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겨울도 이렇게 지나갑니다

슬금슬금 불어오는 바람조차 봄기운이 묻어오네요

등록 2003.02.09 22:08수정 2003.02.10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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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박눈이 쌓인 집 뒤의 소나무
함박눈이 쌓인 집 뒤의 소나무최성수
주말 아침, 날이 훤하게 밝을 시간인데도 창 밖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습니다. 밤새 집 안에 가두어 두었던 공기를 몰아내듯 현관문을 열자 잿빛 하늘이 눈앞으로 다가왔습니다.


한 번 내린 눈이 웬만하면 녹지 않고 겨울을 나는 곳이 여기 강원도 산골짝입니다. 요즘은 지구 온난화로 그래도 기온이 많이 올라가는 편이지만, 제가 어릴 때는 정말 삼월 하순이 되어서야 눈이 다 녹고 봄이 왔습니다.

이번 겨울은 유난히도 자주 눈이 내렸습니다. 응달쪽으로는 작년에 내린 눈이 아직 남아 있는데, 또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질 것 같았습니다.

날씨는 제법 푹 해서 점퍼를 입지 않았는데도 그리 추위가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날씨 속임은 못한다고, 입춘이 지나고 나니 매운 바람도 제법 풀린 듯 합니다.

잠시 들어와 책을 보다 창 밖으로 눈길을 주니 펑펑 눈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서울에 두고 온 큰아들 녀석이 전화를 해 비가 온다는 소식을 전해왔습니다. 그런데 이곳 강원도 골짜기에는 함박눈입니다.

낙엽송 숲으로 내리는 눈발
낙엽송 숲으로 내리는 눈발최성수
점퍼를 챙겨 입고 장갑을 끼자 늦둥이 진형이 녀석이 그림을 그리다가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질렀습니다.


"아빠, 어디 가요?"
"응, 마당에 눈 치우러."

그러자 녀석도 제 옷을 찾아 입으며 나섰습니다.


"우리 눈사람 만들자. 지난번에도 눈사람 만들었잖아. 이번에는 아주 아주 큰 눈사람 만들자, 아빠."
"그럴까?"

나는 빙그레 웃으며 녀석을 바라보았습니다. 주말마다 녀석을 데리고 보리소골 이 골짜기를 찾은 것이 벌써 한 해 반이 지났습니다. 방학이라 제법 긴 시간 동안 이곳에 내려와 있었는데도, 녀석은 서울에 가면 얼른 도로 보리소골로 가자고 재촉을 하곤 했습니다.

아내는 그런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피는 못 속인다니까요. 얘도 아빠 닮아 강원도 촌사람 피가 분명해요."

마당에 나선 나와 늦둥이 녀석은 한 나절 내내 눈을 굴리며 눈사람을 만들고, 눈밭에 뒹굴며 놀았습니다. 마당 가에 커다란 눈사람도 두 개 만들어 세워 놓았습니다.

늦둥이와 만든 눈사람
늦둥이와 만든 눈사람최성수
봄이 멀지는 않았나 봅니다. 한 겨울 같으면 금방 손이 시려웠을텐데, 늦둥이 녀석은 그런 기색도 없이 신이 나서 눈을 뭉치고 굴리며 놀았습니다. 눈도 제법 찰 진 것이, 눈 송이 속에 봄이 담겨 있는 것 같았습니다.

한동안 그렇게 놀다 보니 어느 새 눈은 비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어? 비가 오네."

겨울의 마지막 풍경
겨울의 마지막 풍경최성수
늦둥이 녀석은 눈이 비로 바뀌자 섭섭한 표정이었습니다.

"비가 오면 이제 눈사람 못 만들잖아?"

녀석은 그만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나는 처마 밑에 의자를 가져다 놓고, 눈 위에 비가 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정말 겨울이 이제 끝나는 것 같았습니다. 머지 않아 저 흰 눈 밭 위에 제일 먼저 잡초들이 돋아날 것입니다.

집 뒤 언덕에서 제일 먼저 괴불주머니가 꽃을 피우고, 마당 귀퉁이에는 작년의 그 별꽃들이 돋아날 것입니다. 그러면 겨우내 눈 이불을 덮고 잠들었던 저 땅위에 또 감자꽃이 피어나고, 고추가 파랗게 자라나고, 인적조차 드물던 이 골짜기에도 농사일로 떠들썩할 것입니다.

나는 그런 봄을 생각하며 어두워지도록 처마 밑에 앉아 있었습니다.
어느 새 비가 그치고, 하늘에는 눈썹같은 달이 떠올랐습니다. 슬금슬금 불어오는 바람조차 봄기운이 묻어오는 그런 밤이었습니다. 겨울이 마지막 선물로 주고 간 눈 들판이 그 달빛 아래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눈이 그치자 밤 하늘에 달이 떠올랐다
눈이 그치자 밤 하늘에 달이 떠올랐다최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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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장다리꽃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랑은>, <천년 전 같은 하루>, <꽃,꽃잎>, <물골, 그 집>, <람풍>등의 시집과 <비에 젖은 종이 비행기>, <꽃비> , <무지개 너머 1,230마일> 등의 소설, 여행기 <구름의 성, 운남>, <일생에 한 번은 몽골을 만나라> 등의 책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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