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에서 선보이는 한국적 재즈의 가능성

나윤선 'Youn Sun Nah 5tet - light For The People'

등록 2003.02.16 19:51수정 2003.02.16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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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한국 재즈계에는 ‘희소식’이 유달리 많았다. 역사와 전통의 신관웅 선생이 무려 두 장의 독집 음반을 발매했고, 그 바람을 타고 박성연 선생이나 웅산과 같은 여성 보컬리스트들도 새롭게 조명되었다.

DJ가 전국에 깔아놓은 인터넷 망을 타고 강태환, 신관웅, 박성연 등의 팬클럽이 속속 생겨났다. (영원한 ‘기대주’ 서영은이 ‘가요’ 보컬로 전향한 것이 옥의 티로 남았지만….) 이런 바람은 차인표가 색소폰을 불고, 케니 지(Kenny G)가 과분한 찬사를 들으며 무수한 컴필레이션 음반을 양산하던 90년대 초반의 재즈 열기와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2002년의 한국 재즈씬이 기억에 남는 것은, 보석과도 같은 젊은 재즈 뮤지션을 무려 셋이나 조우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재즈 피아니스트 곽윤찬, 재즈 신동 진보라, 그리고 지금 소개하는 이 언니, 나윤선. 이 세 명의 젊은 뮤지션들은 정원영-한충완-한상원 등의 퓨전 재즈 세대와도, 그리고 김광민이나 이정식처럼 대중들 틈을 위태로이 노니는 뮤지션들과도 아주 다르다.

퓨전이 아닌 정통에 기반한 어프로치, 흉내내는 것이 아닌 진짜배기 임프로바이제이션, 그리고 적당히 먹은 외국물과 타고난 스타성. 이런 요소들은 이 세 뮤지션을 미 8군에서 출발한 1세대 재즈 뮤지션들과도, 그리고 버클리 출신의 2세대들과도 차별화되게 한다.

신예 스타 세 명 가운데서도 현재 가장 앞으로 치고 나온 뮤지션은 아마 ‘나윤선’일 것이다. (만인의 합의까지는 아니더라도…) 물론 <이소라의 프로포즈> 같은 ‘상업방송’에서 선보인 매력적인 모습, ‘연주곡’보다는 ‘보컬곡’을 선호하는 한국인의 특성 등이 어우러진 결과이겠지만.

아무튼 프랑스에서 장기간 수학하고 교수직까지 지낸 이력, 각종 재즈 페스티발 수상 경력 등은 범상치 않은 것임에 틀림없다. 음악적인 노선 역시도 ‘유럽풍’인 관계로, 국내 여타 재즈 뮤지션들과는 분명한 구분선을 그을 수 있다.

유러피안 재즈라 해서 로라 피지나 키스 자렛 같은 걸 떠올리면 나윤선이 몹시 서운해할 것이다. 아니, 오히려 ECM을 축으로 한 유럽쪽 재즈야말로 소재 빈곤에 허덕이는 미국 재즈가 무색할만큼 품격있는 모습을 보여오지 않았던가.


클래식 음악과 현대 음악에서 수혜받고, 거기에 유럽인 특유의 데카당스를 버무린 유럽식 재즈는 결코 감상하기 녹록치만은 않다. 나윤선의 음악 역시 내성적이고 음을 아끼는 북유럽식에 수다스런 스캣의 프랑스식, 그리고 한국적인 감성까지 미묘하게 섞인 모습이다.

혼 섹션 없이 피아노-콘트라베이스-드럼-비브라폰으로 이루어진 쿼텟도 자주 보는 형태가 아니고 보면, 나윤선 음반은 대중이 만만히 보고 다가갈 성질의 음반은 아닌 셈이다.


그나마 나윤선의 국내 발매반인 'Reflet'만 해도 국내 팬들의 기호를 일정 부분 고려한 내용물이 담겨 있었다지만, 이번 프랑스 발매반인 본작 'Youn Sun Nah 5tet - light For The People'를 감상하기로 했다면 각오를 단단히 해두는 게 좋을 것이다. 아마 수요 예술무대에서 김광민 곡인 "Rainy Day"를 부르던 그녀에게 혹해서 이 음반을 구입했다가는 몇 트랙 못 참고 뛰쳐나갈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본작은 출중한 완성도에 비해 난이도가 까다로운 편에 속한다. 쿼텟 멤버인 요니 젤닉(Yoni Zelnik:콘트라베이스)과 다비드 니어만(David Neerman:비브라폰)의 곡인 첫 트랙 "One Day"와 나윤선의 곡인 "Untitled"까지는 그래도 한국인이 좋아하는 ‘무드’라도 있다.

고풍스런 콘트라베이스와 비브라폰의 절묘한 호흡, 절제된 나윤선의 보컬, 살랑살랑 브러쉬… 그러나 이런 ‘스무스’하고 ‘이지 리스닝’한 전개는 전설의 레퍼토리 "Besame Mucho"부터 난이도를 높여 나간다.

원곡이 지닌 ‘음울함’을 극대화한 해석으로, 콘트라베이스와의 주거니 받거니가 중심에 놓인다. 이어지는 "Sometimes I'm Happy"는 냇 킹 콜의 노래와 간질간질한 바이올린 반주로 유명한 곡. 아마도 본작 최고의 트랙인 동시에 최’고난이’ 트랙일텐데, 나윤선의 화려한 개인기, 연주자간의 절묘한 인터플레이, 점차적인 선율 해체가 어우러져 황홀한 순간(사람에 따라서는 지옥 같은 순간)을 선사한다.

또한 음반 후반부의 "Nostalgia"는 현제명의 가곡 "고향생각"을 재지하게 재해석한 곡으로, 민족주의자라면 ‘한국적 뿌리’ 운운했을 법한 대목이다. 그러고보니 프랑스 음반임에도 한국어 가사로 된 곡이 ‘무려 세 곡이나’ 수록되어 있다. 한국적 뿌리건 뭣이건 간에, 필자 입장에서는 그다지 수록곡간 언어의 차이가 두드러지게 각인되지는 않는다. 아마도 그건 기악과 보컬 임프로바이제이션에 중점을 둔 나윤선의 음악적 특색 때문일텐데, 말하자면 머리 터지게 감상하는 판에 노랫말에 핏대 세울 여유가 없는 것이다.

다만 한국어 가사와 가곡은 나윤선이 ‘한국인’으로서 ‘세계적’인 가능성을 갖춘 보컬리스트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기는 한다. 아하, 세계적으로 인정받을만한 한국 뮤지션이 또 하나 추가되는 순간이구나, 하는 느낌 정도랄까.

정말이지 그녀의 앞날엔 거칠 것이 없어 보인다. 재능에, 명성에, 방송 출연을 통해 얻은 인기까지. 곽윤찬에 비해 유달리 높은 나윤선의 인기가 ‘외모’ 덕분이라는 것은 부인하기 힘들지만, 아무튼 어떤가. 우리는 2000년대를 이끌어갈 출중한 재즈 뮤지션들을 한아름 발견했다. 그것도 무려 세 명이나. 한국 재즈씬의 앞날은 이렇게 밝고 화사하다, 팬들의 관심만 계속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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