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적인 죽음

그 돌발성과 우연성

등록 2002.10.30 15:56수정 2002.10.30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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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에 있어 죽음은 그 돌발성과 우연성에서 과거를 절대적으로 능가하는 것 같다.

러시아 모스크바의 한 극장에서 오페라를 관람하고 있던 700여명의 사람들이 갑자기 들이닥친 체첸 반군에 의해 하루아침에 인질극의 단역 배우가 되어버린다. 러시아 정부는 극장 입구에 부비트랩을 설치하고 폭탄을 몸에 두른 테러리스트들을 진압하기 위해 극장 안에 정체 모를 독가스를 주입하고 특공대를 투입한다. 마침내 인질극은 끝난다.


그러나 그와 함께 하룻밤을 예술적으로 소비하려고 극장에 간 1백 수십 명의 목숨도 땅에 떨어진다. 테러를 진압하기 위한 불가피한 방책이었으므로 국가는 이들의 죽음에 애도를 표명하는 외에 책임을 지지 않는다.

인도네시아의 발리에 모여들어 한낮의 관광을 즐기고 즐거운 밤을 위해 나이트클럽에 모여든 숱한 백인 남녀가 쾅 하는 폭음과 함께 순식간에 숯덩이로 변해버린다. 그들의 국적은 영국, 호주, 독일 등 다양하다.

테러 경고 때문에 미국인은 별로 없다. 그들은 자기가 왜 죽는지 모르고 죽는다. 그들은 그들의 국가, 그들의 문명과는 아무런 연계성도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바로 그것 때문에 그들은 돌발적이고 우연적으로 생을 마쳐야 한다.

러시아에서 인질 사태가 진행될 무렵 미국에서는 드디어 연이은 저격 살인 사건의 용의자가 경찰의 수중에 떨어졌다. 한 개종 이슬람교도 흑인과 그의 양아들이 범인이라는 것이다. 그는 걸프전에도 참전했다가 9·11을 전후로 미국이라는 자기 나라에 대해 증오심을 품게 되었다는 것이다. 개인적인 불우함이 겹쳐 마침내 그는 자기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사냥놀이를 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의 손에 희생된 사람들은 평범한 일상에서 전혀 상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어처구니없는 죽음을 당해야 하지 않았던가.

시야를 더 넓히면 모든 현대적인 전쟁과 테러의 민간인 희생자들은 그와 같은 돌발적, 우연적 죽음에 직면한 존재들이다. 그들은 자기가 세상에서 소거되어야 할 어떤 필연성도 알지 못한 채 죽어간다. 그 죽음은 서서히 진행되는 법이 없고 마치 심판처럼 갑작스럽게 삶의 허리를 끊고 출현한다.


옛날 같으면 돌발적이고 우연적인 죽음이란 천재지변의 산물이거나 몇몇 희귀한 돌연사가 전부였을 것이다. 현대는 그와 양상이 달라서 교통사고니, 산업재해니 하는 것들이 등장했을 뿐더러 무엇보다 개인으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정치적' 죽음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앞에서 언급한 사람들의 죽음은 그들 개인의 내적 관점에서 보면 전혀 정치적이라고 말할 수 없는 죽음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견해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들은 정치적으로 죽어간 셈이 된다. 이 아이러니만큼 죽음의 현대성을 잘 보여주는 것도 없으리라.


현대인들은 개인의 개인됨에 대한 과도한 믿음 속에서 살아간다. 즉 그들은 개인적 삶의 자립성과 독자성, 완전함에 대한 환상 속에서 살아간다. 그것은 현대사회가 사람들에게 사적 공간을 허용해 준 만큼 전혀 근거가 없는 환상이라고 말할 수만은 없다. 그러나 그 환상이 제약적이라고 생각하지 못하는데 문제의 발단이 있다.

현대인들은 자기 자신이 적어도 일상생활만큼은 집단적이고 전체적이고 사회적인 힘에 의해 간섭받는 일 없이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 국가 또한 사생활 보호 운운의 정책으로 그와 같은 환상을 뒷받침한다. 세상이 어찌 되었든 '나'는 '나'대로 살아가리라. 모든 현대적인 제도와 문물이 그와 같은 가치관을 뒷받침해주는 듯하다.

그러나 현대적인 죽음은, 그 돌발성과 우연성은 그와 같은 환상을 일거에 파괴한다. 가장 개인적이라고 할 만한 삶조차 완전히 개인적이지 못함을 현대적인 죽음은 보여준다. 그것은 개인주의의 신화에 심각한 파열구를 내면서 인간 공통의 운명의 문제를 드러낸다. 누구도 죽음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할뿐더러 누구도 개인의, 완전한 개인됨이라는 환상을 실현할 수 없다.

현대적인 죽음은 무자비한 힘으로 현대인들, 그 '개인주의자'들의 삶을 횡단해 간다. 그와 같은 힘에 직면하지 않은 사람들은 환상을 실재라고 웅변할 수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은 힘에 노출된 이들은 누구도 그렇게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현대적인 죽음은 개인의 완성이라는 것이 그의 사회성을 거세한 가운데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사회적 문제의 해결 위에서만 개인은 그의 삶을 순조롭게 완성할 수 있음을 깨우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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