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서 살아올 땐 상상도 못했던 일

대전보훈병원에서 고엽제 후유 '의증' 검진을 받고

등록 2003.02.06 07:05수정 2003.02.07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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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일 대전보훈병원엘 다녀왔다. 3일 오후 대전 둔산동의 막내동생 집에 가서 하룻밤을 잔 뒤 보훈병원이 있는 신탄진 지리를 잘 아는 동생의 안내로 손쉽게 갈 수 있었다. 아침 9시에 들어가서 오후 3시에 나왔으니 꽤 오래 머물렀던 셈이다.


내가 보훈병원이란 델 가게 된 것에는 상반되고 이율배반적인 두 가지 사항이 결부될 수밖에 없다. 하나는 '불행'이라는 것, 다른 하나는 '다행'이라는 것. 월남전 참전이라는 '과거력'을 가지고 있는 나는 이른바 고엽제 후유 의증(疑症) 검진을 받기 위해 홍성보훈지청에 이어 대전보훈병원을 찾은 것이다.

몸의 이상을 감지하고 관리를 하기 시작한 1999년 이후부터는 내가 마침내 보훈병원을 찾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더러 막연하게나마 해왔지만, 저 30여년 전 월남에서 살아 돌아올 때는 상상도 하지 않았던 일이었다. 정말이지 인생 50고개 이전에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던 일이 오늘 현실로 벌어지고 만 셈이었다.

보훈병원에 몸을 넣는 순간 나는 다시 한숨을 쉬지 않을 수 없었다. 동생을 돌려보내고, 원무과의 고엽제 담당 직원에게 서류를 제출하고 나서 잠시 의자에 앉아 호명을 기다리자니 마음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되었는지 속으로 한탄을 하는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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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뇨에다가 혈압까지 관리하기 시작한 1999년 7월 고장 파월전우회(후에 월남참전군인회) 동료들의 권유로 고엽제 후유 의증 검진을 받을 뜻을 세웠었다. 천안 순천향병원에 입원하여 종합검진을 받고 당뇨와 고혈압 진단서를 받아 홍성보훈지청에 제출했다. 보훈병원의 확진과 판정을 받기 위한 신청서였다.

그런데 보훈청에서도 보훈병원에서도 아무 연락이 오지 않았다. 나는 이상하다 싶고 왜 아무 연락이 없는지 궁금한 마음이 없지 않았으나, 보훈청에 전화를 해보는 일조차 하지 않았다. 실속이 없는 글쟁이 노릇이나마 노상 바쁘게 자판을 두드리며 이런저런 일에 치여 정신없이 살다보니 3년 세월이 금세 지나가 버렸다.


그 사이 나는 혈당 관리와 혈압 관리에 더욱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이제는 콩팥의 수치까지 걱정하고 조심해야 하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 좋아하던 술과도 거의 결별을 하고 또 하나의 지병인 통풍의 금기·제한 식품들까지 거듭 숙지하면서 노상 음식을 가리고 삼가는 일은 정말 너무 고통스럽고 한심하다. 하지만 이제는 그 고통과 쓸쓸함을 조금은 슬프게 즐길 줄도 알게 되었다.


1999년 7월 홍성보훈지청에 고엽제 후유 의증 검진 신청을 한 사실을 완전히 잊지 않고 살면서도, 아무 연락이 없는 사실에 적극적으로 문의를 해보지 않은 것에는 대략 두어 가지 이유가 있을 법하다.

하나는 내 몸의 질병들이 과연 월남의 고엽제와 관련이 있는 것인지 나 스스로 확신이 서지 않는 까닭이었다. 당뇨와 고혈압이 고엽제 의증 관련 항목에 속하는 것이긴 하지만, 그것은 군대 시절 월남에서의 고엽제보다는 제대 후 건강을 생각하지 않고 함부로 과음을 하며 산 내 방종한 생활 탓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는 탓이었다.

@ADTOP8@
만약 고엽제와 아무 관련이 없는데도 내가 만일 의증 판정을 받아 국가로부터 보상을 받게 된다면 그것은 너무 뻔뻔스러운 일이 아닐까? 내 양심과 관계되는 일이 아닐까? 어렴풋하게나마 그런 모호한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또 하나는 내 건강 문제가 그런 식으로까지 확인되고 확대되는 상황에 대한 야릇한 반감 같은 것도 내 마음 속에서 작용한 탓이었던 것 같다. 내 몸의 질병들이 완전 치유는 불가능하고 평생 관리를 하며 살아야 할 병들임을 잘 알면서도, 내 몸의 질병들이 국가의 인정까지 받게 되는 상황이 왠지 좀더 두렵게 느껴지는 탓이었다.

아무튼 어머니의 핀잔과 타박을 감수하면서도 3년 여 동안 보훈청에 문의 전화도 한 번 하지 않으며 태만하게 살았던 내가 최근에 다시 서두르는 모양새로 보훈청에 고엽제 후유 의증 검진 신청을 한 것은, 딸아이의 외지 고등학교 진학으로부터 촉발된 일이었다.

나는 넉넉하지 못한 경제 사정과 오십대 중반에 접어든 세월이며 건강 문제 등을 생각해서 딸아이를 고장의 내 모교로 진학시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외지로 진학을 하고 싶어하는 딸아이의 의지를 꺾을 수가 없었다. 중학 시절 3년 동안 학원에는 한 번도 가지 않고서도, 그리고 신앙 생활에 최선을 다하면서도 공부를 썩 잘해 준 녀석이었다. 착하고 기특한 녀석의 소망을 들어주기로 결정을 했다.

앞으로 감내해야 할 비용 부담과 종종 먼길을 왕래해야 할 일을 은근히 걱정하면서 또 한번 딸아이와 함께 천안의 복자여고를 다녀오던 중이었다. 서해안고속도로 서산휴게소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나오던 중 파월 전우이기도 한 김용순 태안천주교회 사목회장을 만났다.

그는 고엽제 후유 의증 검진 신청을 하기 위해 서울의 한 병원에서 진단서를 받아 가지고 오는 중이라고 했다. 내 건강 문제를 잘 알고 있는 그는 내 쪽 '상황'을 물었다. 내가 1999년 7월에 보훈청에 신청을 한 후 이제까지 아무 연락이 없어서 그냥 가만히 있었다고 실토를 하니 그는 몹시 어이없어하며 내게 적이 핀잔을 했다.

그는 나를 고무하고 위안하는 말도 많이 해주었다. 고엽제 후유 의증(疑症)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내 몸의 질병이 월남의 고엽제와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럴 가능성도 있다는 그 의심의 영역을 국가가 인정해주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 그것을 하등 개인의 양심 문제로 가져갈 필요가 없다고 했다.

"우리는 미국 정부로부터 받은 전투수당의 3분의 2를 나라에 바쳤어. 우리 목숨 값의 3분의 2를 나라에 바쳐서, 우리나라는 그 돈으로 경제 발전의 기틀을 닦은 거여. 우리가 오늘 고엽제 후유증이나 의증으로 보상을 받는 것은, 과거 월남에서 나라에 바쳤던 그 목숨 값을 오늘 되돌려 받는 것이기두 허여. 우리 나라가 이만큼 부강헤졌으니께 그건 당연헌 일이기두 허구. 조금도 양심 불편헤헐 일이 아니라구."

나는 김용순씨의 말을 되새기며 다음날 홍성보훈지청에 전화를 걸고 다시 고엽제 후유 의증 검진을 신청하는 일을 서둘렀다. 그리고 2002년을 이틀 남겨놓은 날 홍성에 가서 서류를 제출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알게 된 것인데, 홍성보훈지청의 고엽제 후유 의증 검진 신청 접수 대장에는 1999년 7월의 내 신청서 접수 기록이 있었다. 접수 기록만 있고 후속 기록이 없는 것에 대해서 담당 직원도 의문을 갖기는 나와 마찬가지였다.

정말 영문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보훈청에서 잘못한 것인지, 보훈병원에서 실수를 한 것인지, 아니면 우체국에서 과실을 한 것인지….

홍성보훈지청 직원들은 참 친절했다. 1999년의 분위기와는 좀 다른 것 같았다. 적극적으로 확실하게 업무 처리를 한다는 느낌을 주어 고마운 마음도 컸다.

친절하기는 대전보훈병원도 마찬가지였다. 과거 월남에서 목숨을 걸고 정글을 긴 사람들, 이제는 5,60대 초로의 세월 속에서 질병에 시달리며 사는 사람들을 따뜻이 위안해주는 듯한 분위기가 병원 안에 잘 감돌고 있었다. 병원의 건물은 오래 되었지만, 전반적으로 깨끗하고 시설도 잘 되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당뇨와 관련하는 과목들을 돌며 검진을 받았다. 맨 먼저 일반외과에 갔다가 안과로 가서 눈 검사를 받고, 임상병리과에 가서 피를 뽑고 방사선과에 가서 X레이를 찍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과로 가니 12시에 점심 식사를 하고 다시 오라고 했다.

내과에서는 혈압을 두 번 체크했다. 일반 병원의 진단서를 살펴보면서 몇 가지를 묻더니, 2시 30분에 임상병리과에 다시 가서 피를 한번 더 뽑으라고 했다.

내 혈당과 혈압은 상당히 높은 상태였다. 정확한 진단을 위해 3일 동안 약을 먹지 않은 탓인지 식후 2시간 혈당 수치가 무려 394를 기록했고, 혈압은 180과 110으로 체크되었다. 한숨을 쉬지 않을 수 없었다.

15년도 넘게 당뇨를 앓아오면서 몇 년 전에 이미 고엽제 후유 의증 '경도(輕度)' 판정을 받고 이제는 눈과 협심증 치료까지 받는다는 친구를 만났다. 서산에서 사는 오래 전부터 구면인 친구였다. 그는 병세가 확대되어 최근에 국가유공자 7급 판정을 받았다고 했다. 한 달에 한 번씩 검진을 받고 다섯 가지 약을 타기 위해 보훈병원엘 온다는데, 진료비와 약값은 모두 무료라고 했다.

그 친구는 내 몸의 질병(당뇨와 고혈압)이 확실하기 때문에 거의 '경도' 판정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경도 판정을 받으면 매월 20여 만원의 보상금을 받게 되고, 자녀들의 고등학교와 대학교의 등록금 전액을 보훈처에서 받게 된다고 했다. 그래서 자신은 이미 세 자녀를 모두 대학까지 비교적 무난히 가르칠 수 있었다며 안도하는 듯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러며 그 친구가 하는 말.

"일단 경도 판정을 받더라두 병세의 진행에 따라서 재검진을 받아 가지구 등급을 올릴 수가 있어. 그럼 보상금두 올라가지. 그렇지먼 그거 욕심 내지 말게. 몸의 병세를 그냥 경도 수준으루다 꽉 묶어놓구 그저 관리를 잘헤야 혀. 합병증이 생기지 않게 허는 게 제일 수여. 난 눈에두 고장이 붙었구, 협심증이다가 요샌 또 안면근육 마비가 와서 죽을 지경이여. 요새는 내 인생이 너무 슬프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우울한 소리로 대꾸했다.
"그려. 고엽제 후유 의증 판정을 받아서 보상금을 받는 것보다, 몸이 건강헤 갖구 이런 병원에는 아예 올 생각두 안 허구 산다면 얼마나 좋겠나. 그 시절이 그저 그리울 뿐이지, 뭐."

원무과 앞의 의자에 앉아서 다시 병원 안을 둘러보자니, 고엽제 후유 의증 검진을 받기 위해 여러 장 포개어진 진료 서류들을 들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과거 파월 장병들의 모습이 측은하고 안쓰럽게 보였다.

월남의 전쟁터에서 용감하게 정글을 기던 사람들이 30여 년이 지난 오늘 늙고 병든 몸으로 보훈병원에 와서 보상을 위한 검진을 받느라고 저렇게…. 허연 머리와 주름진 얼굴의 저 중년들, 또는 초로의 사나이들에게도 월남의 정글을 누비던 젊은 시절이 있었지…. 그 시절이 어제 같건만….

몸의 건강 문제가 더욱 심각해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은 나나 그 친구나 똑같았다. 나는 그 친구를 동정하고 위로하면서도, 나도 미구에 그 친구의 병세를 따라가게 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어서 좀더 우울해지는 기분이었다. 어느덧 인생의 그림자가 길어지는 세월, 이제는 모든 일을 접고 오로지 소설 창작에만 전념하며 살고 싶은데, 그러려면 눈이라도 건강해야 할 텐데….

그 친구를 먼저 보내고 나는 오후 3시경 대전보훈병원을 나서면서 심호흡을 했다. 보훈병원의 '보훈(報勳)'이라는 말이 문득 내 가슴에 정다운 느낌을 실팍하게 안겨 주는 것 같았다. 내 비록 몸에 병이 들어 슬프고도 어렵게 극기와 제약의 삶을 살기는 할 망정, 과거 군대 시절 세 번이나 지원을 거듭하여 월남에 간 덕으로, 그리고 우리나라가 이만큼이라도 발전을 한 덕으로 내가 오늘 대전보훈병원에 와서 고엽제 후유 의증 검진을 받을 수 있었음이 정말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내가 대전보훈병원을 찾은 것은 그러므로 불행과 다행―모순적이고 대립적인 두 가지 상황이 내 삶 안에서 그런 대로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일이기도 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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