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근은 바람막이가 되어주지 못합니다

등록 2003.03.04 18:40수정 2003.07.03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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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자 참꽃 피겄네."
3월들어 갑자기 덥다는 느낌이 들만큼 날씨가 따뜻했습니다. 19층 바닥 철근을 깔다가 환하게 꽃피어 버린 앞산 매화밭을 잠깐 내려다보는데 진달래 피겠다는 생각이 불쑥 들어 내뱉은 말입니다.


옆에서 철근을 엮던 선숙이 누님이 말을 받습니다.
"요러다가 뜬금 없이 눈오고 비오는 것이 이른봄 날씬디 어찌개 믿는당가, 옛날 어른들이 서방좆허고 하느님은 믿지 마라고 했다네.
무담시 날궂이 허들 마소."

a 철근공

철근공 ⓒ 김해화

말이 씨가 되었는지 밤새 비가 내리다가 개이더니 아침부터 바람부는 것이 장난이 아닙니다. 철근을 19층까지 달아올려야 할 타워크레인 작업이 바람이 많이 불어 아무래도 힘들 것 같습니다. 비가 와도, 눈이 와도, 바람 불어도 공치는 날, 그러니 하느님을 제일 큰 오야지라고 부르지요. 아무래도 일이 틀린 것 같아 불안한 마음을 안고 일을 나갔는데 다행이 잠깐 바람 잔 틈에 철근을 올리고 일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바닥 일은 바람이 불어도 상관 없지만, 벽 철근을 넣는 일은 바람이 불면 일하기가 힘듭니다. 더군다나 사람이 몸을 가누기 힘들정도로 바람이 사나운날은 철근도 그만큼 바람을 타니까요. 난간에서 일하는 것이 위험하기도 해서 왠만하면 일을 중단하고 싶지만 철근을 세워야 거푸집을 붙일 수 있는 목수들이 놀고 있으니 억지로 일을 밀어붙입니다.

a 철근

철근 ⓒ 김해화

계단 난간에서 철근을 세우던 병태 형이 갑자기 몰아치는 바람에 중심을 잃고 몇 걸음 뒤로 휘청 물러섭니다. 철근일 20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철근을 세우고 엮었지만 온몸 마디마디에 골병으로 박힌 철근은 단 한번도 우리들에게 바람막이가 되어주지 못합니다.
흔들리는 철근 너머로 이렇게 바람 사나운데도 눈부시게 희디 흰 꽃을 피운 매화밭이 보입니다. 지난 해 아파트가 낮았을 때는 바람에 매화향이 묻어오고는 했는데 아파트가 높아지니 매화향은 여기까지 올라오지 못합니다.

a 머언 매실밭

머언 매실밭 ⓒ 김해화

저렇게 세상에는 봄이 왔군요. 낮은데서도 살아봤다는 새 대통령이 들어섰으니 세상에 오는 봄도 조금은 더 낮은곳까지 찾아오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우리들이 서있는 19층 바닥은 도대체 얼마나 낮은 곳입니까. 비정규직도 챙긴다는데, 우리 공사장 노동자들도 비정규직 아닌가요? 언제까지 아침 7시 작업시작, 저녁 6시 작업종료의 11시간 노동이 가혹하게 계속되어야 합니까.

비오는 날 공치는 날, 눈오는 날 공치는 날, 바람부는 날 공치는 날, 하늘만 쳐다보며 살고 공일날 있는 세상의 대소사에도 망설이다가 하루 일당 때문에 쓸쓸하게 새벽길을 달려 일터로 가면서 스스로 사람노릇도 못하는 우리는 사람도 아니라고 짓밟으며 입술을 깨물어야 합니까.


10년 20년 경력이 쌓일수록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라 비참하고 억울하기만 한 것입니까. 싫으면 그만 두라구요, 그러면 우리는 뭐 먹고 살지요?

a 아이

아이 ⓒ 김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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