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당선자의 한복 차림을 보며

등록 2003.02.17 07:30수정 2003.02.17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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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이 탓인지는 몰라도 한복에 대한 향수를 많이 지니고 사는 사람이다. 어렸을 적의 시골 풍경을 기억하는 일은 내게 늘 어떤 신선함 같은 것을 안겨 준다. 5일장이 성시(盛市)를 이루던 시절, 장날이면 촌락에서 읍내로 넘어오는 고갯길에서 하얗게 한복 차림을 한 노인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노인들 중에는 갓을 쓴 이들도 많았다.


그 노인들의 손에는 계란 꾸러미나 묵게 꾸러미 따위가 들려 있곤 했다. 짚꾸러미 속의 묵게들은 하나같이 흰 거품을 물고 있었다. 그런 것들을 들고 나오면서도 노인들은 하나같이 한복 차림을 했다. 하얀 두루마기를 입고 갓을 쓰고 먼지 나는 한길 시오리를 걸어와서 읍내 장터 풍경을 구경하며 이 사람 저 사람과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물건 판 돈으로 목로 집에 들어가서 막걸리 잔을 기울이던 노인들….

a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는 2월 10일 정부중앙청사 별관 대통령직인수위 집무실에서 손길승 신임 전경련 회장의 예방을 받고 경제현안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는 2월 10일 정부중앙청사 별관 대통령직인수위 집무실에서 손길승 신임 전경련 회장의 예방을 받고 경제현안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 ⓒ 주간사진공동취재단

비록 가난한 시절이었지만, 그 노인들의 삶에는 일정한 어떤 격식 같은 것이 있었다. 장에 나오면서도 의관을 정제한 그 예의범절 속에는 정갈함과 낙락함이 함께 있었다. 물론 내 어렸을 적에는 생각하지 못한 것이지만, 오늘 다시 그 풍경을 되돌아보면, 노인들의 그 한복 차림은 내게 참으로 질감 좋은 향수를 반추케 한다.

태안 천주교회가 아직 공소(公所)로 있던 시절, 50년대 말과 60년대 초의 한가지 풍경도 내게는 신선한 추억으로 자리하고 있다. 일년에 두 번 있는 '판공(辦功)' 때의 풍경이다. 예수부활대축일 전의 사순 시기와 예수성탄대축일 전의 대림 시기에 모든 신자가 의무적으로 보아야 하는 고해성사를 한국 천주교에서는 일찍부터 '판공'이라는 말로 불러왔는데, 이 판공 때마다 특히 노인들의 모습은 참으로 각별했다.

남자 노인 여자 노인 할 것 없이 모든 노인들이 하얗게 한복 차림을 했다. 그리고 일찌감치 공소에 와서 서산 본당에서 신부님이 오시기를 기다렸다가 반갑게 마중을 하고, 한 분씩 성사를 보던 모습….

역시 그 당시에는 잘 몰랐지만, 노인들의 그 하얀 한복 차림은 그대로 '깨끗함'을 추구하는 마음의 표상이었다. 고해성사로 영혼이 깨끗해지기 위해서는, 그리고 자신의 마음 안에 하느님을 잘 맞아들이기 위해서는 우선 옷차림이 환하고 깨끗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그 백의(白衣)는 그대로 마음의 지향을 의미하는 것일 터였다.


오늘날에는 한복에 흰옷은 거의 없다. 지금도 한복 차림을 종종 보지만 흰 두루마기는 참으로 보기 어렵다. 나도 아내가 시집올 때 해준 두루마기 한 벌을 16년 동안 고이 간직해오면서 설 명절에는 꼭꼭 꺼내 입곤 하는데, 역시 검정 두루마기다. 흰 두루마기가 아니어서 불만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나는 두루마기를 입을 때마다 옛날 노인들의 그 하얀 한복 차림을 떠올리곤 한다.

흰 두루마기는 아니어도, 나는 한복을 입을 때마다 마음이 정갈해지는 기분을 느끼곤 한다. 두루마기를 입으면 마음이 더욱 산뜻해지면서도 엄숙해지는 것 같다. 다소 불편하기는 하지만, 기분 좋은 느낌인 것은 참으로 분명하다. 옛날 노인들처럼 갓을 쓰지는 않았더라도, 두루마기를 입은 모습으로 차례를 지내고 성묘를 다닐 때의 그 정갈한 기분을 정확히 표현할 수가 없을 것 같다.


천주교의 신부님들 중에는 설날 한복 차림으로 미사를 지내는 분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전에 우리 교회에 계셨던 신부님들 중에도 그런 분이 여러분이었다. 두루마기 위에 '영대(領帶)'만을 걸치고 미사를 지내는 사제의 모습을 볼 때마다 우리의 고유 명절을 함께 나누고 즐기는 한국인으로서의 일체감 같은 것을 더욱 만끽하는 기분이곤 했다.

요즘 텔레비전 뉴스를 보다보면 즐거운 느낌을 갖게 하는 그림 하나를 만나곤 한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의 한복 차림 모습이다. 노 당선자는 한복 차림이 참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양복을 입은 모습보다 두루마기를 입은 모습이 한결 환하고 듬직해 보인다. 그가 요즘 한복을 즐겨 입는 것에 그만의 어떤 다른 이유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나로서는 국정에 대한 투철한 '의지'와 '자신감'의 표현으로 보고 싶다.

오늘날에는 대통령이나 고위 공직자가 한복 차림을 하고 대중 앞에 나타나는 것은 어느 정도의 파격성을 지니는 모습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옛날에는 격식이었던 그것이 오늘날에는 파격적이라는 것에서 일종의 아이러니도 느끼게 되지만, 하나의 파격성 속에서 어떤 의지와 자신감은 더욱 발휘될 수 있는 법이다.

시골 출신인 노무현 당선자는 한복 차림을 하면서, 비록 색깔이 있는 두루마기를 입을지라도, 정결함의 표상이었던 옛날의 흰옷에 대한 향수를 되새길 수도 있을 것이다. 매일 입고 벗는 단순한 입성일지라도, 지금 그가 즐겨 입는 한복에는 우리 민족의 정체성과 자존심의 확인 같은 것도 함축될 수 있다는 것을 그는 헤아릴 것이다.

어쩌면 그는 아예 처음부터 그런 것을 의식하고 한복을 즐겨 입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다른 어떤 현실적인 이유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의 한복 차림에 그런 특별한 의식 같은 것이 결부되었기를 나는 진심으로 바란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지난 2001년 10월에 썼던 「우리 한글은 언제쯤 사라질까」라는 글의 한 대목을 오늘 다시 소개할까 한다.

나는 미국에 대해 엄청난 테러를 자행한 아랍인들의 그 가공할 테러리즘까지 옹호하는 것은 아니지만 미국인들의 오만 방자한 패권주의에 대항하는 이슬람 문명권의 자존심에 대해서는 찬탄의 눈으로 보고 있다. 아랍권의 지도자들은 유엔 총회에서도 올림픽에서도 그들의 고유 의상을 애용한다. 언제 어디서든 그들이 고유 의상을 입지 않은 모습을 본 기억이 없다. 그들의 고유 의상은 그대로 그들의 정체성과 자존심의 탁월한 반영이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 이래로 우리 나라의 지도자들이 외국 방문 길에 우리의 고유 의상을 입어본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을까? 우리 나라에서 외국 손님을 맞을 때 대통령이나 장관들이 한복을 입었던 적이 한 번이라도 있을까? 내 기억에는 없다.

이것은 단순한 의상 차원의 얘기가 아니다. 외국인에게 우리 민족의 정체성과 긍지를 표현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참으로 좋은 인상을 줄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외교 통상과 군사 문제 등에서 미국의 오만하고 고압적인 자세를 볼 때마다 한가지 묘한 의문에 사로잡히곤 한다. 그들이 그렇게 우리를 멸시하는 것에는 자신들의 우월한 힘에 대한 과신만이 있는 것일까? 그것에 어쩌면 혹 민족의 정체성을 잃어가고 민족의 긍지와 자존심을 챙기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사대주의 근성에 대한 경멸의 시각이 내재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시시각각 미국의 문화 식민지가 되어 가고 있고 언어의 속국이 되어 가고 있으며, 머지 않아 자신들의 언어마저 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르는 민족, 사대주의와 대세론에 약한 우리의 속성을 그들은 꿰뚫어볼 지도 모른다.


나는 노무현 당선자의 한복 차림을 참으로 반기는 사람이다. 다시 한번, 그의 한복 애용에 남다른 의식과 의지가 실려 있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노 당선자가 오는 25일의 대통령 취임식장에서도 한복을 입은 모습을 보여 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앞으로 대통령직을 수행하면서 특히 외국인들을 상대할 때는 반드시 한복 차림이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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