김현성 류형선 이수진 등 나팔꽃 동인과 시인 장석남이 초대손님으로 나온다. 7시30분 공연에는 김용택 정호승 김현성 이지상 이수진 등 나팔꽃 동인과 초대시인으로 장석남이 출연한다.

나팔꽃은 지난 1999년 봄 시인 김용택 정호승 도종환 안도현 유종화와 음악인 백창우 김원중 배경희 김현성 홍순관 류형선 이지상 안치환 이수진 등이 모여 만든 시노래 모임이다. 시와 노래의 교감을 통해 좋은 시와 좋은 노래가 그득한 세상을 만들자는 취지로 이들은 매달 지방과 서울을 오가며 관객을 찾아간다.

"아, 너무 재미있어" 객석을 가득 메운 관객들이 손뼉을 치며 즐거워하고 있다
"아, 너무 재미있어"
객석을 가득 메운 관객들이 손뼉을 치며 즐거워하고 있다
석희열

"사인 좀 부탁해요" 이날 공연이 끝난 뒤 안도현 시인에게 사인을 요청하고 있는 여성팬들
"사인 좀 부탁해요"
이날 공연이 끝난 뒤 안도현 시인에게 사인을 요청하고 있는 여성팬들
석희열

덧붙이는 글 | 시노래모임 나팔꽃  

전화(02-2277-5749) 팩스(02-2277-5459) 
이메일(psnapal@hanmail.net) 
홈페이지(http://www.napal.co.kr)

덧붙이는 글 시노래모임 나팔꽃  

전화(02-2277-5749) 팩스(02-2277-5459) 
이메일(psnapal@hanmail.net) 
홈페이지(http://www.napa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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