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자무협소설> 전사의 후예 59

탈출시도 (4)

등록 2003.02.25 15:17수정 2003.02.25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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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헥헥! 이, 이쪽으로 가자."

사라가 택한 곳은 좁은 협곡이 시작되는 곳이었다. 이동하기 편한 능선을 두고 협곡을 택한 것은 도주의 편이성보다는 어떻게 하면 추격자들을 따돌릴 수 있을까를 생각한 결과였다.


이처럼 깊은 산의 협곡이라면 의례 계류(溪流)가 있는 법이다. 그것을 이용하여 도주하려는 것이다. 지금까지 추격자들을 따돌리지 못한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눈 때문이었다.

전설처럼 전해지는 경신공부인 답설무흔(踏雪無痕)을 모르는 한 흔적이 남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추격자들이 집요하게 추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는 산등성이를 타고 오르느라 어쩔 수 없었지만 계곡이 있다면 상황이 다르다. 물이 얼지 않았다면 흔적을 남기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헉헉! 발은 시립겠지만 참아야 해! 여기서 놈들을 따돌리지 못하면 꼼짝없이 당할 거야. 알았지?"
"헥헥! 알았어. 걱정하지 말고 앞장 서!"
"그래! 자, 그럼 잘 따라와라!"

말을 마친 사라는 잰걸음으로 협곡 초입에 발을 들여놓으며 사방을 살폈다. 산짐승들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곰이나 뱀은 절대 달려들지 않을 것이다. 동면(冬眠)에 빠져들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리나 늑대였다. 늘 굶주려 있는 놈들과 만나면 한 많은 세상을 하직하여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신경을 바짝 세우고 사방을 살피는 것이다.

"헉헉! 가, 가자! 다행히도 아직 안 얼었어."
"헥헥! 알았어! 앗, 차가워!"


사라를 따라 물 속에 발을 들여놓던 유라는 단숨에 뼛골을 얼릴 듯한 냉기가 엄습하자 황급히 발을 뗐다.

"발이 시려도 할 수 없어. 일단은 이렇게 도망가야해. 안 그러면 짐승 같은 보달기 놈의 얼굴을 또 봐야 할지도 몰라."
"아, 알았어."

보달기의 못 생긴 얼굴을 떠올린 유라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다시 물 속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에게 청백을 빼앗기느니 차라리 얼어죽는 편이 났다 생각한 것이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면 겨울이라 종아리 아래까지 밖에 물이 차 오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일 수량이 풍부한 여름이었다면 적어도 허리까지는 잠겼을 것이다.

위기에 처한 두 여인의 신형은 곧 협곡 사이로 사라져갔다. 대략 반나절 정도가 지난 뒤 일단의 무리들이 협곡의 입구에 당도하였다.

한결같이 두툼한 의복을 걸치고 죽립을 쓴 무리들이었다. 그들은 보달기와 그의 수하들이었다.

사라와 유라는 무공을 전혀 모른다. 따라서 뛰어보았자 벼룩이고 날아 보았자 파리일 것이다. 게다가 한 겨울인 지금 쌓인 눈은 좋은 안내자였다. 길게 이어진 흔적만 따르면 되기 때문이다.

"크크크! 계집들… 둘 다 생긴 것만 반반하지 대가리는 영 시원치 않은 모양이군. 하긴 쌍둥이이니…"

보달기는 사라와 유라가 흔적을 감춘다든지 하는 등의 잔꾀를 쓰지 못하는 것을 보고 나지막이 조소를 터뜨렸다. 만일 흔적을 감춘다든지 기타 다른 방법으로 추격자들을 따돌리려고 마음먹었다면 애를 먹을 수도 있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먹을 것 다 먹고, 잠 잘 것 다 자면서 추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때로는 다루에 들러 차까지 마신 적도 있었다.

"크흐흐! 흔적을 보아하니 이곳을 지나지 얼마 되지 않은 듯합니다. 이제 한 시진 내로 잡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크크! 이렇게 계집들 꽁무니만 따라다닐 수는 없지. 좋아, 어서 가자! 크크! 자하두 그 영감이 놀랄 것을 생각하니… 크크크!"

보달기는 벌거벗은 사라와 유라를 양쪽에 끼고 있을 생각을 하니 괜스레 기분이 좋아지는 듯 연신 실소를 터뜨렸다. 잠시 후 일당 역시 협곡 사이로 사라졌다.

먼저 사라진 사라와 유라, 그리고 보달기와 그 일당들은 이곳이 황산에서도 유명한 비취곡(翡翠谷)의 입구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이곳은 황산에서 가장 긴 협곡으로 길이만 해도 무려 오십 리가 넘는 장대한 협곡이다.

어찌나 험한지 황산 인근에 사는 사람들은 이곳을 지옥곡(地獄谷)이라고 불렀다. 길을 잃고 헤매기 십상인 이곳은 험난하기로 따지면 타의추종을 불허할 정도이기에 웬만한 사람들은 발길 들여놓기조차 꺼리는 곳이다.

이곳은 무공이 있는 사람조차 전진하기 쉽지 않은 곳이다. 그렇기에 사라와 유라의 전진 속도는 매우 느렸다.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인 두 여인이 과연 위기를 무사히 벗어날 수 있을지 심히 걱정되는 순간이었다.

* * *

철커덕! 철커덕! 끼이이이이익!
"크크크! 삼천이십칠견! 이 괴물 같은 놈아. 이제 나와라!"
"……!"

날카로운 금속성과 함께 눈부신 빛이 쏟아져 들어오자 이회옥은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천천히 밖으로 걸어 나왔다.

"대체 너란 놈은 어떻게 된 놈인지… 웬만한 놈들은 하루만 지나도 울면서 꺼내 달라고 아우성을 치건만…"

옥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꺼내 주면 며칠 있다 또 들어오고, 꺼내 주면 며칠 있다 또 들어오기를 이번으로 스물다섯 번째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삼 년 전에 독방에 들었던 자는 불과 사흘이었지만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실성하였다. 하여 침을 질질 흘리고 돌아다니다가 굶어 죽었다. 그것은 비단 그때 뿐만은 아니었다.

실성까지 하지는 않다 하더라도 한번 독방에 들었던 놈은 다시 독방에 투옥되는 것을 몹시 두려워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회옥은 독방 생활을 즐기기라도 하는 듯 며칠에 한번씩 뻔질나게 드나드니 괴물 같은 놈이라는 소리가 나올 만도 하였다.

"크크크! 웬만하면 다시 안 오는 것이 좋을 것이다. 크크! 지금까지는 그런 대로 잘 버틴 모양이다만 또 그럴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알겠느냐?"
"……!"

이번에도 이회옥은 입을 열지 않았다. 사흘 간 물만 마시고 아무 음식도 못 먹는 일이 반복되다보니 수척해져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걸치고 있는 마의가 헐렁해 보였다. 하지만 눈빛만은 흐리멍덩하지 않았다. 밤하늘에 빛나는 샛별처럼 반짝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의복 속에 감춰진 근육 역시 조금도 줄어 있지 않았다. 줄어든 것은 필요 없는 군살뿐이었다.

이날 밤, 모두가 잠든 후 주변을 살피다가 슬그머니 이회옥의 곁에 누운 냉혈살마는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흐음! 그동안 수고가 많았다! 이제 얼마나 남았느냐?"
"다했습니다. 혹시 몰라 한 치 정도만 남겨 두었을 뿐입니다."

"그래? 수고가 많았구나. 좋아, 이젠 어떻게 하지?"
"내일 밤, 모두가 잠들면 저를 따라 오십시오."

지옥갱은 생각보다 깊었다. 그리고 독방의 암석은 다른 곳보다도 더 단단했다. 그렇기에 처음 계산으로는 이십 일만 파면 될 줄 알았는데 무려 칠십오 일 동안이나 작업을 해야했던 것이다.

처음엔 한 시진만에 반 장 깊이를 팔 수 있었다. 그렇기에 하루에 열 시진 동안 일을 한다면 매일 오 장씩을 팔 수 있다는 계산이 나왔던 것이다. 하지만 그 다음부터는 아니었다.

새로 파 들어간 곳은 다른 곳보다도 훨씬 단단한 암석인지라 하루에 삼 장 이상을 팔 수 없었다. 게다가 위로 올라가도록 파면서 아래로 미끄러지지 않게 하기 위한 발판을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떼어낸 암석을 처리하는 일에 제법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야 했기 때문이다. 캐어낸 암석을 독방에 그냥 두면 석방될 때 옥졸에게 발각될 것이 분명하였기에 어떤 방법으로든 처리를 하여야 했던 것이다.

그것은 비접나한이 맡아서 처리하였다. 그는 독방 부근의 갱도에서 일을 하면서 수시로 들러 철문 아래에서 암석을 받아갔다.

다행히도 철문 아래에는 음식물을 넣어주는 구멍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마도 예전엔 독방에 갇힌 죄수에게도 음식을 주었던 모양이었다.

덕분에 비접나한은 혼자 작업하면서도 굶지 않았다. 그야말로 일석이조인 셈이었다. 어찌되었건 칠십 일이 넘도록 작업한 끝에 판 암굴의 총 길이는 이백 장 가량 되었다.

수직으로 파 올라간다면 백 장 정도만 파면되었지만 비스듬하게 파야했기 때문이다. 내공이 없는 냉혈살마와 비접나한을 배려하여 완만하게 파 올라간 것이다.

칠십오 일이나 걸렸지만 이회옥에게 청룡갑으로 단련된 근육과 내공심법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거리였다.

오늘 이회옥은 작업을 하다 무슨 소리인가를 들을 수 있었다. 아주 작은 소리였지만 한참동안 귀를 기울인 결과 알아낼 수 있었다. 그것은 멀지 않은 곳에서 물이 흐르는 소리였다.

아직 구멍이 뚫리지도 않았건만 외부의 소리가 들린다 함은 이제 거의 다 팠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하여 몹시도 흥분되었지만 애써 긴장하며 조심스럽게 암석 조각을 떼어냈다.

그 결과 앞으로 한 치 정도만 더 파면 외부로 나갈 수 있을 정도가 된 것이다. 만일 오늘이 독방에서 나가는 날이 아니었다면 완벽하게 구멍을 뚫을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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