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완성 여로에서 들꽃처럼 빛나는 시

송태웅 시인의 첫 시집 <바람이 그린 벽화>

등록 2003.01.19 15:44수정 2003.01.20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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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태웅 시인의 첫 시집 <바람이 그린 벽화>
송태웅 시인의 첫 시집 <바람이 그린 벽화>안준철
세상에 한 권의 시집이 더해졌다. 세상에 한 사람의 시인이 더해진 것은 그보다 몇 개월 전의 일이다. 시인의 탄생이 등단 절차가 아닌 해산의 고통을 지불하고 얻은 자기 눈빛을 가진 시편들로 말미암는다면 십 수년 전의 일일 수도 있다.

시인의 나이 43세. 첫 시집을 상재하기에는 적당한 나이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해진 행로를 피'하고 마음의 첫 자리인 '원점으로 돌아'가기를 희구하는 시인이라면 딱 좋은 나이일 수도 있다.


사람을 안다고 말하는 것이 두려운 일이기도 하다. 고통을 함께 나누지 않고서는 그를 안다고 말할 수 없을진대 정작 힘든 시간들은 홀로 견디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홀로됨의 시간이 바로 시가 써지는 시간대라면 어쩌면 함께 살아온 십 수년의 세월보다도 시인이 토해놓은 한 편의 시를 통해서 그의 진면목을 알게 되기도 하리라. 잿빛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그의 안경 낀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그의 눈빛을 닮은 시를 만나고 싶어졌다.

터미널 대합실 벤치에 앉아 있는 나를 두고
금호고속 버스는 몇 대나 그냥 지나가버렸을까
서툴렀던 모든 과거가 정당화되던 통음의 밤에
벗들은 엄중한 표정이 되어 하나둘 사라지고
시대마저 등뒤를 보여주면서 하나씩
술집의 셔터를 붙들고 사라졌었지

가로수를 통과하는 바람에도 나는 옷 벗고
분해되고 싶었는데 세상은
너무도 낯익어
아슬한 벼랑마저 제 집처럼 낯익어서
아파하는 것마저
흰 강아지 끌어안는 계집처럼이나
사치스럽게 되고 말지

버스는 몇 대나 내 울렁임을 두고
그냥 가버렸나
여기 오기 전의 세상에서도
갈 곳 잃은 짐승처럼 서성이는
나를 본 것도 같은데

돌아갈 곳이 너무 가까워
무릎 사이에 고개 처박고 있나
자정의 금호고속버스는
오도가도 못한 채

-'불귀(不歸)' 전문

남들은 시를 버릴 만한 나이에 첫 시집을 낸 송태웅 시인의 시집 발간을 축하하는 자리에는 민족문학작가회의 순천지부 문우들과 길문학회 회원들 말고도 일견 시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굵직한 톤의 남성들이 대거 눈에 띄었다.


1987년 6월 항쟁이 있던 바로 그해에 조직된 전교조의 전신인 전교협 출신 교사들이다. 당시 송태웅 시인은 순천지회 문화부장을 맡아 일을 하고 있었다. 필자가 그를 알게 된 것도 그 무렵의 일이다.

'모든 문화는 불손하다'라는 말이 있다. 문화는 자유 속에서 싹트기 마련이고, 자유는 수구 중심의 지배구조를 거스르기 때문에 생긴 말이리라. 송태웅 시인이 후기에 써놓은 대로 '교사가 되어서도 데모하는데 더 신경을 쓰는 문제 교사'가 된 것도 다름 아닌 그의 자유주의 정신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지사적인 풍모를 지닌 사람과는 거리가 멀지만 '진실이 아닌 것'과의 싸움을 끈질기게 해온 사람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 싸움의 자장이 자기 안의 '허구'로 옮아가면서 그는 스스로 시인이라는 직함을 허용하지 않았을까.

열병으로 한 달간을 시달리고 나니
지독한 두통과 어깨결림과 함께
이번엔 목 디스크가 왔다
하루 서른 개 정도의 침을 맞는데
이게 따끔하게 어깻죽지를 찌를 때마다
하나, 둘 세면서 생각한다
적어도 일만 개의 침이
내 몸의 경혈을 찌르면 병이 나으리라
아마도 일만 개 정도의 통점으로 이루어졌을
나의 생이
일만 개의 침으로
다시 일어나리니
당분간 이 죽비 같은 병은
나의 불편한 생을 어루만지며
나와 함께 가게 되리라

-'동행' 전문

그는 지금 광주에서 학원강사 생활을 하고 있다. 한때는 학교에서 아이들의 영혼을 걱정하며 입시교육을 격렬히 성토했던 이력이 있는 그로서는 어울리지 않는 배역을 맡고 얼마나 어색해하고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보냈을까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는 대학시절에 연극반에 들어가 열심히 활동한 적도 있다. 맞지 않는 배역도 충실히 해야한다는 것을 그때 배웠음직도 하지만 그는 천성적으로 아닌 것은 아닌 사람이다.

그는 자신을 일컬어 '정체불명의 인간'이라고 말한다. 그 '정체불명이 나로 하여금 시로 끌고 갔다'고 회고하기도 한다. 그의 말이 아니더라도 시인은 광대한 우주에 독자적인 한 좌표로 존재하는 '나'를 만나고 싶어하는 유혹에 이끌려 시를 쓰는 것인지도 모른다. 시인이라면 이러한 자기 정체성에 대한 목마름과 함께 시의 언어적 미학에 어쩔 수 없이 이끌리게 되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를 시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가 어느덧 언어의 조련사가 되었거나, 혹은 그 길에 들어선 것을 의미하기도 하리라. 또한, '저 바위 뒤'의 생의 이면을 엿보는 혜안을 갖게 된 것을 인정받게 된 것이기도 하리라. 그가 세상에 더해진 한 권의 시집의 주인공이 되었다는 사실보다는 '허상을 향해서만 엎디어졌던 나의 꽃들을 뒷전에 둔 채' 이미 '바다가 되어' 버린 '강물'처럼 맑고 큰 눈빛을 얻어가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 뜻에서 그의 직관적인 사유와 언어적 감각이 돋보이는 시를 한 편 읽어보자.

내 오래된 슬픔은 채 발효되지 못하고
쇼핑백에 포장되어 처박혀 있었지
내 지상의 산악이 되려다 말고
판잣집 한 채가 되어 나즈막히 엎드려 있을 때
내 전생은 그대의 비 새는 지붕이었으리
젊음의 짧은 한 때마저 염소들에게 주어버리고
왼쪽 어깨를 드러낸 라마승이었으리
하여 나 그대에게 가는 돌길을
삼보일배(三步一拜)하며 나아가더라도
내 정처없는 길의 한없는 끝은
그대가 내민 넓은 손에 붙들려
잠시 쉴 수 있으리
영금없이 길가에 나선 족제비 한 마리가 되어
그대의 등걸에 기대어 서면
고물라디오에서 누군가 웅얼거리는
경 읽은 소리 사리처럼 후드득 떨어지리

-'오동꽃' 전문

순천 중앙서점 3층 문화공간에서 가진 공식적인 출판기념회가 끝나고 식당으로 자리를 옮겨 저녁을 함께 나눈 뒤에 마지막 코스로 들린 술집에서 송 시인은 허리가 거의 절반으로 포개진 채 줄곧 졸거나 잠을 자고 있었다. 소년처럼 맑아 보이는 그의 인상 때문이었을까? 소파에 기대어 몸을 포갠 채 잠을 자고 있는 그의 모습이 <쌩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의 해맑은 모습과 겹쳐지더니 일순 그의 머리 위로 '징검다리 건너뛰듯 포로롱 별 하나' 떠오르는 듯한 묘한 착각 속에 빠져들었다. 문득 그가 별이라는 아름다운 이름과 잘 어울리는 시인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마른 수풀 새를 헤집으며 별 하나 뜨네

초저녁에 곯아떨어진 동네꼬마들

꿈결에 산등성이 기어올라 횃불 밝혔나

징검다리 건너뛰듯 포로롱 별 하나 뜨네

새벽녘 집 나온 사람의 굽은 등 위에

약대추처럼 쪼그라진 에미의 이마 위에

오늘은 넝마 같은 이름들 아로새기며

골목 빠져나온 별자리를 움집을 짓고 있네

-'별' 전문

그의 첫 시집 <바람이 그린 벽화(삶이 보이는 창)>에 수록된 총 63편에 달하는 시편들을 시집을 통해 직접 만나보기를 권한다. 정체불명의 인간인 그가 찾아 나선 길이 아직도 오리무중인 듯하지만, 그런 미완성의 여로에서 들꽃처럼 빛나는 그의 시편들을 만나는 즐거움이 더 각별하다. 송태웅 시인의 건필을 빈다.

바람이 그린 벽화

송태웅 지음,
삶창(삶이보이는창),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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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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