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 위에도 '사람의 강물'이 흐르길

청계천 복원 소식에 술렁이는 서울 '황학동 벼룩시장'

등록 2002.11.12 23:26수정 2002.11.15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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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황학동 벼룩시장 사람들은 청계천 복원 공사가 시작되면 모두 이 곳을 떠나야 한다.

황학동 벼룩시장 사람들은 청계천 복원 공사가 시작되면 모두 이 곳을 떠나야 한다. ⓒ 김은주

지난 6일, '청계천 상권 수호 대책 위원회' 사람들이 시청 앞에서 집회를 벌였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청계천이 개발되면 이곳에서 터를 잡고 살아온 노점상이나 도시 빈민들의 삶이 한꺼번에 망가진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청계천에 다시 물이 흐른다면, '그거 참 볼만하겠다'하고 맘 편하게만 생각하고 있던 터였습니다. 그러다 집회 소식을 들었지요. 그리곤, 청계천에 늘어선 사람의 물결을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황학동 벼룩시장 사람들이었습니다. 청계천에 자리한 그 왁자지껄한 시장 사람들 역시 청계천이 복원된다는 얘기를 들었을 테고, 그이들 마음 또한 대책위 사람들처럼 심란하기 짝이 없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황학동에 다시 간 것은 그런 까닭이지요.

사람들 속에 있으면서도 허전함이 목까지 차 오르는 날이 있습니다. 그럴 때 생각나는 몇몇 곳이 있지요. 그 곳엘 다녀오면 한동안은 또 열심히 살아갈 힘을 얻게 되는 그런 곳 말입니다. 갯내음 나는 인천의 소래포구가 그렇고, 5일에 한 번 서는 정선 시골장이 그렇고, 없는 것 빼곤 다 있다는 황학동 벼룩시장이 또 그렇습니다.

1961년에 완성된 청계천 복개 공사 뒤에 자연스럽게 형성된 벼룩시장엔 중고 전자제품, 골동품, 레코드 가게에서 밀려난 LP,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물건 따위들이 가득 널려 있습니다. 아이들과 같이 가노라면 얼굴 둘 곳 없이 민망한 성인 비디오 테이프도 잔뜩이고, 애들은 저리 가라는 정력제 장사치들도 여럿입니다.

밀리고 밀려 황학동까지 밀려온 오래된 물건들도, 여기에선 낯 붉히지 않고 제 나름의 색깔을 내고 있습니다. 신기해서, 호기심에, 다른 데는 팔지 않으니까, 여기까지 온 기념인데…, 갖가지 이유를 들어 좌판에서 물건을 끄집어내 흥정을 해봅니다.

a 손사래치던 아줌마가 눈 감아 준 덕분에 겨우 찍은 숟가락들

손사래치던 아줌마가 눈 감아 준 덕분에 겨우 찍은 숟가락들 ⓒ 김은주

"아가씨, 사진 찍지 말라니까 자꾸 그러네."
"에이, 그냥 재미로 찍는 건데요 아줌마. 찍어서 혼자만 살짝 볼 건데두 안 돼요?"
"안돼, 안돼. 아이고, 참."


한사코 안 된다던 그 아줌마도 숟가락 몇 개, 동전 몇 개에는 인심을 써주십니다. 불상이며 등잔이며, 제법 운치가 있어 보이는 오래된 물건에는 렌즈를 가져다 대 보지도 못했습니다. 출처가 분명치 않은 것들이 많은 곳이고 보면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지요.

"할아버지, 이거 얼마예요?"
"살 거야? 살 거면 물어봐도 되지만 안 살 거면 귀찮게 하지 말고 저리 가."


카메라 가게 앞에서 삼각대 값을 물었다가 핀잔만 들었습니다. 손님에게 이렇게 불친절한데도 별로 기분이 나쁘질 않습니다. 그 자리에서 카메라 판 지 30년이 다 되어 간다 하시는군요. 척 보면 살 사람인지, 그냥 구경만 할 사람인지 알 만한 세월입니다. 중고 카메라를 가득 늘어놓고 흥정을 붙였다 소리를 질렀다 하는 모습이 참 건강해 보이십니다.

a 인적 끊긴 삼일아파트에는 플래카드가 대신 자리를 지킨다

인적 끊긴 삼일아파트에는 플래카드가 대신 자리를 지킨다 ⓒ 김은주

청계천 복원 공사가 시작되면 모두 사라질 풍경입니다. 재건축을 눈앞에 두고 있는 삼일아파트에는 철거를 반대하는 현수막과 대책을 요구하는 문구들이 바람에 펄럭이고 있습니다. 협상이 어떻게 되든 철거는 이미 기정 사실이 되어 있는 듯하고, 아파트 다음은 청계천을 덮고 있는 콘크리트가 차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청계천은 조선 시대엔 개천(開川)이라 불렀다 합니다. 인왕산과 북악의 남쪽, 남산의 북쪽에서 시작해 서울 한가운데서 만나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하천이었다지요. 서울이 도읍이 된 뒤로 성 안을 구분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곳입니다.

일제 시대에 만주로 군사 물자를 나르기 편하게 청계천을 복개해 도로를 만들겠다는 계획이 맨 처음 나왔지만 실제로 그것을 완성한 것은 대한민국 정부입니다. 인구가 늘고, 홍수 때마다 하수의 역류 문제가 나타나자 결국 청계천을 복개하기로 결정한 것이지요.

서울시에서는 이 곳을 물과 나무가 있는 녹지 공간으로 만들겠다고 공언했습니다. 청사진대로 생태적인 공간으로 거듭나서 가뜩이나 녹지가 부족한 서울의 허파 노릇을 해주면 더 바랄 것이 없는 일이겠습니다만, 아무리 좋은 일이라 한들 많은 이들의 희생 위에 이루어지는 일이라면 어느 누가 그것을 달갑게 누릴 수가 있겠습니까?

과정이야 어찌 되었든 몇십 년 동안 그 곳의 실질적인 주인은 벼룩시장 사람들이었으니까요.

청계천 상권 수호 대책 위원회 사람들은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입게 될 영업 손실을 적절히 보상하고, 상가 인접 도로를 서울시의 안인 2차로보다 1차로를 더 확보할 것과, 상권 보호를 위한 대책을 마련해 달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이들의 주장이 서울시 처지에서는 과하다 싶은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서울시장이 특별히 내세운 공약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힘없는 사람들이 입을지도 모를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는 일에 보다 각별한 관심을 기울일 수는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또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한 도리겠고요.

모쪼록 복원된 청계천에 맑은 물이 다시 흐를 때, 그 곳에 사람들의 맑은 물결도 함께 흐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a '해저 유물'이란 말이 재미있다. 이런 유물이 황학동엔 지천으로 널려 있다.

'해저 유물'이란 말이 재미있다. 이런 유물이 황학동엔 지천으로 널려 있다. ⓒ 김은주


a 시골 외갓집 마루에서 보았던 판을 여기서 다시 만났다. 반가운 마음.

시골 외갓집 마루에서 보았던 판을 여기서 다시 만났다. 반가운 마음. ⓒ 김은주


a 천막들 걷힌 뒤에도 이 곳의 삶의 냄새는 여전하면 좋겠지만...

천막들 걷힌 뒤에도 이 곳의 삶의 냄새는 여전하면 좋겠지만... ⓒ 김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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