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자편이 되게 한 영화, 스팔타커스

편안히 가마 타고와 사뿐히 내리는 여인들

등록 2003.02.11 09:26수정 2003.02.11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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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싫어하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을 것이다. 나 또한 영화를 좋아한다. 지금은 영화 보는 시간을 많이 낼 수 없지만, 예전에 보았던 좋은 영화에 관한 추억들이 많다.

무성영화를 본 기억도 있다. 소년 시절, 무성영화 시대의 끄트머리쯤에 운 좋게(?) 동승해서 단 한 번, 퇴물 무성영화 한 편을 보았던 참으로 아련한 삽화 하나를 기억의 창고 속에 잘 간직하고 있다.


무슨 영화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바지저고리를 입은 더벅머리 헝클어진 사내가 낫을 들고 누군가에게 덤벼들던 한 장면과 그때 격정적으로 숨가쁘게 말을 쏟아내던 변사의 그 열렬한 목소리만이 대여섯 살 소년의 뇌리에 달라붙어 용케 '포자(胞子)'가 된 것이다.

그 '활동사진'을 본 곳은 고향 태안읍 남문리의, 지금도 달라진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는 '구시장'의 한편 공간이었다. 영화를 가져오는 사람들은 제법 너른 그 공간의 양쪽 건물과 건물 사이에 포장을 쳤다. 포장만 쳤을 뿐 지붕은 없으니 거의 노천극장인 셈이었다.

그야말로 활동사진일 뿐인 무성영화가 완전히 사라지고 소리까지 나는 진짜 영화가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구시장 근처에 사는 우리 조무래기들도 바빠지기 시작했다. 기회를 틈타 포장 밑으로 개구멍치기를 해서 공짜로 영화를 보는 재미가 여간 쏠쏠하지 않은 탓이었다.

그런데 애써 개구멍치기를 해 가지고 포장 안으로 들어가서 영화를 보다 보면, 스크린에서는 노상 빗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중간에 곧잘 끊어지기도 해서, 그럴 때는 한창 영화에 열중하던 관객들이 일제히 비명을 지르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도 우스운 것은, 개구멍치기를 해서 공짜로 영화를 보는 주제들이 (나를 포함한 아이들이) 영화 필름이 끊어질 때마다 가장 극성스럽게 아우성을 쳐댄 사실이었다. 영화 돌리는 사람들이 자가발전기의 전등불 밑에서 끊어진 필름을 잇느라 땀을 흘리는 판국에도 우린 "빨리 헙시다!"라는 합창들을 마구 내질렀으니….


우리 동네에 정식 극장이 생긴 때는 1960년대 중반, 내가 고등학생 때였다. 극장이 생겨 며칠 간격으로 좋은 영화들이 상영됨으로써 우리 동네도 당시로서는 어느 정도 '문화동네'의 풍모를 갖추게 되었다. 처음에는 자가발전기로 영사기를 돌렸지만, 곧 우리 고장에도 '한국전력'의 전기가 들어오게 되어서 극장은 더욱 성시의 계절을 맞게 되었다.

하지만 70년대 중반 이후 텔레비전의 급속한 보급과 함께 극장은 점점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하더니 80년대 중반부터는 아예 문을 닫았고 얼마 후에는 건물마저 없어지고 말았다.


고등학생 시절, 우리는 대낮 수업 시간에도 가끔 '단체 관람'으로 영화를 보곤 했다. 우리는 시골 신설 고등학교의 초기 학생들이었다. 우리 고장에 고등학교가 생기지 않았더라면 중학교 졸업으로 학업을 마쳐야 할 가난한 집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개중에는 악착같이 공부하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고등학교 졸업장 하나 바라고 입학을 한, 공부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아이들도 많았다.

공부에 별로 관심이 없는 아이들이 주동을 해서, 우리는 곧잘 '단체 영화관람'을 원했다. 좋은 영화라고 소문난 영화가 우리 고장에도 들어와서 곳곳에 포스터가 나붙고, 극장의 선전 차량이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시는 태안면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어쩌고 하며 가두 방송을 해대면 아이들은 와락 들뜨는 기색이었다. 영화 포스터에 '청소년 입장가'라는 글귀나, 극장측에서 별도로 만든 딱지가 붙었다 하면 아이들은 더욱 좀이 쑤셨다.

공부하기는 싫고 영화 볼 생각에만 잔뜩 부풀어 있는 놈들은 공부하고 싶은 아이들까지 강제로 동원해서 복도로 몰려나가 교무실 쪽에다 대고 함성을 지르곤 했다.
"영화 갑시다아!"

그 상황에서는 선생님들도 교무실에서 논의를 하지 않을 수 없었을 터였다. 지금처럼 공부로만 내몰리고 성적에만 얽매인 빡빡한 시절이 아니었다. 비교적 융통성 있고 여유 있는 분위기는 시골 신설 고등학교라서 더욱 가능했을 터였다.

그런 시위 덕(?)에 영화를 보게 될 때는 더욱 기분이 좋았다. 극장 운영자가 학교에 와서 좋은 교육용 영화라고 홍보를 하고 협의를 해서, 우리가 원하지 않은 단체 관람을 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우리가 복도에서 '단체 고함'을 지른 덕에 싼값으로 보고 싶은 영화를 보게 될 때는 이상한 승리감에 젖어 만세까지 불렀다.

영화 <스팔타커스>. 1960년작. 스탠리 큐브릭 감독, 커크 더글라스, 로렌스 올리비에 주연.
영화 <스팔타커스>. 1960년작. 스탠리 큐브릭 감독, 커크 더글라스, 로렌스 올리비에 주연.
아무튼 우리가 복도에서 시위를 하고 고함을 지른 덕분에 보게 된 영화 중 하나가 미국 영화 <스팔타커스>다. 아마 내가 최초로 접한 외국 영화가 아닌가 싶다.

64년에서 66년 사이의 일이니 벌써 거의 40년 전의 일이다. 미국 영화 <스팔타커스>는 대단히 긴 영화임에도 처음부터 끝까지 나를 열중케 하고 압도했다. 영어를 알아듣지 못해 자막을 쫓아가며 영화를 보는데도 시종일관 나를 꼼짝 못하게 한 기억이 지금도 또렷하다. 영화를 보고 학교로 돌아왔을 때 검투사 스팔타커스 흉내로 한바탕 교실이 시끄러웠던 풍경도 아슴히 떠오른다.

다음날 수학시간이었던가, 선생님이 영화 <스팔타커스>의 수많은 명 장면들 중에서 가장 인상에 남는 장면이 무엇인지를 아이들에게 물었다. 이런저런 대답이 있었는데, 나는 좀 엉뚱했다. 다른 아이들이 쉽게 동의하지 않는 발언을 했다.

로마의 장군들과 젊은 귀족 여인들이 검투사 노예들의 검투를 보러 검투장으로 왔을 때의 그 도착 장면을 가장 인상적인 장면으로 꼽았다. 장군들은 말을 타고 왔고, 여인들은 가마를 타고 왔다. 여덟 명의 노예들이 어깨에 멘 화려한 두 채의 가마가 땅에 내려지자, 편히 두 다리를 뻗고 상체를 비스듬히 눕듯이 하고 앉아 있던 화려한 복색의 젊은 여인들이 각기 가마에서 내려서는 장면.

그 장면이 왜 가장 인상적이었느냐는 선생님의 물음에 내가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기억이 분명치 않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잊혀졌다가도 영화 <스팔타커스>얘기만 나오면 다시금 맨 먼저 그 장면부터 떠오르곤 했다.

그리고 1970년, 나는 월남 전장에서 또 다시 미국 영화 <스팔타커스>를 볼 수 있었다. 월남에서 내가 있던 곳은 투이호아 근교에 자리잡은 백마부대(육군 제9사단) 예하 도깨비부대(제28연대)였다. 도깨비부대 본부에는 큰 극장이 있었다. 삼 면의 벽이 없는 대신 우람한 시멘콘크리트 기둥들이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제법 웅장한 극장이었다.

그 극장에서는 고국 위문단의 공연이 없을 때는 일주일 간격으로 저녁에 영화를 상영하곤 했다. 연대본부의 팔자 좋은 행정병들과 장교들, 근처 209이동 외과병원의 입원 환자(일명 반창고)들과 기간 사병들, 또 연대본부 직할 포대와 전투지원중대의 야간 경계근무에 걸리지 않은 병사들이 주로 와서 영화를 관람했다.

공수기지 1중대의 파견병으로 연대본부 근처 1대대본부에 걸쳐 있던 나도 종종 연대본부 '도깨비극장'으로 걸음을 해서 영화를 보곤 했다. 그런 복터진 팔자 덕분에 미국 영화 <스팔타커스>를 다시 보게 된 것이다.

수년만에 다시, 이제는 월남전에 참전한 전투병이 된 처지에서 보게 된 영화 <스팔타커스>는 내게 좀더 새로운 느낌들을 안겨 주었다. 가마를 멘 노예들, 편안히 가마를 타고 와서 사뿐 내리는 여인들, 검투사 노예들을 고르는 여인들의 눈빛, 검투사 노예들을 고르면서 걸맞지 않게 노예들이 겪는 더위에 동정심을 발휘하는 여인들의 절묘한 자비심 따위, 그런 미세한 장면들에서 나는 다시금 좀더 충격을 받았다.

영화를 보면서 나는 엉뚱하게도 '내가 지금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되어 있는 건 아닐까?'하는 의문을 떠올렸다. '월남전에 참전한 대가로 미국으로부터 전투수당이라는 이름의 돈을 받고 있는 나는 이데올로기와 미국 패권주의의 용병이 되어 있는 게 아닐까?'

엄청난 에너지의 분출을 실감시켜주는 노예 반란, 그 반란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로마 권력층의 암투와 진압, 허무한 패배 끝에 생존 노예들 모두가 십자가형에 처해지는 장면 등은 내게 많은 아픔과 생각들을 안겨주었다.

지금은 지구상에 노예제도가 존재하지 않지만, 제도는 없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존속하는 지배와 피지배의 억압 구조에 의해 능히 노예제도의 실상을 방불케 하는 갖가지 형태의 상황들이 세상 곳곳에서 벌어지리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어떤 형태가 되었건간에 나 자신이 노예적 상황에 처하거나 그런 상황을 목도하게 되면 나는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도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상당히 막연한 상념이긴 했지만, 나는 '약자의 정의'도 많이 생각했다. 강자에게보다는 약자 쪽에 사회정의가 더 많이 결집될 수 있다는 모호한 생각도 했다. 내가 그리스도교 신자인 이상,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소망한다면, 나는 늘 강자보다는 약자 편이 되어, 약자에 대한 차별과 억압, 사회의 불평등과 싸우는 자세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은 참으로 분명했다.

최근에도 나는 텔레비전에서 미국 영화 <스팔타커스>를 보았다. 영화를 보면서 30여 년 전 월남에서의 그 날을 다시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가톨릭다이제스트> 2003년 2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가톨릭다이제스트> 2003년 2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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