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마리의 새, 생명, 그리고 아이들

<순천작가회의>의 생명을 생각하는 시와 노래 공연

등록 2002.11.24 15:16수정 2002.11.28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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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순천작가회의의 시와 노래의 밤

순천작가회의의 시와 노래의 밤 ⓒ 김해화

우연이었을까? <생태 환경의 위기와 시적 대응> 이란 제목으로 고재종 시인이 문학강연을 하던 바로 그날, 나는 도심의 허공에서 수직으로 떨어지는 한 마리 새를 보았다. 물론 처음에는 새와 비슷한 검은 물체를 본 것이었다. 불길한 예감에 달려가 보니 몸집이 제법 커 보이는 한 마리 새였다. 새는 이미 죽어 있었지만 몸은 아직 보드랍고 따뜻하였다. 근처에 빨간 물감 같은 핏방울이 두어 점 눈에 띄었지만 새의 몸 어디에도 핏자국은 보이지 않았다.

강연이 있기 전날에는 <생명을 생각하는 시와 노래 공연>이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길바닥에 떨어진 새를 보자 어디 가까운 산기슭에라도 묻어주고 싶은 마음이 뭉클 솟구쳤다. 하지만 나도 한 사람의 회원으로 행사 준비를 도와야하는 처지라 그럴 수도 없어 건물 앞 화단풀숲에 잠시 몸을 누인 뒤 다시 돌아와 데려갈 것을 약속하고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새가 문득 떠오른 것은 다음날 새벽이었다. 새가 나의 손에서 떨어져 화단 풀숲으로 옮겨지던 그 순간이 생생하게, 그리고 아프게 되살아났다. 지금쯤 새는 싸늘한 시체가 되어 있으리라. 그런데 왜 나는 지키지 못한 것일까? 그 여린 생명과의 약속을. 인간만 못한 미물이어서 그랬을까? 그렇다면 생명에 대한, 그 상처와 아픔에 대한 예민함으로 시를 쓰자던 전날의 그 다짐들은 무엇이란 말인가.

길을 가다말고
가로수에 몸을 기대어 하늘을 쳐다본 적이 있는 사람은
한 가지에서 자란 잎새들도
바람에 반응하는 모양이 다 제 각각인 것을 압니다.

그 중 어느 잎새 하나
어디 밑동을 다치기라도 한 듯
몸의 요동과 흔들림이 유난히도 간절하여
그 불구의 노래와 생명의 아픔에 한참 마음을 주기도 합니다.

어쩌면 그 잎새들은
제 몸이 아파서가 아니라
생명에 대한, 그 상처와 아픔에 대한 예민함으로
反생명 非인간의 세상 바람에 맞서
홀로 고독한 싸움을 벌이고있는 지도 모를 일입니다.

혹시, 그 잎새는 그 나라의 시인일지도 모르지요.
-'모시는 글' 중에서



문학인들은 모름지기 나, 혹은 우리 자신의 즐거움과 영화를 위해서가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이웃과 생명에 대한, 그 소외와 상처와 아픔에 대한 예민함으로, 사랑으로 시와 문학이 살아 있기를 소망해야한다고 떠들어댄 것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이런 생각에 휩싸이다가 내 자신이 슬며시 가여워졌을까. 나는 이렇게 나를 위로하고 있었다.

아, 그래도 이러한 반성을 스스로에게 촉구하는 족속은 아마도 시인뿐이리라. 아니, 자기 삶을 아프게 돌아보는 자, 그들만이 시인이요, 그것만이 시인의 무기요, 또한 그것이 시의 정체성이리라.


퍼질러 싸면 독한 냄새가 나고
오래 우려놓으면 구수한 된장 냄새가 나는 것

쌓아놓으면 똥이 되고,
사람의 밭이랑 사이사이에 뿌리면 거름이 되는 것

새벽엔 정수리에 박히는 별이 되었다가
정오에는 심장을 뚫고 나가는 화살이 되는 것

언제 저 벌판을 건너왔을까
아이들 울음소리 그친 마을 어귀
오래된 느릅나무 잎사귀를 화들짝 흔들고 가는 것.
-나종영의 '詩' 전문


a 시와 노래와의 아름다운 어울림.

시와 노래와의 아름다운 어울림. ⓒ 김해화

시인은 '새벽에는 정수리에 박히는 별이 되었다가/ 정오에는 심장을 뚫고 나가는 화살이 되는 것'이 시라고 말하고 있다. 자기 탐욕에 휩싸여 마냥 쌓아놓으면 독한 냄새가 나는 똥이 되고 말지만, '사람의 밭이랑 사이사이에 뿌리면 거름이 되는 것'이 바로 시라고. 그것이 참다운 시라고.

<생명을 생각하는 시와 노래 공연>을 준비하는 민족문학작가회의 순천지부(지부장 이학영 시인) 회원들은 마음이 부산하면서도 초조했다. 과연 사람들이 와줄 것인가? 아니, 이런 저런 인연의 끈으로 자리는 채워진다고 해도 이 시대에 과연 생명을 생각하는 시와 노래가 인간의 가슴에 감동을 던져줄 수 있을 것인가? 그래도 순천만의 아름다운 풍광들이 밑그림으로 깔린 시화 액자를 벽에 거는 남자회원들과 떡과 다과와 음료를 준비하는 여자회원들의 표정과 손길에는 어떤 희망 같은 것이 배어 있었다.

새벽 먼동보다 먼저 일어나
소변통 머리에 이고 와
참깨밭에 오지게 퍼붓는
갑진엄니

바가지로 퍼붓는 손길보다
마음이 바빠
깨꽃 같은 며느리 얻고 싶은
마음이 바빠
해마다 같은 자리에
참깨만 심어 놓고
깨꽃 눈부시게 피워냅니다

재작년 추석,
차례상을 다부지게 차려내고는
돌아설 때 못내 눈물 떨구던
눈에 환한 부산색시
기다리는 맘을
기다리다 타들어 가는 마음을
마흔 살 갑진이는
아는 지 모르는 지

등줄기 땀방울은 칭얼대며
온 적삼을 적시고
허연 잇몸 드러내고 환하게 웃는
참깨밭에서, 갑진 엄니
등허리만 굼싯거립니다
-장애선의 '참깨 밭에서'


새벽 먼동보다 먼저 일어나는 사람은 이 땅의 농부들이다. 생명을 파종하고, 생명을 가꾸고, 생명을 거두는 사람들. 시인이 가장 닮아야 하는 얼굴이 있다면 그것은 농부의 얼굴이리라. 그런데 지금 그들은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는가?

시장 다니는 길모퉁이에
비바람을 맞으며 홀로 서 있는
삼단 짜리 화환 하나
주위 어디를 둘러보아도
초라한 건물뿐인 이곳에
축발전이란 이름표를 달고
무참히 버려졌을 가여운 영혼
무거운 형틀 위에 발이 묶여
스스로는 어쩌지 못해
바람에 온몸 찢겨지고 있다
바람이 세차질수록
여린 속살들 신열에 몸을 떨며
서로를 부등켜안고 부서지며 웃고 있는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마지막 순간
숨소리마저 내기 힘든 침묵으로
땅위에 흩어져 어디론가 날아가는 꽃들을 보며
한발자국도 그 자리를 떠날 수 없었던 나

그날 밤
꽃들이 환생하는 꿈을 여러 번 꾸었다
-오미옥의 '화환 하나'


다 쓰고 버려진 화환 하나. 더 이상 아무 것도 아닌 존재에게 가 닿은 저 따스한 시선을 시인의 과장이나 엄살이라고 여기는 사람도 있으리라. '물고기처럼 자유롭고 싶다'는 말을 남기고 강제가 없고 시험이 없는 먼 나라로 훌쩍 떠나버린 한 초등학생의 가슴 시린 영혼의 절규에도 무심할 수 있는 그들이라면. 생명과 상품의 차이를 모르는 그들이라면.

천년쯤 이를 갈면
몸에 가시 돋겠습니까
가시돋힌 몸 곤두세워 나 지금 환삼덩굴로 기어오르는
울타리

하룻밤 음모만으로도
이런 울타리 수백 수천 세상을 나누고 찢고
언 땅 깊이 뻗어나갈 수 없어
끝내 이 경계를 넘지 못하는 계급의 뿌리
나는 지금 시들어가며 손을 놓으려고 하는데
그 사람이 울타리를 넘으려고 합니다

가슴에 지닌 사랑 얼마나 맑아져야
덩굴손이 돋겠습니까
사나움 날카로움 독살스러움으로 피 묻혀
가시 돋힌 울타리
긁힌 가슴에조차 맑은 이슬 방울지는 사람
일편단심
세상의 경계를 넘으려고 합니다

언뜻 발돋음해 들여다보아버린 서러운 땅을 향해
밝고 푸른 생애의 가장 말금한 순간
꽃을 피우려는 사람
씨앗 맺으려는 사람
지쳐버린 내 생애와 뒤엉키려고 합니다
-김해화의 '나팔꽃 연가'


a 시로 꾸려진 김기홍 시인의 시화.

시로 꾸려진 김기홍 시인의 시화. ⓒ 김해화

시인은 시를 쓰는 사람이지만 시를 감상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단 한 편의 빼어난 시를 써 본 적 없는 나 같은 시인도 이런 아름다운 시를 해독할 수 있는 특권이 부여된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다. '긁힌 가슴에조차 맑은 이슬 방울지는 사람'이라니, 그가 누구인가. 그가 바로 시인이 아닌가. 이 세상에 시가 없고 문학이 없다면 긁힌 가슴은 긁힌 가슴일 뿐이다.

시 낭송은 순천작가회의 시인들과 그들이 배출한 길문학회 회원, 그리고 순천대학교 문예창작과 학생이 함께 참여하여 좋은 화음을 만들어 냈다. 시 낭송 사이사이에는 <길에서 만난 사람들>의 노래 공연이 이어졌다. 잔잔하면서도 서정이 넘치는 맑은 음색과 가락으로 청중들을 매료시킨 노래들은 나종영, 박두규, 김해화, 김기홍, 김청미 등을 비롯한 순천작가회의 시인들의 시를 노래로 만든 창작곡이어서 울림이 더욱 컸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서 그리 보인 것일 테지만, 공연을 끝내고 돌아가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홍시 같기도 하고 노을 같기도 한 붉은 색조가 묻어 있었다.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많은 사람들이 와 주었고, 무엇보다도 우리의 꿈나무들인 이 지역 청소년들이 군데군데 눈에 띄어 어둠 속에서도 희망을 보는 것 같았다. 작년 담임 반 아이들도 눈에 띄었다. 그들은 혹시 오늘 지루하지 않았을까? 물어보니 대답들이 긍정적이다.

"시가 노래로 변하니까 기분이 묘해요."
"저도 언제가 저 자리에 설래요."
"좋았어요. 그리고 선생님 오늘 너무 멋졌어요."
"너희들도 오늘 너무 멋지다."

그저 해본 말이 아니었다. 그들은 오늘 사랑을 배웠을까? 나 아닌 다른 생명을 나와 동일하게 여기는 어진 마음을 가슴에 새긴 것일까? 아니, 그들은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의 생명을 사랑하게 되었을까? 나를 바라보는 아이들의 눈빛이 전보다 깊어 보였다. 이 글을 마치는 대로 나는 건물 화단 풀숲에 두고 온 새를 데리러 갈 생각이다. 어디 양지 바른 곳을 찾아 작은 성지를 만들어 주고 오리라. 새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죽은 새가 가볍다
아내가 새장에서 꺼내어
이틀 동안 신문지에 말아 놓은 것
땅에 묻으려고 보니
죽은 새가 가볍다

부장품처럼 제 몸에서 떨어지는
깃털보다도
바람보다도
잠보다도 가볍다

새의 무게는
생명의 무게였을까?
-졸시, '가벼운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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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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