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 이크발 마시흐를 기억하라

프란체스코 다다모의 <난 두렵지 않아요>

등록 2003.01.16 21:19수정 2003.01.17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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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 두 살의 노동자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고 외치며 자기 몸을 불살랐다. 그가 떠난 지 30여 년이 지난 지금, 전태일은 어느덧 한국노동운동의 상징적 인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이건 무명의 노동자에 불과했던 전태일 혼자만의 힘으로 된 것이 결코 아니다. 그의 불꽃같은 "삶과 죽음"을 전기로 남겨 많은 이들의 기억에 아로새겨준 인권변호사 조영래 선생의 역할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조 변호사가 서슬 퍼런 유신시절의 수배를 받으면서 써 내려간 <전태일 평전>이 없었다면, 과연 어찌 되었을지 생각만 해도 아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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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병진

여기서 재현을 위한 기억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하루만도 숱하게 쏟아지는 뉴스거리들에 함몰된 채 잊지 말아야할 사건들을 얼마나 쉽게 망각해 버리곤 하는가. 미군 장갑차에 깔린 두 여중생의 참변이 붉은 악마의 소란에 묻혀질 뻔했듯, 광화문의 촛불시위 또한 그럴 운명에 처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렇다면 언제까지 정보의 홍수만을 탓하고 있을 것인가.

이 책은 미성년 노동착취에 대해 경종을 울린 용감한 소년 이크발 마시흐의 생애를 다룬 실화소설이다. 작가는 이크발이 숨진 지 얼마 안되어 그에 대한 기억이 벌써 사람들 가운데서 희미해지는 것을 안타까워하여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크발에 대해 알려진 단편적인 사실들을 기초로, 그가 소년 노동운동가로 활약하다가 숨지게된 과정을 작가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감동적으로 그려낸 것이다.

이크발은 불과 네 살 때 카펫 공장에 끌려가 노동자로 일해야 했다. 파키스탄의 많은 아이들이 그렇듯이 집안의 빚을 갚기 위해 지옥 같은 공장생활을 강요받았던 것이다. 공장에서 아이들은 공부대신 해뜨기 삼십분 전부터 늦은 밤까지 10시간이 넘게 카펫 방직기 앞에 쭈그리고 앉아서 일했다. 그렇게 노예처럼 일하고도 고작 1루피(25원)의 돈을 받는다. 그러니 빚을 갚을 길은 처음부터 없었다. 혹시나 이에 반항하거나 문제를 일으키면 어김없이 "무덤"이라 불리는 공장의 후미진 맨홀 구덩이에 갇히는 벌을 받는다.

이런 끔찍한 상황에서 이크발 말고는 어떤 아이도 미래를 위한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아니, 도저히 세울 수 없었다. 연약한 힘으로는 어찌 할 수 없다고 모두들 체념한 것이다. 하지만, 이크발은 여느 아이들과는 달랐다. 그는 탈출만이 유일한 길임을 일찍부터 깨닫고 있었다. 그래서 동료 아이들에게 나가서 연을 날리자며 미래에 대한 희망을 심어주려고 애쓴다. 그러다가 첫 번째 탈출을 시도했으나, 그만 뇌물을 좋아하는 경찰에 붙들려 주인의 손에 다시 넘겨지고 말았다.

그러나 이크발은 여기에 굴하지 않고 용감하게 두 번째 탈출을 감행했다. 그 때는 바라던 대로 미성년 노동자 해방전선의 에샤 칸이라는 사람을 만난다. 이때부터 이크발은 에샤 칸과 더불어 7백만이나 되는 파키스탄 미성년 노동자들의 착취 현실을 고발하고, 그들을 해방하는 일에 뛰어들어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그의 활동이 차츰 세계에 알려지면서 미국에서 "행동하는 젊은이" 상을 탔으나, 1995년 아쉽게도 열 세 살의 나이에 카펫 마피아로 불리는 공장주들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ILO 보고에 의하면 전세계적으로 15세 미만의 어린이 노동자는 대략 2억 5천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그 중에 아시아의 어린이 노동자들이 61퍼센트로 가장 많은 편이다. 가까운 나라들에서 현재 벌어지고 있는 미성년자에 대한 노동 착취는 우리의 70년대 상황보다 더욱 심한 것 같다. 카펫 공장뿐만 아니라, 살충제가 잔뜩 뿌려진 커피 밭에서 열매를 따야 하는 아이들, 심지어 석탄 가루를 마시며 지하 깊은 곳에서 석탄을 캐는 아이들도 많이 있다고 한다. 하긴, 우리나라에 들어와 일하고 있는 많은 이주 노동자들의 자녀들 또한 이들의 처지와 크게 다르지 않는 방치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전태일 사건은 한 개인의 과거 어려웠던 시절 영웅적인 기록에 그치지 않고, 오늘의 민중사건으로 끊임없이 재현되고 있다. 이와 같이 소년 노동운동가 이크발의 이야기도 가난한 이웃나라 소년의 별난 영웅담 정도로 비쳐지지 않았으면 한다. 책 마지막 부분에서도 또 다른 이크발들이 속속 부활하고 있음을 묘사하고 있다. 쇠사슬에 묶여 일하다 탈출하여 그 묶였던 자국이 아직 선명한 어떤 소년은 "난 두렵지 않아요"라고 말했다. 주인공 파티마는 그 소년이야말로 죽은 이크발이 되살아난 것임 깨닫는다. 이처럼, 미성년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가 사라지는 날까지 소년 이크발은 끊임없이 부활하고 기억되어야 한다.

난 두렵지 않아요 - 아름다운 소년, 이크발 이야기

프란체스코 다다모 지음, 노희성 그림, 이현경 옮김,
주니어RHK(주니어랜덤),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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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솔샘교회(solsam.zio.to) 목사입니다. '정의와 평화가 입맞추는 세상' 함께 꿈꾸며 이루어 가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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