숯가마와 막국수

어린 날의 기억을 찾아가는 길

등록 2003.01.05 14:53수정 2003.01.05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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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 시절에 대한 기억

사랑방 부엌에서 저녁 쇠죽을 끓일 무렵이면 어김없이 눈이 내리곤 했다. 푸슬푸슬 시작한 눈은 이내 함박눈으로 바뀌고, 겨울로 들어서면서 내린 눈은 미처 녹을 새도 없이 또 내린 눈에 덮여 마을을 온통 흰색 나라로 만들어 버렸다.


마당가에는 장작더미가 차곡차곡 쌓인 채 눈을 머리에 이고 있었다. 그래도 땔나무가 모자란 동네 사람들은 발구를 끌고 산 속으로 나무를 하러 가곤 했다.

겨울이 깊어지면 눈은 더 내려 쌓여 이웃집으로 가는 길조차 막혀 버리곤 했다. 어른들이 나서 종가래로 길을 내기 시작했는데, 사람 하나 겨우 지나갈 만큼 새로 뚫린 눈길 가장자리에는 치운 눈이 쌓여 아이들 키 높이만큼 눈 담이 쳐지곤 했다. 이웃집 아이가 눈길을 다려올 때면 검은 머리통만 콩콩콩 흰 눈 벌판에 솟아올랐다가 사라지곤 했다.

하루 종일 눈 비탈을 싸돌아다니며 썰매타기에 지친 우리들은 쇠죽 끓이는 아궁이 앞에서 끄떡끄떡 졸기도 했는데, 그러다가 생머리를 태워 먹기도 일쑤였다.

아궁이에서는 바알갛게 장작불이 타들어 가고, 옥수수대와 콩깎지를 섞어 끓이는 여물 내음은 구수하게 번져 가는데, 코를 훌쩍이며 졸다가 화들짝 깨어난 아이의 볼은 터질 듯 붉게 물들어 있다. 그리고 그런 날 밤이면 어른들은 누군가의 집에 모여 메밀국수를 누른다. 가마솥에는 물이 설설 끓고, 커다란 나무틀로 만든 국수 내는 기계에는 장정 두엇이 달라붙어 눌러 대는데, 부엌에는 자욱하게 김이 서려 있다.
한 밤중의 별식인 메밀국수 한 그릇의 구수한 맛을 위해 우리 또래들은 그런 어른들 곁에서 군침을 삼키고, 졸린 눈을 비비며 차례를 기다렸다. 아, 한참만에 안겨지는 국수 그릇과, 그 메밀국수 위에 송송 썰어놓던 동치미 무와 김치 몇 조각의 그리움이여!

맛이란 결국 기억 때문에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나는 요즘도 메밀국수라는 소리만 들으면, 어린 시절 강원도 산골에서의 그 겨울밤을 떠올리곤 한다. 그러면 동시에 뻘겋게 타오르던 장작불과, 설설 김이 끓던 가마솥과 그 무덤덤하고 심심하기까지 한 국수 사발이 떠오른다. 내가 백석의 시 <국수>를 좋아하는 것도 그 옛날 맛의 기억 때문이다.


2.숯가마, 그 매혹적인 불빛 아래서

영동 고속도로 새말 나들목을 나서서 안흥 방향으로 한 오 분 남짓 달리다 보면 꾸불꾸불한 재가 하나 나온다. 전재라는 이름의 고개다. 그 재를 넘어야 내 고향 안흥으로 갈 수 있다. 예전에는 버스 한 대가 지나기에도 좁은 비포장 도로였지만, 지금은 제법 번듯한 포장 도로로 바뀌었다. 그래도 내 기억 속의 전재는 여전히 비포장의 굽이굽이 휘도는 산길일 뿐이다.


그 산길의 초입 왼편에 숯가마가 하나 자리잡고 있다. 경원참숯(033-342-0413). 큰 길 바로 곁이지만 숯가마로 휘어들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호젓한 오솔길이 나오고, 그 길의 중간에 숯가마가 허름한 지붕을 인 채 자리잡고 있다. 가마터 부근에는 온통 참나무 더미가 그득하다. 마침 내린 눈을 머리에 인 채 참나무들은 숯가마에 들어갈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저목장. 숯이 되기 위해 눈을 맞으며 기다리고 있는 참나무 더미
저목장. 숯이 되기 위해 눈을 맞으며 기다리고 있는 참나무 더미최성수
숯가마 찜질을 하러 온 몇 몇 사람들이 대금을 지불하고, 가운을 받아드느라 부산하다.

"가운 값도 받나보죠?"
돈 받는 아주머니에게 내가 농담처럼 말을 건네자 아주머니는 정색을 하며 대답한다.
"옷값이 아니고요, 하도 사람들이 옷을 집어가서요. 나중에 가져오면 오천 원은 돌려 드려요."
숯가마 찜질 요금 오천 원에, 가운 보증금이 오천 원이라는 말이다.
"가운을 가져가는 사람들이 많은가요?"
내 물음에 아주머니는 그제야 웃는 얼굴이 된다.
"한 절반은 없어진대요."
그 아주머니의 말은 전형적인 강원도 사투리다.

숯가마로 가니, 인부들이 모두 바쁜 손길이다. 숯을 고르는 사람, 곧 가마를 열기 위해서인지 불을 빼내는 사람, 연신 숯을 실어 나르는 사람들로 미처 말을 건넬 수도 없다.
"어어, 아가씨. 불 가까이 가면 옷 다 타버려요."
같이 간 제자들이 가마 아궁이의 불에 반해 다가가자 인부 한 분이 소리를 지른다. 그 아저씨의 옷이 불길에 온통 눌어붙어 있다. 그래도 아이들은 가마 아궁이의 불에 넋을 빼앗긴 채 좀처럼 자리를 뜰 줄 모른다.

숯가마 아궁이의 불빛. 그 빛이 매혹적이다.
숯가마 아궁이의 불빛. 그 빛이 매혹적이다.최성수
"저 불의 온도가 어느 정도나 돼요?"
한 아이가 궁금한 듯, 여전히 불에 눈길을 둔 채 묻는다.
"한 1500도에서 1800도는 돼요."
대답을 하면서도 아저씨는 연신 불을 꺼낸다. 길고 커다란 삽에 한없이 그윽하고 깊은 불들이 담겨 있다.

"삼 초 구이 맛도 그만이지요."
마침 곁에 있던 숯 공장 사장인 박영환(58)씨가 한 마디 거든다. 삼 초 구이란, 저 부삽에 돼지고기를 담아 숯 아궁이에 구워 먹는 것을 말한다. 정확히 삼 초 동안 넣었다 꺼낸다고 해서 삼 초 구이라고 한단다.

가마 곁의 찜질방은 의외로 낡고 단순하다. 그저 벽돌로 자그마하게 지은 방이 두 개다. 찜질방 문을 여니 몇 사람이 눕거나 앉아서 찜질을 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지쳤는지, 찜질방 입구에 깔아 놓은 자리 위에 길게 누워 숨을 고르고 있다. 찜질방이라기 보다는 어느 시골 흙벽집 같은 분위기다.

"원래 숯 찜질은 땀이 난 그대로 말려야 효과가 좋답니다. 그래서 우리 공장에는 샤워 시설도 없어요."

찜질방 내부. 투박하고 꾸밈 없는 것이 더 정겹다
찜질방 내부. 투박하고 꾸밈 없는 것이 더 정겹다최성수
사장 박영환씨의 말에 손님들도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요즘 들어 숯의 효능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마치 만병 통치의 기능을 가진 듯이 과신되기도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런 치료 기능이 아니라, 자연 속에서 숨쉬며 자연의 맛을 느껴 보는 것이 아닐까?

돌아 나오다 아까 본 숯가마 아궁이의 불 색깔이 잊히지 않아 다시 발걸음을 그곳으로 향한다. 여전히 아궁이에는 매혹적인 불길이 가득하다. 그 불의 빛은 인간의 존재를 빨아들이기라도 하려는 듯, 은근하면서 깊다. 어린 시절 쇠죽가마를 쑤던 사랑방 부엌 아궁이의 빛이 거기 그대로 남아 있다. 그 기억 때문에 숯가마로 향하는 걸음이 아름다운 것인지도 모른다.

사방을 돌아보니 온통 숯이 될 참나무들만 눈에 덮여 있다. 이제 저 나무들 머지 않아 건장한 인부들의 어깨에 들려 가마 속에 세워질 것이다. 그리고 제 몸을 태워 숯이 될 것이다. 생각해 보면 세상에는 제 몸을 태워 또 다른 무엇이 되는 존재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 생각만으로도 숯가마에서 돌아오는 길은 나직하고 잔잔하다.

3.막국수, 그 덤덤하고도 수수한 맛

숯가마에서 나온 걸음이 찾아가는 곳은 안흥이다. 오던 길을 따라 그대로 전재를 넘으면 그 정상에 "찐빵의 고장, 안흥에 오심을 환영합니다"라는 표지판이 서 있다. 이 전재의 정상 너머가 바로 안흥이다. 그리고 안흥은 내 고향이기도 하다. 한때는 번화한 오일장이 서기도 했던 곳, 그러나 이제는 도시화의 물결에 밀려나 그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시골 작은 마을로 변해 버린 곳, 그래서 더 아련하고 아름다운 곳이 바로 안흥이다.

그러나 내 발길은 먼저 안흥 찐빵을 찾아 나서지는 않는다. 안흥 면 소재지를 스쳐 지나는 도로의 끝에 자리잡은 막국수 집이 목적지다. <냉면 나오라 그래, 나 막국수(033-342-8337)>. 가게 이름부터가 재기 발랄한 이 막국수 집은 동갑내기 부부 최지노(43), 최미경(43) 두 사람이 함께 운영하는 내 동생네 친구 집이다.

<냉면 나오라 그래 나 막국수> 가게 이름이 재미이
<냉면 나오라 그래 나 막국수> 가게 이름이 재미이최성수
그는 바쁜 농사철이면 잠시 가게를 비우고 뼈 전골이나 곱창 전골을 오토바이에 싣고 농사짓는 친구를 찾아 상안리 골짜기까지 소주를 마시러 달려오기도 한다.

꽁지머리에 뽀오얀 얼굴이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살 것 같지 않아 보이지만, 그는 이곳 생활이 무엇보다도 마음에 든단다.
"요즘 같은 겨울철이면 농사짓는 사람들 걱정이에요. 일거리도 없고, 그렇다고 농사지어 남는 것도 별로 없고…. 전에는 그래도 우리 가게에 와서 술도 마시고 놀다 가기도 했는데, 요즘은 횡성이나 원주로 겨울 일거리 찾아가는 사람들이 많아 마을이 빈 것 같거든요."

그런 말을 하는 그의 표정에 안타까움이 배어 있다. 사실 그는 안흥 사람은 아니다. 인천 어디서 도회물 먹어가며 이런 저런 일로 젊은 나날을 보냈다고 한다. 슬쩍 비치는 말로는 디스크 자키도 했다고 하니, 이런 농촌의 삶과는 동떨어진 나날을 살았던 게 분명하다. 그런 그가 어느 해 짐 싸들고 들어와 터 잡기 시작한 안흥에서의 삶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을 게다.

횡성은 산도 가로 가고, 강도 가로 가고, 사람도 가로 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배타적인 성격이 강한 지역이다. 일제 시대에도 개성과 더불어 일본 사람들의 상권이 견뎌내지 못했던 지역 중의 하나였다. 그 중 안흥은 특히 박정희 정권 때부터 선거마다 여당이 번번이 패할 정도로 반골의 성향을 지닌 곳이니, 외지인인 그가 뿌리를 내리는 것이 호락호락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이젠 친구도 생기고, 이곳 사람으로 대접 받으며 살 만 합니다."
그런 말을 하는 그의 표정이 더 없이 맑고 순하다. 그러나 막국수 얘기가 시작되면 그의 자부심은 바로 안흥 사람 그대로다.

"우리 집은 봉평 1등품 메밀만 갖다 써요. 막국수의 생명은 면과 육수거든요. 육수도 꼭 양지 살만으로 우려내지요. 인공 감미료는 절대 사절입니다."
그런 말을 하는 그의 표정은 더없이 단호하다. 8-9종의 야채를 넣고, 비법 중의 하나라는 사과를 함께 넣어 우려낸 육수는 시원하면서도 담백하고 상큼하다.

나는 고향에 내려갈 때면 이 집을 자주 찾는다. 올 해 일곱살이 된 늦둥이 녀석도 이제는 이 집 막국수에 입맛이 길들여졌는지, 막국수 먹자고 하면 먼저 소리를 지르곤 한다.

"나 막국수 집에 가자!"
손님이 주문을 하면 그 자리에서 바로 반죽하여 직접 뽑아주기 때문에 더 맛있는 집, 우리 늦둥이 같은 아이들이 오면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아이들 것은 덤으로 한 그릇 내올 줄 아는 여유가 있는 집이 바로 <나 막국수>집이다. 다만 아쉬운 점은 겨울에는 막국수를 만들지 않는다는 것이었는데, 그 이유가 맛 때문이었단다.

막국수집 주인 부부. 꽁지 머리 남편과 다소곳한 아내의 모습이 닮아 있다
막국수집 주인 부부. 꽁지 머리 남편과 다소곳한 아내의 모습이 닮아 있다최성수
"봄부터 가을까지는 육수를 만들어 놓으면 늘 일정 량이 소비가 되거든요. 그런데 겨울에는 워낙 수요가 들쭉날쭉이라 만들어 놓았다가 버리는 육수가 더 많았어요. 그 날 육수는 그 날 쓰고 남으면 버려야지, 또 쓰면 제 맛이 안 나거든요."

전날 밤부터 대 여섯 시간 끓여 우려낸 육수를, 맛이 변하지도 않았는데도 하루가 지나면 꼭 버려야 한다고 고집하는 만큼 그의 맛에 대한 자부는 대단하다. 다른 어떤 칭찬보다도 손님의 막국수에 대한 칭찬이 가장 좋다며, 아침에 일어나면 반드시 양치하기 전에 육수 맛부터 보아야 직성이 풀린다는 그가 다시 겨울 막국수를 시작했단다.

"스키장에 갔다가 들른 손님들이 하도 성화를 해서…"라며 그가 환하게 웃는다. 곁에서 그의 부인도 고개를 끄덕이며 거든다. 그런 부부는 유난히 닮아 있다. 마치 그가 말아 내온 막국수의 무덤덤하고 속 깊은 맛처럼. 그 맛은 바로 강원도 사람들의 마음을 닮아 있다.

이제 봄이 오면 그는 또 오토바이에 식당 음식들을 싣고, 내가 주말마다 들리는 보리소골 골짜기로 찾아올 것이다. 그러면 골짜기에서 봄 농사로 바쁜 동생과 그의 친구들과 나는 소주잔을 기울이며 품삯도 못 건지는 농사와 자식들 교육과 그의 막국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 그리고 나는 또 어린 날, 가마솥에 끓이던 메밀 막국수와, 아궁이에 피어오르던 장작불의 황홀한 기억을 떠올리며, 그가 가져온 막국수의 면발에 허겁지겁 달려들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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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장다리꽃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랑은>, <천년 전 같은 하루>, <꽃,꽃잎>, <물골, 그 집>, <람풍>등의 시집과 <비에 젖은 종이 비행기>, <꽃비> , <무지개 너머 1,230마일> 등의 소설, 여행기 <구름의 성, 운남>, <일생에 한 번은 몽골을 만나라> 등의 책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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