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자무협소설> 전사의 후예 9

위기의 연속 (4)

등록 2003.01.05 11:27수정 2003.01.05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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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허겁지겁 연자탕을 퍼먹던 장일정은 기가 막힌 맛에 넋이 나갈 지경이었다. 중원에서 연자탕은 흔한 음식이다. 따라서 질리도록 먹어본 음식이다. 하지만 이토록 맛이 있는 것은 세상에 태어난 이래 오늘로서 딱 두 번째였다.

입에 넣기가 무섭게 살살 녹은 듯한 그것은 얼마 전 독사에게 물려 신음하고 있을 때 목숨을 구해주었던 심마니 노인의 초옥에서 먹어봤던 것이다.


고개를 들어 노인을 살펴본 장일정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맛은 비슷한데 사람이 틀리기 때문이었다. 먼저의 심마니와 다른 점이 있다면 눈앞의 노인은 같은 백발이기는 하지만 이마가 훌렁 벗겨져 있다는 것이다.

잠시 후 그 많던 연자탕을 모두 비우자 노인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허허허! 녀석, 이제 좀 허기가 가셨느냐? 쯧쯧…! 얼마나 굶었으면… 자, 이제 배를 채웠으면 슬슬 하산하자. 어젯밤에 보니까 인근에 제법 많은 늑대들이 있는 모양이더구나."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에 묻은 먼지를 털어 내자 장일정 역시 일어났다. 인근에 늑대가 있다면 이곳에 더 머물고 싶어도 머물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헌데, 네 성명은 무엇이냐?"
"저, 저는 장일정이라고 해요."
"장일정? 흐음! 그럼 태극목장주인 곽호비와는 어떤 관계지?"
"저의 아버님은 태극목장 제이목부셨지요…"


하산하는 동안 노인의 물음에 장일정은 하나도 숨김없이 이야기하였다. 숨기고 말고 할 것도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의 뒤에는 비호가 따르고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장일정은 노인이 유명한 의원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의원으로서 강호에 적지 않은 명성을 쌓은 노인은 이곳 대흥안령산맥 부근에 초옥을 지어놓고 자신이 평생 동안 익힌 의술을 집대성한 의서(醫書)를 편찬하는 중이었다.


천하에는 명성이 자자한 의원이 둘 있었다. 하나는 장강 이남에 있는 모든 의원들로부터 존경과 흠모를 한 몸에 받고 있는 남의(南醫) 호문경(湖們景)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장강 이북에서만큼은 그 어느 누구도 그의 신묘한 의술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북의(北醫) 목재충(穆在忠)이었다.

세상사람들이 말하길 남의는 침술에 있어 천하제일이며, 북의는 탕약에 있어 천하제일이라 칭했다. 이들 둘은 서로를 흠모하면서도 단 한번도 마주친 적이 없는 사이로 알려져 있었다.

장일정은 전혀 모르고 있었으나 앞서가는 노인이 바로 북의 목재충이었다. 그가 중원 한복판에 있지 않고 이곳 대흥안령산맥 너머에 자리를 잡은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이곳에서 자생하는 약초의 효능이 중원의 그것보다 월등하기 때문이었다.

현재 그는 심혈을 기울여 하나의 영단을 제련하고 있었다. 제련에 성공하기만 하면 소림사의 자랑인 대환단(大丸丹)이나 무당파의 자랑인 태청신단(太淸神丹)의 효능을 능가하게 될 것이다.

북명신단(北溟神丹)이라 이름 붙인 그것은 북의가 무려 삼 년 동안이나 차디찬 북해(北海)를 뒤진 끝에 간신히 채집한 희귀영초인 만년빙극설련실(萬年氷極雪蓮實)이 주성분이었다. 세상의 온갖 희귀한 것을 기록한 대황경(大荒經)에는 이것에 대한 짤막한 기록이 있다.

사시사철 동토인 가운데에서도 가장 추운 곳에서만 서식하는 이것은 삼천 년에 한번 꽃을 피운다. 꽃이 피어 있는 시간은 불과 반각. 이 시간이 지나면 청색 설련실이 맺힌다.

이것 역시 반각 정도만 매달려 있다가 땅으로 떨어지는데 떨어지는 즉시 한 줌 먼지로 화한다 되어 있다. 이 열매에는 삼천 년 동안 흡수한 냉기가 담겨 있는데 이것이 땅에 닿는 순간 모든 냉기를 잃고 먼지로 변한다는 것이다.

북의는 만년한옥(萬年寒玉)으로 만든 용기를 들고 만년빙극선련실을 얻기 위하여 얼어붙은 동토를 삼 년이나 뒤졌고, 이후에는 이 년 동안이나 이것의 곁에서 완전히 익기를 기다렸다. 그랬기에 북명신단을 제련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북의가 의서를 편찬하는 한편 이것을 제련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수년 전, 천하제일의로 추앙을 받던 북의는 고대광실(高臺廣室)에서 기거하며 여러 후학(後學)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중원의 한복판이라 할 수 있는 하남성(河南省)의 동쪽에는 동에서 서로 비스듬하게 뻗쳐 있는 거대한 산맥이 있다. 멀리서 보면 마치 소가 엎드려 있는 형상과 비슷하다 하여 복우산(伏牛山)이라 부른다.

이러한 복우산 동남쪽에는 남소(南召)라는 작은 시진이 있다. 이곳은 복우산의 깊은 산 속에서 채취된 약초들이 일단 집결하는 곳이다. 그런 연후 이곳으로부터 천하 각지로 팔려나간다. 그렇기에 의술과 관련이 있는 사람들은 남소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남소가 천하에 널리 알려진 이유는 북의 목재충이 이곳에 장원을 짓고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었다. 장원은 천의장(天醫莊)이라는 현판을 달고 있었다. 그것은 천자가 친히 하사한 것이다. 어린 황자가 죽음의 위기에 처했을 때 신묘한 의술로 살려낸 것을 치하하는 의미로 내린 것이다. 천의장이란 하늘이 내린 의원이 있는 장원이라는 의미라 하였다.

장원이 건립되자마자 천하 각지로부터 각종 고질을 앓는 환자들이 쇄도하기 시작하였다. 그들 가운데 정말 고치기 어려운 환자는 북의가 직접 진료하였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은 북의의 가르침을 받으려 몰려든 의생들이 진료를 하였다.

모처럼 천의장을 찾았으나 너무 늦은 관계로 목숨을 잃은 자들도 많았다. 그들은 설사 대라신선(大羅神仙)이 환생한다 하더라도 손도 대지 못할 정도로 중증 환자들이었다. 그렇지 않은 환자들은 천의장을 찾은 덕분에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남소가 이토록 유명해 진 것이다.

북의는 환자를 돌봄에 있어 철칙으로 여기는 원칙이 있다. 첫째 환자의 신분을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통증을 느끼는 것에는 귀천(貴賤)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병증의 위급에 따라 환자를 진료하였다. 다시 말해 위급한 환자를 먼저 돌보고 그렇지 않은 환자를 나중에 돌본다는 것이다.

둘째는 환자의 재물을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은자가 있다면야 당연히 적당한 진료비를 받지만 정말 찢어지게 가난한 환자에게는 진료비를 받지 않는 것은 물론 오히려 은자를 들려 보내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천하에 가뭄이 들면 먹을 것이 귀해지는 법이다. 이럴 때 은자가 있는 자들은 그래도 곡식을 사서 먹을 수 있지만, 그렇지 않는 사람들은 풀이라도 뜯어먹으며 연명(延命)하여야 한다. 이것마저 사라지면 다음에 먹는 것은 나무껍질이다.

허기를 메우기 위하여 이것을 끓는 물에 삶아 먹고 나면 반드시 문제가 발생된다. 제대로 소화되지 않는 부분이 많기에 대변을 볼 때 항문이 찢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을 지칭할 때 찢어지게 가난하다는 표현을 하는 것이다.

이렇듯 가난한 환자는 대부분이 섭생(攝生)이 좋지 않아 질병에 걸리게 마련이기에 제대로 된 음식물을 섭취하면 호전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들은 은자가 없기에 제대로 된 음식물을 먹을 수 없다. 그렇기에 적지 않은 은자를 쥐어보내는 것이었다.

그것으로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사먹으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가져간 은자는 형편이 좋아지면 갚으라 하였다. 물론 형편이 좋지 않으면 안 갚아도 된다 하였다. 놀랍게도 은자를 가져갔던 사람들 가운데 팔 할 이상이 가져갔던 은자를 갚았다고 한다. 형편이 피는 즉시 가져온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하였다.

아무튼 이 두 가지 원칙으로 북의는 천하제일의라는 영예스런 칭호를 얻었다. 뿐만 아니라 천하인들의 흠모와 존경을 받았다.

북의에게는 자신의 의발을 전수받을 아들이 셋이나 있었다. 모두 일가를 이뤄 손자, 손녀의 수효만 해도 열이 넘었다. 그야말로 남부러울 것이 없는 상황이었다. 이 모든 것은 어려서부터 오로지 의학 일로(一路)만을 열심히 걸은 결과일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다. 삭망인지라 달도 없어 어두운 밤이었다. 천의장의 담을 넘는 일단의 무리들이 들이 있었다. 검은 복면을 한 그들은 온통 피투성이인 소년 하나를 데리고 있었다.

그때 북의는 풍의(風懿)에 걸린 행랑아범을 치료하던 중이었다. 천의장의 식솔이기는 하나 한번도 대화를 해 본적이 없는 그는 언제나 성실하게 천의장 곳곳을 쓸고 닦았다. 이러한 모습을 여러 번 보았기에 그가 행랑아범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었다.

의서 가운데 하나인 직지방(直旨方)에 기록되어 있기를 풍의란 갑자기 정신이 아찔해서 넘어지고 혀가 뻣뻣하여 말을 하지 못하며, 목구멍이 막혀서 흐느끼는 소리를 내는 것이라 하였다.

득효방(得效方)에도 똑 같이 기록되어 있는데 땀이 나고 몸이 나른하면 살고, 땀이 나지 않고 몸이 뻣뻣하면 칠 일만에 죽는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이것은 담수(痰水)가 화를 억제하고 심규(心窺)를 막아서 말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이라 하였다. 의서(醫書)에는 열이 있으면 우황청심환을 쓰고 허(虛)했으면 도담탕(導痰湯)을 쓰라고 되어있다.

행랑아범이 쓰러진지 오늘로서 꼭 칠 일이 된다 하였다. 쓰러지면서 머리를 댓돌에 박는 바람에 적지 않은 선혈을 흘렸다. 하여 맨 처음 그를 진료한 의생은 잘못된 진단을 내렸다. 그렇기에 그동안 헛된 치료만 받아온 것이다. 따라서 오늘밤을 넘기면 꼼짝없이 죽어야 하는 목숨이었다.

의생은 아무리 치료를 해도 차도가 없자 스승인 북의에게 데리고 왔고 그는 즉각 풍의라는 것을 알아냈다. 하여 긴급히 그를 치료하기 위해 아직까지 의청(醫廳)에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늦은 감이 있지만 워낙 튼튼한 신체를 타고난 행랑아범이기에 증상으로 보아 도담탕으로 다스리기만 하면 완치될 듯 싶었다. 북의는 자신의 거처를 깨끗하게 유지시키기 위하여 하루도 빼 놓지 않고 힘든 일을 하는 그에게 뭔가 보답을 하고 싶었다.

하여 후학들을 물리치고 본인이 직접 탕약을 달이는 중이었다. 그런 판국에 느닷없이 흑의 복면인들이 나타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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