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시 곽호기에게는 일곱 아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 다섯은 온역(瘟疫 :염병)이라는 돌림병이 창궐하였을 때 잃었고, 하나는 야생마를 길들이던 중 떨어지는 바람에 목이 부러져 죽었다.
곽영아의 유일한 동생이자 막내인 곽인열(郭仁烈)은 어느 날 갑자기 실종된 이후 지금껏 소식이 없다. 하여 사람들은 호환(虎患 :호랑이에게 잡아먹히는 것)을 당하였을 것이라 하였다.
곽호기의 후대를 이을 아들이 모두 사라졌기에 이정기는 다음 대 태극목장주가 될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의형제를 맺은 아우가 있었다. 장일정의 부친인 장승환(張承煥)이 그였다. 이정기와 장승환은 그들의 나이 아홉일 때 우연히 태극목장에 흘러들었다. 이후 천신만고 끝에 이정기는 제일목부가 되었고, 장승환은 제이목부가 되었다.
그들의 출신 내력에 대하여 아는 사람들은 전무하였다. 그저 전란(戰亂) 중에 부모를 잃은 고아이려니 한 것이었다. 사실 당시에는 고아가 강바닥의 조약들보다도 많을 때였기에 아무도 이들의 출신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이 없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정기와 장승환이 모두 한족(韓族)이라는 것이다. 한족만의 특성인 팔굽 안 쪽에 가느다란 선이 있기에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처음 태극목장으로 흘러들었을 때 이정기의 등에는 젖먹이가 업혀 있었다. 이제는 장승환의 부인이자 장일정의 모친이 된 이형경(李炯卿)이었다. 다시 말해 이정기와 장승환은 처남 매부지간이었다. 그리고 이회옥과 장일정은 고종사촌지간이었다.
"하하! 이 장난꾸러기 같은 녀석…!"
이회옥은 거친 숨을 몰아쉬는 비룡의 고삐를 쥐고 부드럽게 토닥였다. 그것은 애정이 듬뿍 담긴 손놀림이었다. 갓 태어난 비룡을 처음 배정 받았을 때 회옥은 무척이나 실망스러웠다. 다른 망아지에 비하여 형편없이 작고 말라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이정기는 정성 들여 키우면 장차 명마가 될 수도 있다면서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후 정말 정성을 다하여 비룡을 돌본 결과 최종 우승까지도 넘볼 수 있게 된 것이다.
히히히힝! 히히히히힝!
더 달리고 싶다고 투레질을 하던 비룡은 소년의 토닥임에 차츰 진정이 되는 듯하였다. 그러고 보니 비룡은 이마 한복판에서 시작한 흰 점이 입 쪽으로 길게 내려와 좌, 우측 어금니 부근까지 뻗쳐 있었다. 또한 눈 아래에 큰 눈물샘이 있었다.
태극목장의 늙은 목부들은 이런 형상을 지닌 말은 주인을 불행하게 하는 흉마라 하였다. 그러면서 상마경(相馬經)이라는 책에 기록되어 있기를 이런 말을 유안(楡雁)이나 적로(的盧)라 하며, 이 말은 빌려 탄 사람은 객사(客死)하고, 주인은 기시(棄市 : 길거리에서 처형당하는 것)를 당한다 하였다.
하여 아깝기는 하지만 불행한 일이 생기기 전에 도살해야한다고 하였다. 하지만 회옥은 이 말을 믿지 않았다. 어떻게 누가 지었는지도 모르는 책의 내용을 믿고 아무런 잘못도 없는 비룡을 죽일 수 있느냐며 항변을 하였지만 어른들은 비룡을 도살하기로 결정하였다.
오늘이 바로 그 날이었다. 그렇기에 모두들 잠든 신 새벽에 비룡을 끌고 평상시에는 잘 오지 않는 이곳으로 온 것이다. 이곳은 군데군데 끝을 알 수 없는 절벽들이 있어 노련한 목부들조차 오지 않으려는 곳이다. 자칫 말도 잃고 자신의 목숨 또한 잃을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말이라는 짐승은 무척이나 겁이 많은 짐승이다. 호랑이나 늑대 등 맹수는 물론이고 수풀 속에 있는 뱀만 봐도 놀라서 미친 듯이 날뛰곤 하는 짐승이다. 그런데 이곳에는 유난히도 독사들이 많이 있었다. 따라서 놀라 날뛰다가 자칫하면 끝도 없는 절벽 아래로 떨어지겠기에 오지 않는 것이다.
이곳에 있으면 어른들이 찾으러 오지 않을 것이고 이제 며칠 후면 태극마술대회가 열린다. 그때까지 기다렸다가 대회에 우승만 하면 모든 일이 없었던 것이 될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비룡은 아직 어리지만 소년 정도는 능히 태울 수 있었다. 그러나 회옥은 웬만해서는 비룡의 등에 올라타지 않았다. 너무도 사랑하는 비룡을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타야하였다. 대회에 나가려면 기수와 말이 혼연일체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룡아! 무겁겠지만 나를 태워야겠다. 힘들어도 참아! 알았지? 이게 다 너를 위해서야!"
비룡이 진정하는 기미를 보이자 이회옥은 재빨리 올라탔다.
"이럇! 이제 마음껏 달려봐. 알았지? 우린 꼭 우승을 해야해!"
다각 다가닥! 다가닥! 우두두두두두두!
천천히 걷는가 싶던 비룡은 쏜살처럼 내달리기 시작하였다. 아직 망아지였지만 그 속도는 웬만한 말과 다를 바 없을 정도였다. 잠시 후 회옥과 비룡은 대흥안령산맥 깊숙한 곳으로 점점 더 깊이 들어가고 있었다.
같은 시각, 태극목장주인 곽호기의 집무처에는 싸늘한 냉기가 흐르고 있었다. 안에 있는 사람은 장주인 곽호기 외에 이회옥의 부친인 이정기와 그의 매제인 장승환, 그리고 두 명의 회삼인(灰衫人)이 있었다.
그들의 가슴에는 한 자루 장검이 구름을 뚫고 있는 모양이 수놓아져 있었다. 이것은 천하무림은 완전 제패한 무림천자성(武林天子城) 소속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황금빛 수실로 수놓아진 검과 자색 구름으로 미루어 무림천자성에서도 제법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인 모양이었다.
두 인물은 무림천자성의 병마(兵馬)담당인 철검당주(鐵劍堂主)방옥두(方沃斗)와 철마당주(鐵馬堂主) 뇌흔(雷欣)이었다.
"대인, 그 가격에는 도저히 드릴 수가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저잣거리에서 구할 수 있는 보통 말의 가격이 이백 냥 정도 합니다. 그런데 어찌 대완구를 단돈 오십 냥에 달라고 하십니까?"
차기 목장주로 내정된 이정기는 목장의 잡무를 보던 중 목부로부터 보고를 받고 황급히 달려왔다. 무림천자성에서 온 손님이라면 기다리고 기다리던 귀빈이기 때문이었다.
반년 전에 보내 온 서찰에 의하면 무림천자성에서는 대완구 일천 필을 구매하겠다고 하였다. 한 마리 당 아무리 적게 잡아도 사천 냥 정도를 받을 수 있으니 사백만 냥에 달하는 거금을 쥘 수 있는 기회였다.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태극목장의 말이 무림천자성에 팔려갔다는 소문이 번지면 조만간 엄청난 사람들이 몰려들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머지 이백 필도 모두 처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곽호기를 비롯한 태극목장의 식솔들은 오래 전부터 이곳 대흥안령산맥을 떠나 장백산으로 옮기기를 갈망하고 있었다. 그곳 역시 광활한 초지가 있는 곳이며, 이곳보다 물이 훨씬 풍부한 곳이기 때문이었다.
이곳은 워낙 물이 귀하기에 가뭄이 들면 수십 리나 걸어가 물을 길어와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그곳으로 옮기면 그런 수고는 하지 않아도 된다. 중원에서는 장백산이라 부르지만 한족들은 백두산(白頭山)이라 부르는 그 산은 민족의 영산(靈山)이었다.
문제는 그곳으로 향하는 길목마다 포진하고 있는 마적(馬賊)이나 비적(匪賊)들이었다.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여기는 그들을 피하려면 천상 험로(險路)를 개척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문제는 그 길 가운데에는 말이 갈 수 없는 곳이 있다는 것이다.
한두 마리라면 어떻게 해 볼 것이나 일천 필이 훨씬 넘는 말들을 데리고는 도저히 갈 수 없는 길이다. 그렇다고 사람이 말을 지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여 지난 수년간 마음만 있을 뿐 실행에 옮길 엄두를 낼 수 없었다.
그러던 차에 무림천자성에서 무려 일천 필의 대완구를 구매하겠다는 서찰을 보내왔으니 얼마나 반가웠겠는가! 하여 잔뜩 기대를 하며 준비를 해 왔다. 그렇기에 최대한 정중한 영접을 하였다.
그런데 거들먹거리면서 들어선 무림천자성의 철마당주는 대뜸 기가 막힌 소리를 하였다. 마리 당 사천 냥 짜리 말을 오십 냥에 달라는 것이다. 물론 이 가격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가격이다. 키우는 동안에 들어간 목부들의 품삯에도 훨씬 못 미치는 헐값이기 때문이었다.
중원의 어느 저잣거리를 가도 비루먹은 망아지라 할지라도 오십 냥은 너끈히 받는다. 그런데 천하제일 명마라 할 수 있는 대완구를 그 가격에 달라고 한 것이다.
하여 처음에 이정기는 이 말이 농(弄)인줄 알았다. 하지만 철마당주의 말이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는 안색을 굳혔다. 그것은 그의 의제인 장승환도 마찬가지였다.
"이보시오 대인! 너무 한 것 아니오? 말 한 필에 오십 냥이라니요? 설마 비루먹은 망아지를 달라는 것이오? 그런 말을 원하신다면 굳이 이곳까지 오지 않으셔도 되었소이다. 저희 목장의 말은 최소한 마리 당 사천 냥은 받아야 하오. 대인들께서도 그러한 사실을 잘 알고 계시지 않소이까? 그러니 마리 당…"
"시끄럽소! 마리 당 오십 냥에 줄 것이오? 아니면 안 줄 것이오? 흥! 무림천자성을 상대로 폭리를 취하려 하다니…"
"대인! 폭리라니요? 저희 태극목장으로 말 할 것 같으면…"
"흥! 보아하니 네놈은 아무것도 아닌 듯한데… 시끄럽다! 네놈은 아가리 닥치고 처박혀 있어라."
"허억…!"
철마당주의 말에 거품을 물고 답변하던 장승환은 느닷없이 아혈(啞穴)과 마혈(麻穴)을 점혈 당하자 뻗뻗하게 굳어 버렸다.
거래를 하자고 와서는 상대의 혈도를 점혈한다는 것은 무림의 사마외도나 무뢰배들도 하지 않던 짓이다. 그런데 무림의 정의를 수호한다는 무림천자성의 철마당주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혈도를 점혈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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