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건의료노조
차수련 위원장은 당시를 회고하면서 잠시 눈시울이 붉어졌다. "한번은 10대 후반의 어린 환자가 공장에서 일을 하다 손가락이 잘려 수술실로 실려온 적이 있었어요. 잘린 부위를 보니까 접합수술이 가능하겠더라구요. 그러나 당시 접합수술에서 최고의 명성을 얻고 있던 의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절단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그 의사에게 따져 물었죠. 환자의 보호자가 접합수술을 요구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래서 다시 보호자가 누구냐고 물었더니 공장장이 보호자라는 거예요. 공장장의 입장에선 손가락이 잘린 채로 평생을 두고 불우하게 살아갈 환자의 일생보다 접합수술에 드는 비용이 훨씬 더 아까웠던 것이겠지요."
그 일을 겪은 뒤 그는 충격적이고 비정한 현실에 절망했다. 자신이 미처 알지 못했던 세상을 목격하면서 복받치는 설움과 안타까움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공장에서 일하다 손가락이 잘려나가도 보상도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어린 환자들을 보면서 그는 산재환자들의 권익과 사회문제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후 그는 한양대병원 간호사생활을 하면서 부평성당에서 운영하는 부평 일대의 불우 청소년들을 위한 검정고시 야학에 참여했다. 야학이 끝난 뒤 한 개에 100원 하는 오방떡과 만두를 함께 먹으며 그는 친누나처럼 따르는 배고픈 아이들과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당시만 해도 야학에 오는 청소년들 중에는 배 굶는 아이들이 많았던 시절이다.
그는 야학과 동시에 당시 부평성당 일대의 공장노동자들을 위한 무료 진료활동을 벌이고 있던 서울의대생들의 봉사활동에도 참여했다. 평일 밤에는 서울에서 부평까지 전철을 타고 와 청소년들을 위한 야학을 하고, 일요일에는 공장노동자들을 위한 무료 진료활동을 했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그는 "좋은 신부님을 만나 보람있는 일을 할 수 있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2년 동안 계속해온 야학과 진료활동은 87년 8월 한양대병원에 노조가 생기고 거기에 참여하면서 그만 두었다. 87년은 전두환 군부독재에 맞서 국민적 분노와 저항이 폭풍이 몰아치고 화산이 폭발하는 듯이 분출하던 시기였다. 당시 ‘호헌철폐’ 투쟁에 나서기도 했던 그는 마침내 무너져 내리는 군부독재를 장송하며 감격해하는 역사의 물줄기에 동참했다.
87년 당시 한양대병원 청소아주머니들이 화장실이나 배관실같은 곳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것을 보고 그는 ‘호헌철페’ 서명활동을 함께 했던 직장 선후배들과 노조결성 준비에 들어갔다. 그러나 초동주체들끼리 회의를 하고 조직을 다지는 사이 그해 8월 직장 내 다른 주체들이 먼저 노조를 결성해버리는 일이 벌어졌다.
부위원장으로 추대된 그는 병원측과 대등한 민주노조 결성을 위해 3개월에 걸친 현 체제 퇴진운동을 벌인 끝에 그해 11월 한양대병원 2대 노조위원장으로 취임했다. 이때부터 그의 이름표에는 ‘강짜’라는 꼬리표가 달라붙으면서 그의 인생에 구속과 해고가 반복되는 험난한 가시밭길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의 사생활과 일거수 일투족이 감시의 대상이 되었다.
이후 서노협 1, 2대 부의장과 병원노조협의회 초대 사무국장을 역임하면서 언론에 조금씩 그의 이름이 노출되기 시작했다. 90년 공안당국의 전노협 업무조사 거부 혐의로 그에게 처음으로 사전구속영장이 발부되었다. 그는 수배생활에 들어가면서 이곳 저곳으로 쫓겨다니며 숨어살았다. 설상가상으로 한양대병원측은 수배중인 그를 해고시켰다.
임신하여 만삭의 몸으로 더 이상 수배생활을 견디기 어려웠던 그는 1년 4개월만에 수배생활을 청산하고 공안당국에 자진 출두했다. 집행유예로 3개월만에 감옥에서 풀려난 그는 해고 상태에서 94년 또다시 한양대병원 노조위원장에 선출되었다.
이에 한양대병원측은 95년 그에게 복직합의 조건으로 2년간의 경과기간을 요구하면서 남편이 유학중인 미국에 2년 동안 다녀올 것을 종용했다. 하지만 2년간의 미국생활을 마치고 97년 돌아와봐도 달라진 게 없었다. 약속과는 달리 병원측은 또다시 복직을 거부하며 2000년에 복직할 것을 요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