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레마에 빠진 '델리 스파이스'

5집 ‘Espresso’

등록 2003.02.14 19:44수정 2003.02.14 2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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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반 제목 ‘에스프레소’는 커피 종류로 생각하기가 쉽지만, 실은 ‘특급’을 뜻하는 ‘익스프레소’의 이탈리아어 표현이다. 하긴 델리 스파이스 하면 볶음 라면이 떠오르면 떠올랐지 커피향이 연상되지는 않으니까. 그래, 과연 ‘특급’이란 타이틀에 걸맞은 음악들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니올시다’ 되겠습니다. 이번 음반은 심히 유감스럽다.

a 델리 스파이스 5집 ‘Espresso’

델리 스파이스 5집 ‘Espresso’ ⓒ 배성록

유감이라는 것은, 이번 역시 델리 스파이스의 음악 자체는 별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전혀 다른 곳에, 이들의 송라이팅이나 연주나 보컬과는 별다른 상관없는 곳에 존재한다. 자, 한번 델리 스파이스가 처음 등장했을 때를 떠올려보라. 그들의 음악은 인디가 나아가야 할 한 이정표와도 같았다. 기교보다는 멜로디를 전달하는데 중점을 둔 멍한 보컬, 초절기교와는 아무 상관없는 연주, 그러나 한번 귀에 들어오면 빠져나갈줄 모르는 강력한 송라이팅. 한껏 멜로우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팬들을 열광시킨 ‘차우차우’의 델리 스파이스는 그런 밴드였다. 재미없는 국내 음악계에서 그들만큼 신선하고 참신한 밴드는 없었다.


그러나 처음의 참신함은 음반을 계속 내놓음에 따라, 어느새 ‘매너리즘’으로 손가락질받기 시작했다. 4집 [D]에 이르기까지 음반을 내놓을 때마다 좀체 처음의 후광을 벗어나지 못했고, 발전 없이 제자리걸음만 한다는 비아냥에 시달려야 했다. 오해 없길 바란다. 물론 여전히 델리 스파이스의 음악은 일정 이상의 퀄리티를 갖추고 있었고, 작곡은 뛰어났으며, 연주력도 나날이 향상되었다. 매너리즘에 대한 질타는 어찌 보면 델리에겐 너무 가혹한 평가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어찌됐든 꾸준히 좋은 곡을 계속 써내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첫 음반, 그 화려한 시작에 비한다면 이후의 델리 스파이스는 ‘발전이 적은’ 것처럼 보일 여지도 충분했다. 델리 스파이스 스스로도 이런 점에 대해 많은 고심이 있었으리라 보는데, 이번 5집에서 그 고민은 전격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음반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전반부의 ‘파격적’인 변신을 시도한 곡들, 그리고 후반부의 전형적인 델리 스파이스 스타일. 또한 전반부는 김민규의 개인적 색채가, 후반부는 윤준호의 스타일이 중심에 놓인다. 변화를 주도하는 것은 한결 다양해진 기타 톤과 건반 악기류의 활용인데, 이런 변화가 성공적인지 중점적으로 살피면 흥미로울 것이다.

음반의 문을 여는 <노인구국결사대>부터 우리가 아는 델리 스파이스는 박살난다. 김종필류 극우 노인네들에 대한 비판적 언급, 퍼즈톤 기타와 강성 사운드. 그러나 과욕일까, 아니면 자신들의 장점을 버린 대가일까. 아주 로킹하지도 비판적 메시지가 두드러지지도 않는, 밋밋한 곡이 되어버렸다. 이런 문제가 음반 전반부의 ‘변화’에서 드러나는 공통적인 사항이다.

최재혁의 곡인 <날개달린 소년>은 아예 멜로디 라인마저도 엉망인데다, 드러머인 덕분인지 기타 어레인지도 한숨 나올 수준이다. <키치죠지의 검은 고양이>는 그런대로 무난하지만, 영화 ‘클래식’ 삽입곡인 <고백>은 델리 스파이스 곡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평범한 가요 발라드일 뿐이다. 어떤가, 이쯤 되면 새로운 시도들은 대체로 실패로 돌아갔으며, 기존 델리 스파이스의 장점마저도 갉아먹었다고 단정 지을 만 하지 않은가.


그런데 허탈하게도 <우주로 보내진 라이카>에 이르러, 갑자기 음반은 다시 옛 델리 스파이스의 음악을 답습하기 시작한다. 우리가 지금껏 들어온 델리 스파이스의 그 스타일 말이다. 가령 <숨겨진 보석>같은 곡이, 오르간이 주도한다는 것 빼고 예전 델리와 다를 게 무엇인가? 이러니 5집을 듣다 보면 요즘 유행하는 ‘신보+베스트’ 구성의 음반을 듣는 듯한 착각에 휩싸이지 않을 도리가 있나. 변신을 시도한 곡들은 있던 장점마저 날려버렸고, 예전 그대로의 곡들은 ‘매너리즘’ 소리를 듣게 생겼다. 딜레마도 이런 딜레마가 있단 말인가.

이런 연유로, 델리 스파이스의 5집은 이래저래 혹평을 면키 힘들 듯하다. 막강 안티 델리들이라면 후반부 곡들의 매너리즘을 문제삼을 것이고, 호의적이던 이들은 전반부 곡들의 처지는 완성도를 놓고 콩팔칠팔할 것이다. 이래도 욕먹고 저래도 욕먹는 셈이니, 가엾다 델리, 어쩌다 이런 진퇴양난의 수렁에 빠졌단 말인가. 안타깝게도 델리 스파이스가 빠진 이번 수렁은 예전보다 조금 더 깊고 험난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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