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전란으로 부모를 잃은 그는 지겹도록 고독하게 지냈다. 세상 그 어느 누구도 도움의 손길을 베풀지 않았기에 배가 고프면 스스로 먹을 것을 찾아 나서야 헸다.
그러던 어느 날 토끼를 잡으려다 우연히 상고 기인이 좌화해 있던 동굴 속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곳에서 무려 십 년 간이나 벽곡단( 穀丹)으로 허기를 메우면서 무공을 익혔다.
결국 무공을 익혀 간신히 동굴을 벗어난 그는 객잔 앞에서 무럭무럭 김을 뿜고 있는 만두를 보고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닥치는 대로 집어먹었다.
십 년만에 처음으로 포만감을 느낄 즈음 사나운 표정을 지은 점소이 하나가 다가왔다. 그는 냉혈살마가 걸치고 있는 너덜너덜한 의복을 보고 거지라 판단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자신의 허락도 없이 만두를 집어먹은 냉혈살마를 치도곤 내기 위해서 굵은 몽둥이를 들고 있었다. 결국 그는 냉혈살마의 손에 세상을 하직하는 첫 번째 희생자가 되었다. 이후 사람들은 그만 보면 슬금슬금 피했다.
죽은 점소이가 시신조차 제대로 남기지 못할 정도로 처참한 모습으로 죽었기 때문이다.
사람들 틈에 있지만 여전히 고독했던 그는 자신에게 손가락질을 하는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죽였다. 그 결과 냉혈살마라는 외호를 얻은 것이다. 그런 그는 유난히도 비접나한을 챙겼다.
둘은 정의수호대원에게 생포되어 산해관 관아 뇌옥에 하옥되어 있을 때 처음 만났다. 이때 비접나한은 겁에 질려 있었다.
늘 사치와 향락만 누리던 그가 쥐들이 득실대는 뇌옥에 갇혔으니 겁이 날만도 하였다. 하여 부들부들 떨며 어쩔 줄 몰라 할 때 냉혈살마가 나서서 쥐들을 쫓아냈다.
고맙다는 말을 건네고 어쩌고 하면서 말문이 트인 비접나한은 믿기지 않는 현실에 겁을 잔뜩 먹고 있다는 것을 감추지 않았다. 그러기엔 미구에 닥쳐올 장래가 너무 두려웠던 것이다.
이를 보고 위로의 말을 던지던 중 의기투합하여 의형제까지 맺게 되었던 것이다.
평생 홀로 지내다시피 한 냉혈살마에게 있어 비접나한은 비록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친형제나 마찬가지인 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를 챙긴 것이다.
그렇기에 아우를 돕다가 독방형에 처해졌던 이회옥이 돌아오자 미안하여 다음엔 자신이 가겠다고 하였던 것이다.
며칠 후, 이회옥은 또 다시 독방형에 처해졌다. 이번에도 음식을 나눠주다 발각된 것이다. 그런 그의 표정에는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지옥갱에 있는 죄수 가운데 독방형에 처해지고도 그처럼 무표정한 사람은 지금껏 아무도 없었다. 그렇기에 옥족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하지만 별다른 의심 없이 그를 독방에 밀어 넣고는 이내 돌아섰다.
독방은 너무 단단한 암석이어서 더 이상 파기 어려워 사용하지 않는 갱도의 끝을 막아 만든 곳이다. 따라서 도주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곳이다. 그렇기에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은 것이다.
* * *
"헥헥! 헥헥! 언니! 자, 잠깐만 멈춰 봐!"
"헉헉! 왜?"
"헥헥! 너무 힘들어서 그래… 헥헥! 얼마나 더 가야 해?"
"헉헉! 몰라! 나도 몰라."
사라는 뒤따르던 유라를 바라보면서 거친 숨을 몰아쉬며 주변을 살펴보았다. 보다 안전해 보이는 곳을 찾기 위함이었다.
백설이 수북하게 쌓인 산은 인적이 완전히 끊겨 있었다. 사람의 흔적이 있다면 자신들이 지나온 곳에 남겨진 길게 두 줄로 이어진 것뿐이었다.
둘은 지난 이틀 간 눈 한번 붙이지 못했고, 음식도 먹은 적이 없었다. 있다면 갈증을 풀기 위하여 먹은 눈덩이 뿐이었다. 뒤쫓는 추적자들 때문이었다.
합비에서 철기린의 마수(魔手)로부터 간발의 차이로 벗어나게 된 둘은 자신들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정신 없이 달려갔다. 그런 그녀들이 기진맥진한 채 당도한 곳은 합비 남쪽에 위치한 자그마한 송림 속이었다.
그곳에서 간신히 정신을 차린 둘은 서로를 끌어안고 통곡했다. 어쩌다 이런 신세가 되었는지 참으로 억울하였기 때문이다. 이후 둘은 남하(南下)하였다.
지닌 은자라곤 한 푼도 없었고, 겨울 초입이었는지라 둘은 거의 굶다시피 하였다. 그렇기에 추워지기 시작한 북쪽보다는 남쪽을 택한 것이다.
그러다 운 좋게 만난 노인 부부로부터 음식을 얻어먹은 둘은 기력을 되찾자마자 먼 길을 떠났다.
고향인 탑리목분지로 향하려는 것이다. 그곳까지의 여비(旅費)는 걸치고 있던 화복(華服)과 옥잠(玉簪)을 팔아 만들었다. 대신 허름한 마의(麻衣)와 나무 비녀를 써야 하였다.
연약한 여인의 몸이기에 육로보다는 장강(長江)의 수로(水路)를 이용하는 것이 훨씬 빠를 것이다. 그래서 일단 배로 동진(東進)한 뒤 사천성에 당도하면 북동쪽으로 이동하려 하였다.
이것이 탑리목분지로 향하는 가장 빠른 방법이었다. 하여 희망에 부풀었던 두 여인은 예기치 못한 상황과 봉착하고 말았다.
선착장에 부근에 당도하여 배편을 알아보던 중 자신들의 용모파기가 그려진 방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분명 자신들을 보내놓고 후회하는 철기린이나 마면호가 붙여 놓은 것일 것이다.
하여 죽립을 눌러 쓴 채 상황을 살피던 중 또 다시 예기치 못한 상황에 봉착했다. 놀랍게도 청타족 용사들과 조우한 것이다.
그들은 사막의 사자 자하두(紫夏斗)가 보낸 삼천여 용사들 가운데 일부였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중원 곳곳에 방을 붙였으며 이 같은 교통의 요지마다 용사들이 배치되어 있다 하였다.
이십여 청타족 용사들을 이끄는 자는 보달기(菩達基)였다.
자하두에게는 자식이라곤 사라와 유라뿐이었다. 그런데 청타족은 대대로 사내가 족장을 맡게 되어 있다. 그렇기에 사라와 유라는 청타족 용사들이 꿈에도 그리는 배필이었다.
그녀들과 혼례를 올린 둘 가운데 하나가 차기 족장이 될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용사들 가운데 여럿이 두 여인의 방심(芳心)을 얻기 위하여 각축을 벌여왔다.
그런 그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보달기였다. 그는 무공만큼은 여러 경쟁자들을 압도하였다. 하지만 그는 사라와 유라 둘 가운데 어느 하나의 마음도 얻지 못하였다.
불같이 급한 성질과 못생긴 외모 때문이었다. 따라서 차기 족장이 될 확률이 거의 없는 자였다. 아무튼 같은 부족을 만난 사라와 유라는 반가운 나머지 환호성을 질렀다. 이제 마면호를 만나도 안전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날 둘은 만 하루가 넘도록 깊고 깊은 잠에 취해 있었다. 둘 가운데 언니인 사라가 먼저 깨어났다. 때는 사위가 어슴프레한 어둠 속에 잠기려는 무렵이었다.
"크흐흐!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겠지? 크흐흐! 이것은 하늘이 준 기회일 것이다. 안 그러냐?"
"크흐흐! 그렇습죠. 흐흐흐! 두 계집이 대주의 눈에 뜨인 것은 그야말로 하늘의 뜻입죠. 그러니 망설일 이유가 없습죠."
잠에서 깬 사라는 밖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자 귀를 기울였다.
'응? 무슨 소리지? 대체 뭘 말하는 거지? 두 계집이라면… 설마 우리를 말하는 것은 아니겠지?'
사내들의 여인을 비하하는 듯한 표현을 들은 그녀의 아미는 살짝 찌푸려져 있었다.
"크흐흐! 쌀이 밥이 되고 나면 족장도 뭐라 못 하지."
"크크크! 그렇습죠. 그나저나 대주께서 족장이 되시면 속하들도 잘 좀 봐 주십시오."
"크하하! 이를 말이냐? 두 계집을 찾아내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너를 어찌 잊겠느냐? 걱정 마라! 그나저나 사라가 맛이 있을까? 아님 유라가 맛이 있을까?"
"크크! 쌍둥이이니 아마 비슷한 맛이 날 것입죠."
"크하하하! 그럴까? 크크크크!"
'설마…! 말도 안 돼! 어찌 저 자가…? 이런 무엄한 놈!'
사라는 두 사내의 대화 내용을 듣고 무슨 일을 획책하려는 지를 깨닫고 안색이 돌변하였다. 무엄하게도 보달기가 자신과 유라를 능욕하려 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크크크! 그럼 속하는 오늘 사용하실 원앙금침을 준비할 터이니 대주께서는 천천히 수욕이나 하고 계십시오."
"허험! 그, 그럴까? 어차피 계집들이 깨어나려면 조금 더 있어야 할 것 같으니… 흐음! 좋아, 그러지."
보달기와 그의 수하간의 대화를 들은 사라는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는 것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허억! 안 되겠다. 저런 나쁜 놈! 어서 여기서 도망가야 해!'
잠시 후 유라는 놀란 눈으로 사라를 보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입은 사라의 섬섬옥수로 막혀 있었다.
"쉬잇! 조용히 해! 소리내지 말고 나를 따라와. 알았지?"
"……!"
유라는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었지만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라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잠시 후, 사라와 유라가 있던 객잔의 창문이 살그머니 올려졌다. 그리고는 두 여인의 신형이 빠져 나왔다.
다음날 아침까지 보달기 일당은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베개와 이불로 사람이 있는 듯 꾸며 놓았기 때문이었다.
이후 사라와 유라는 보달기와 그 일당들의 집요한 추격을 받게 되었다. 잡히기만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뻔하므로 그야말로 모든 혼신을 다하여 도주하였다. 그러다 결국 이곳 황산에 당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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