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자무협소설> 전사의 후예 62

으으…! 이제 죽었다. (2)

등록 2003.02.28 14:04수정 2003.02.28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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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주의 명이 떨어짐과 동시에 옥졸들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동아줄로 전신을 꽁꽁 묶었다. 옴짝달싹 조차 못할 형편이었다. 그리고는 가죽으로 만든 자루 속에 담겨진 채 허공에 매달려졌다.

비접나한이나 냉혈살마는 이미 혼절한 상태이기에 반항할 수조차 없지만 이회옥은 달랐다. 아직 제 정신이 있기에 어떻게든 벗어나려 하였다. 하지만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제아무리 강한 근력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마혈을 제압 당하였기에 꼼짝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으읏! 내, 내가 왜 이래? 아아악! 사, 살려 줘! 살려 줘!"
"허억! 이, 이건 피, 피거형? 마, 말도 안 돼! 살려 줘!"

오랜 혼절에서 깨어난 비접나한과 냉혈살마는 자신이 어떤 처지에 있는지를 깨닫는 즉시 비명을 터뜨렸다.

피거형이라면 자신이 배설한 똥물에 빠져죽는 형벌이다. 세상에 형벌의 종류는 많이 있다. 그 가운데에는 정말 죽지 않을 정도의 고통을 안겨주는 것들도 많이 있다.

하지만 피거형만큼 죄수로 하여금 비참함을 느끼게 하다 죽음에 이르게 하는 형벌은 아마 없을 것이다. 하여 도주하면서 얼마나 가슴 졸이며 긴장했던가!


만일의 경우 발각될 경우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한다 결심하고 또 결심했었다. 그런데 생포되었을 뿐만 아니라 혼절한 사이에 피거형에 처해졌으니 그야말로 절망적이었던 것이다.

같은 순간 이회옥 역시 절망에 빠진 얼굴이었다. 약관도 못 된 나이에 똥물에 빠져 죽는 피거형에 처해졌으니 죽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지독한 악취 속에 시달리며 길어야 반년을 버티면 많이 버틴 것일 것이다. 그리고 결국엔 오물을 들이키고 죽어야 한다. 그래서인지 생에 대한 집착을 잃은 그의 얼굴에는 짙은 죽음의 그림자가 내려 있었다.

* * *

"나쁜 놈! 사람의 진심을 무시하다니… 오늘은 반드시 네 놈을 내 사람으로 만들고야 말 것이야."

백만근 천애화는 나지막이 이를 갈았다. 그런 그녀의 손에는 단약이 놓여 있었다. 그것을 구해온 자의 설명에 의하면 그것은 지상최고의 효능을 지닌 몽혼약( 昏藥)이라 하였다. 하여 잔뜩 기대했건만 뜻하는 바를 이루지 못했기에 이를 간 것이다.

산해각 소속 호위무사인 왕구명을 어찌해보려다 번번이 실패한 것이 벌써 수십 번째이다. 처음엔 완력으로 덮쳤다. 지금껏 그렇게 해서 실패한 경우는 그야말로 극소수였기 때문이었다.

사실 웬만한 사내는 백만근의 힘을 감당할 수 없기에 이 수법에 당하곤 하였다. 왕구명은 그리 큰 체격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굳이 다른 방법을 강구할 필요가 없다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실패였다.

어릴 때부터 청룡갑을 걸치고 키워온 근력을 감당해내기엔 백만근이라 할지라도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나이 열 둘에 청룡갑을 걸친 왕구명은 그것을 꼬박 삼 년 간이나 걸치고 있었다.

만일 체구가 커져서 더 이상 걸칠 수 없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아직도 걸치고 있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왕구명의 근력은 절대 예사롭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천장의 순라 밖에 될 수 없었던 것은 그가 선택한 병장기 때문이었다.

검은 강한 근력을 요구하지 않는다. 만일 중병(重兵)이라 할 수 있는 선장이나 방편산, 유성추 같은 것을 선택했다면 더 높은 직책에 이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엄청난 파괴력을 내기 때문이다. 왕구명은 스스로도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가문의 비전검법인 청룡검법을 버릴 수 없었기에 검을 선택한 것이다.

백만근은 몇 번에 걸쳐 완력으로 덤벼들었지만 번번이 격퇴 당했다. 그리고는 듣기 힘든 치욕적인 이야기까지 들었다.

처음 백만근의 공격을 받은 날 그는 추수옥녀로부터 자초지종을 들을 수 있었다. 왜 자신이 아무런 할 일 없는 산해각의 수문위사가 되어야 했는지를 들은 것이다.

그는 그녀의 고충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백만근의 공격을 받으면서도 몇 번은 그냥 뿌리치기만 했었다. 거듭되는 공격을 받은 그는 은근히 짜증이 났다. 하지만 여전히 발작할 수는 없었다.

안 그랬다가는 추수옥녀를 위한 먹거리를 직접 조달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곳 보타암은 왕구명 같이 하위무사들에겐 무공을 익히기에는 더 없이 좋은 조건을 갖춘 곳이다. 여기저기 널려 있는 것이 무공비급이기 때문이었다.

이회옥이 우연히 발견한 청룡검급 후반부는 내용이 너무 난해하여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상당히 많았다. 하여 팔십일 초 가운데 오십 초까지밖에 익히질 못했다. 그것은 전반부만 익힌 것이나 거의 마찬가지이다.

너무도 답답하여 절대 고수가 있다면 비급을 펼쳐놓고 물어 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그것은 가문의 비전 무공을 공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었다. 하여 고심을 하면서 어떻게든 익혀보려 애를 썼다. 그러나 아무런 진전도 없었다.

왕구명이 터득하지 못한 무리(武理)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것은 누가 설명해 줘서 될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몸에 익혀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곳 보타암에 널려 있는 무공비급들은 그러한 것을 체득하게 하는데 더 없이 좋은 것이었다. 그렇기에 홀로 있을 이회옥이 걱정되었지만 일단은 좀 더 머물기로 마음먹었다.

그렇다면 백만근과 등을 돌려서는 안 되었다. 하여 그녀의 계속된 찝쩍거림에도 불구하고 별 반응을 안 보이다가 결국 한마디를 던졌다.

더러운 창기(娼妓)만도 못한 것이 어디서 감히 천한 짓거리를 하느냐는 것이었다. 처음 이 소리를 들은 백만근의 안색은 더 이상 창백해질 수 없을 만큼 창백해졌다.

명색이 천하에 산재한 무천장 가운데 가장 성세가 큰 금릉 무천장 장주의 금지옥엽이었다. 그러니 언제 그런 소리를 들어 보았겠는가!

그렇기에 몰래 숨어서 보던 여인들은 언제 발작할지 몰라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백만근은 화를 내지 않았다. 아무나 꺾을 수 있는 들판에 있는 꽃은 별로 거들떠보지 않는 법이다. 하지만 손에 닿지 않는 절벽 위에 핀 꽃은 다르다.

같은 꽃이라 할지라도 왠지 아름다워 보이는 법이다. 하여 사람들은 그것을 따기 위하여 목숨을 걸기까지 한다. 백만근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왕구명은 절벽 위에 핀 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유혹을 완강히 거절하던 사내들도 그녀가 금릉 무천장주의 일점혈육이라는 사실을 알게되면 즉각 태도를 바꾸곤 하였다.

혹시 차기 무천장주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왕구명은 달랐다. 백만근의 신분을 알면서도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내들처럼 음주가무를 즐기는 대신 한결같은 자세로 무공 연마에 몰두하는 모습이 너무도 보기 좋았다.

그렇기에 욕보다도 심한 소리를 들었지만 화를 내기는커녕 눈빛만 빛냈다. 언젠가는 반드시 그를 차지하고야 말겠다는 굳은 결심을 한 것이다.

이후 완력으로는 도저히 뜻을 이룰 수 없다 판단한 백만근이 다음에 사용한 것은 최음약(催淫藥)이었다. 왕구명이 먹고 마시는 물과 음식에 그것을 타서 뜻을 이루려한 것이다. 그러나 그 역시 실패하였다.

최음약은 대개가 달착지근한 맛과 향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수법이 있을 것이라 예상한 왕구명은 먹고 마시기 전에 반드시 맛을 보았다. 그래서 조금만 달착지근하면 모두 버렸다. 하여 번번이 실패한 것이다.

지니고 있던 모든 최음약을 소모한 백만근은 점점 더 애가 탔다. 그런 그녀에게 있어 왕구명은 점점 더 큰 존재가 되어 갔다. 그러는 사이 백만근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변해갔다.

왕구명이 온 이후로는 어떤 사내와도 교접을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전에는 사흘만 독수공방해도 몸살이 날 것 같다며 사내들을 덮치던 그녀였다. 그런데 그것을 모두 끊은 것이다. 그녀의 흉중에 왕구명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같은 기간 동안 추수옥녀 여옥혜의 무공은 눈부신 발전을 보이고 있었다.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오로지 무공 연마에만 몰두한 그녀는 운 좋게도 보타신니의 눈에 들게 되었다.

다른 여인들은 무공교두들에게 무공을 전수 받았지만 추수옥녀만은 보타신니에게서 직접 무공을 전수 받게 된 것이다. 무림의 기인인 보타신니의 직전제자가 된 셈이다. 그래서 다른 여인들이 따를 수 없을 만큼 눈부신 발전을 보게 된 것이다.

그렇기에 삼 년 동안 무공 연마를 한 뒤 관문에 도전할 생각이었으나 이 년 반이 되면 도전할 생각을 품고 있었다.

아무튼 이날 백만근은 지상최고의 몽혼약을 가지고도 목적을 달성하는데 실패하였다. 무색, 무미, 무취한 것이기에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하필이면 왕구명이 심한 배탈을 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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