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빈한 삶과 자신의 피를 팔아 아들의 교육비를 댔으나 아들에게 버림받은 천방순씨 부부 모습진완바오 자료사진
내가 중국문학에서 가장 인상적으로 만난 피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중국의 위대한 문학가이자 사상가인 루쉰의 작품에서 만났던 피다. 루쉰이 미몽(迷夢)에서 깨어나지 못한 중국인을 묘사할 때 혁명가가 처형된 피를 만두에 발라 폐병에 걸린 아들에게 주는 인물로 묘사했었다. 혁명가의 성스러운 피가 무지한 민중에게는 생명을 만들어 낼지도 모른다는 것을 은유하면서 루쉰은 중국인의 지적인 성숙을 갈망했다. 또 다른 하나는 창작 초반기에 좀 기괴한 느낌의 작품을 써내던 위화(余華)의 ‘허삼관 매혈기’다. 인생의 위기가 닥칠 때마다 자신의 피를 팔아서 위기를 넘기거나 중요한 돈을 만들던 허삼관을 통해 중국 현대사를 관통하던 중국인들의 삶을 쉽게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필자는 최근에 신문을 통해 두 소설에 못지 않은 인생사들을 만나면서 중국인들이 헌혈을 할 수 있을지를 더 곰곰이 생각해 봤다. 한 이야기는 ‘현대판 허삼관’의 비극적인 결말을 맺는 기사였다. 현대판 허삼관의 새 이름은 천방순(陳邦順)이다. 50세 가량인 그는 황량한 중국 서부 지역의 중간에 있는 칭하이(靑海)성 러두(樂都)현에 있는 고우탄(溝灘)촌에 산다. 사방이 황토의 대지인 그 땅이 생산해 낼 수 있는 것이라고는 식구들이 연명하는 데나 쓸 만한 곡식이다.
그런데 그의 세 아들 가운데 큰아들 샤오량(小良)이 공부를 제법 잘했다. 부모는 고민 끝에 서부에서 공부 잘하는 학생이 모이는 교육도시 시안(西安)의 모 대학으로 자식을 유학 보냈다. 이때가 97년이었고, 아들은 유망한 전자자동화 전공이어서 부모의 기대감은 더했다. 하지만 한 학기 최소 5천 위안(우리 돈 80만 원 가량)가량 드는 학비 등을 포함해 아들의 교육비를 만들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결국 천방순씨는 피를 팔아서 학비 등을 대기로 했다. 병원에 가서 때로는 석달에 한 번, 때로는 한 달에 한 번, 때로는 하루에 한 번씩 피를 팔았고, 때에 따라서는 하루에 세 번이나 피를 판 적도 있다.
4백cc를 뽑는 전혈로 1백50위안을 받고, 혈장을 뽑아서는 80위안을 벌었다. 한 달에 보통 3백~4백 위안을 벌 수 있었다. 몸이 좋은 해에는 한해에 5천 위안까지 벌었다. 6개월에 한 번 이상은 할 수 없는 법을 피하기 위해 그는 9개 매혈소를 돌아다니면서 피를 팔았다. 때로는 그 대신에 아내가 피를 팔기도 했다. 모두 아들 샤오량이 성공해서 집안을 일으키기 바라는 희망 때문이었다. 그는 자식을 잘 가르쳤다고 생각했다. 2001년 연초에 아들은 베이징에 직장을 잡았다며, 방세 등을 포함해 4천 위안을 부탁했다. 당장에 돈이 없어서 2천 위안을 빌려서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