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평생 잊지 못할 일

그리운 그 사람을 만날 수만 있다면 (28) - 아버지의 목소리

등록 2003.02.16 20:35수정 2003.02.17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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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사랑은 뚝배기에 담긴 토장국 맛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는 그 사랑을 잘 모르다가 돌아가신 뒤에야 속속들이 느낀다.


1980년 그 무더웠던 여름, 한 괜찮은 선배 교사가 ‘사회 정화’라는 이름으로 교단에서 쫓겨났다.

몇몇 교사들이 그대로 있을 수 없어 당국에다 억울함을 호소하고자 탄원서를 썼다. 그러자 교장이 만류하고 교육청 장학사가 학교로 와서 협박을 했다. 서명자들은 그 위협에 눌려 시말서를 쓰는 졸장부가 되었다.

나는 도둑이 오히려 매를 든 어처구니없는 현실이 너무 싫었다. 차라리 남대문시장에서 손뼉치는 장사꾼이 더 좋아 보였다. 그래서 교단을 떠나고자 아버지께 상의를 드렸다.

“교사는 학생을 보고 사는 거다.”

그 말씀이 나를 교단에 눌러 앉게 했다. 그러나 당신은 그 당시 시국을 비판하다가 갖은 고문과 수모를 당했고, 그 후유증으로 천수를 다 못 누리고 비명에 가셨다.


몇 해 전, 나는 학년말 교직원 해외연수에 참가하지 않았다. 그 연수는 내 양심이 도저히 허락지 않았다. 그러자 윗사람이 ‘협조하지 않는 사람’ ‘삐딱한 사람’ ‘모난 사람’이라고 빈정거렸다.

정말 학교에서 지내는 하루하루가 가시방석에 사는 기분이었다. 사표를 던져버리고 싶었지만 그때마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교사는 학생을 보고 사는 거다.”

a 일본 아오모리현 오이라세 계곡에 눈사태로 쓰러진 고목(枯木)이 개울물을 가로질러 뭇 짐승들의 길 역할을 하고 있다. 외람되지만 나도 이제 남은 삶을 저 외나무다리처럼 살고 싶다.

일본 아오모리현 오이라세 계곡에 눈사태로 쓰러진 고목(枯木)이 개울물을 가로질러 뭇 짐승들의 길 역할을 하고 있다. 외람되지만 나도 이제 남은 삶을 저 외나무다리처럼 살고 싶다. ⓒ 박도

며칠 전, 나는 한 제자의 주선으로 일본 북동북 일대를 일주일간 한국방송공사 팀과 함께 취재여행을 하고 돌아오면서 비행기에 오르자마자 반가운 마음으로 한국 신문을 펼쳐 머리 기사를 훑었다.

‘야, 현대 북에 2조 제공’ ‘전두환씨 은닉재산 찾아 달라. 검찰, 법원에 재산 명시 신청’ ‘교사가 시험문제 유출…….’

갑자기 귀가 멍멍해졌다. 비행기의 고도 상승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동안 산다고 애썼다. 30년 넘게 교단을 지켰으면 할 만큼 했다. 이제는 네 뜻대로 해라.

네가 여행 중, 아오모리 오이라세 계곡에서 눈사태로 쓰러진 고목이 개울을 가로지른 외나무다리로 뭇 짐승들의 길이 된 것처럼, 너도 그동안 보고 듣고 느낀 바를 글로 정직하게 써서 다음 세대에게 이어주고 내 곁으로 오라.”

아버지의 다정한 목소리가 비행 소음 사이로 들려오는 듯 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한국일보> 2003. 2. 17일자 7면에 실린 글입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한국일보> 2003. 2. 17일자 7면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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