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없는 저항의 실현, 노숙인 귀농공동체

등록 2002.11.14 16:05수정 2002.11.14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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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공동체는 농업회생과 자립적 삶의 꿈이다. 이병철님의 말에 잠시 귀 기울여보자.


"귀농이란 무엇인가. 도시에서 농촌으로 옮겨가거나, 다른 직종에서 농업으로 직업을 바꾸는 일에 불과한 것인가. 우리가 농촌, 농업으로 돌아간다 함은 단순히 거주지와 직업을 바꾸는 일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과 생산양식을 새롭게 바꾼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귀농이란 삶의 가치관에 대한 근본적인 전환이며 새로운 삶의 시작으로서 곧 우리의 지난 삶을 새롭게 구조조정하는 일이라 할 수 있다."(이병철,『살아남기, 근원으로 돌아가기』126쪽)

농업회생이야 우리가 계속 들어오던 말이고. '자립적 삶의 꿈', 어디서 듣긴 들었는데 분명치가 않다. 어디서 들었을까? 옳거니. 노숙인 복지 사업을 하면서 앵무새처럼 되뇌던 그 말이 아니가.

지난 1998년 IMF 국가위기와 더불어 거리로 쏟아져 나온 노숙인. 이들을 지원할 때마다 하늘이 계시한 천명(天命)처럼 엄청난 무게로 다가온 '노숙인 자활'. 현재 보건복지부에서 진행하는 사업의 명칭도 자활사업 아니던가. 그렇다. 노숙인 자활은 노숙인 복지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에게 해결해야만 하는 숙제인 것이다.

슬프게도 수많은 사람들이 숙제를 풀지 못하고 있다.

도시라는 문명의 구조에서 이 숙제를 풀기란 하늘에 별따기 아닌지. 왜 그런가. 도시에서 노숙인들의 자활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꽤 어리석은 이야기일 수도 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집 값, 굴뚝사업의 소멸, 무한경쟁의 시대, 빈곤의 세계화가 우리들이 서 있는 도시의 자화상이다.


이 속에서 노숙인들의 자활은 도시 저소득계층으로 편입일 뿐이다. 그것도 정말 잘돼야 말이다. 그나마 대다수는 거리나 쉼터 등에서 떠돌다가 죽어야 할 운명이다.

물론 개인적으로 자활에 성공한 노숙인들도 있고, 앞으로도 그런 노숙인들이 나올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특수한 개인적 사례를 모든 노숙인들에게 적용할 수는 없다. 더구나 앞에서 말했듯이 자활을 했더라도 도시빈민으로써 빈곤의 악순환 고리에서 벗어나기란 가능하지 않다.


도시에서 그들은 분노하고 좌절하고 절망하며 스스로 몸과 정신을 망가뜨린다. 세상에 대해 끝없이 독기를 품은 채 분노를 내뱉는다. 하지만 그 분노는 다시 자기에게 돌아와 더욱 분노하며 끝없는 나락으로 빠져든다. 악순환이다.

자활은 거짓말이다. 노숙인들을 현혹하고 노숙인 복지 종사자들로 하여금 끝없는 희생과 헌신을 강요하기 위한 거짓된 이데올로기이다. 돌아보면 노숙인 복지 봉사자들에게 자활을 실험이라도 해볼만한 사회적 여건이 주어졌던가. 기껏해야 쉼터 생활지도사로서 그들과 함께 울고 웃던 추억만 가진 채 현장을 떠났던 게 아닌가.

많은 이들이 사회기술훈련이다, 알코올예방교육이다, 정서순화프로그램이라 하며 안 해본 게 없을 것이다. 꽤 많은 돈을 쏟아 붇고 얻은 게 도대체 무엇인지. 그동안 진행된 노숙인 자활(재활)프로그램은 노숙인을 실험도구로 생각하고 치료만 하려 하였다.

바꿔야 한다. 허울뿐인 자활에서 실제 가능한 자활을 고민하고 존엄을 되찾는 복지로 탈바꿈해야 한다. 치료가 아니라 치유의 관점으로 그들을 다시 봐야 한다. 미국식 사회복지의 영향인 해체적·분석적 치료방식을 뛰어넘어 생명으로써 인간이었던 노숙인을 공동체적 치유방식으로 감싸 안아야 한다.

상처받은 영혼을 치유하기 위해서라도 농촌과 자립, 공동체적 삶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치유는 분노를 소멸시키고 화를 버리고 평화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농촌은 분노가 아니라 평화의 근본이 되는 삶의 자리며, 공동체적 자립은 사회적 지지망이 해체된 의지할 곳이 없는 상처받은 그들이 꿈 꿀 수 있는 삶의 방식이다.

새로운 삶터는 멀리 있지 않다. 몇 시간만 차를 타고 나가면 누구나 찾을 수 있다. 하지만 분노로 위장된 두려움이 새로운 삶터로 향하는 마음을 가로막는다. 그래서 너무 먼 미지의 이상향인양 피부에 와 닿지 않는다. 바로 그 자리에 서 있더라도.

이렇게 현실을 반성하면서 매우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된다.

첫째, 귀농은 직업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남기 위한 본능이라는 것. 즉, 생명의 논리로서 귀농은 단순히 도시에서 농촌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근원자리로 돌아가고자 하는 인간의 회귀본능이다.

둘째, 도시문명을 뒷받침하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는 인간을 철저히 폭력적으로 해체시키는 공간이다. 폭력의 순환구조는 인간의 이성으로는 더 이상 어찌 해볼 수 없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이 곳에서 인간은 소모품처럼 취급되고 있다.

셋째, 농업은 많은 노숙인들이 종사하고 있는 전근대적이며 소멸하고 있는 굴뚝산업이 아니라 우리의 미래를 지켜줄 가장 중요한 생명산업이자 미래산업이라는 사실이다. 누구나 알다시피 아무리 과학이 발달하고 물질적으로 풍요롭다 해도 생명을 유지하는 근간은 농업일 수밖에 없다.

귀농은 단순히 먹고사는 문제의 해결이 아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귀농을 한다면, 더구나 쥐뿔도 없는 노숙인들이 귀농을 한다면 열이면 여덟 아홉은 다시 서울로 돌아올 것이다. 노숙인 귀농을 바라보는 관점은 이래야 할 것이다.

우선 분노가 반복되고 더욱 커지는 도시에서 노숙인들의 좌절과 절망은 치유할 수 없는 불치병이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공간을 바꾸던지 삶의 방식을 바꿔야만 '분노'가 원인이 돼서 발생한 병을 치유할 수 있다.

또한 누가 어떻게 보더라도 편견의 대상인 노숙인이 아닌 존엄한 생명으로써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낙인의 눈길이 구조화된 도시문명과는 헤어져야 한다.

누구나 분노한다. 분노는 체념, 절망, 좌절, 질투 등의 감정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특히 없는 사람일수록 분노가 크다. 분노가 크기 때문에 체념도 큰 법이다. 체념이 크다고 분노의 불길이 소멸된 것은 결코 아니다. 기회만 다면 체념의 크기만큼 분노의 불길을 치솟을 것이다.

빈곤이 구조화되고 낙인의 눈길이 구조화된 도시문명에서 노숙인들의 '분노'는 대체적으로 '체념'의 상태로 나타난다. 무기력하고 나태한 상태인 '체념'으로…. 그만큼 그들의 분노는 컸다. 그들은 분노없는 저항이 무언지. 어떻게 하는 건지 몰랐다. 이제는 말해야 한다. 분노없는 저항의 실현은 귀농공동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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