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을 알면 교육이 보입니다

첫 단추를 잘못 낀 교사의 선택

등록 2003.03.10 00:59수정 2003.03.10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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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단합대회가 있던 날

단합대회가 있던 날 ⓒ 안준철

학교에서는 3월 한 달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학기초에 아이들을 꽉 잡았다가 아이들의 상태를 가늠해가면서 조금씩 풀어주면 학급운영이 수월하다는 말도 자주 듣습니다. 처음에는 이런 말들을 귀담아 듣지 않았지만 교직경력이 15년을 넘어서면서 '나도 한번 그래볼까?'하는 유혹을 느끼기도 합니다. 아이들에게 어느 만큼 거리를 두는 것도 교사와 학생 서로를 위해서 유익할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하지만 올해도 저는 첫 단추를 잘못(?) 끼고 말았습니다. 첫 날 담임 반에 들어가 아이들과 눈을 맞추고 출석을 부르다 보니 그런 생각이 눈 녹듯이 사라지고 만 것입니다. 거기에 해마다 해온 습관을 좇아 "여러분에게 친절한 담임 선생님이 되겠습니다"라고 말하며 인사까지 꾸벅해버리고 나니 저는 아이들 앞에서 스스로 무장해제를 한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다행히 그런 와중에도 이런 말을 슬쩍 흘리기는 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선생님을 더 많이 사랑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 교실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선생님이 아니라 여러분입니다. 학교의 주인도 교사가 아니라 학생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사랑의 주인이 되어 선생님을 더 많이 사랑해주셨으면 합니다."

요즘 아이들에게 이런 촌스러운(?) 말이 과연 먹혀 들어갈까 하고 의구심을 갖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정말 아이들을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아이들은 진실에 약하고 또한 사랑에 약합니다. 열이면 아홉이 그렇습니다.

문제는 한 아이의 배신입니다. 그것이 교사의 가슴에 상처로 남아 아홉 아이의 진실을 지워버리는 지우개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교사의 편견으로 진실이 지워진 아이들은 억울합니다. 현명한 교사라면 그런 엉터리 지우개를 사용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무튼 그런 말을 한 뒤에 저는 아이들에게 '나의 모습 찾기'라는 제목이 적힌 종이를 한 장씩 나누어주었습니다. 무장해제가 된 교사로서 아이들을 방치하지 않고 제대로 담임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아이들의 속내를 손바닥 보듯이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다섯 개의 설문이 적힌 종이를 나누어 준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내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 여섯 가지(솔직하게)


이것이 첫 번째 설문입니다. 주어진 여섯 칸의 공간에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을 써넣는 것입니다. 소중한 것을 하나만 쓰는 것도 아니고 여섯 개씩이나 쓰는 것이어서 큰 고민이 없는 표정입니다. 그러나 다음 말에 아이들의 표정이 조금씩 달라집니다.

"그 여섯 가지 중에서 덜 소중한 것 하나를 지워 보세요."


그리고 잠시 시간을 기다렸다가 다시 하나를 더 지우라고 합니다. 아이들의 표정이 심각해지기 시작합니다. 나머지 네 가지 중에서 하나만 선택하라고 마지막 주문을 하면 이곳저곳에서 한숨소리가 들리기도 합니다. 한 가지를 선택한다는 것은 나머지 세 가지를 다 버린다는 뜻이기도 하기에 아이들의 표정 속에는 아쉬움을 넘어서서 어떤 비장함까지 느껴집니다.

5분 정도 시간을 주었다가 선택이 끝난 듯 싶으면 지금까지 선택의 과정에서 느꼈던 솔직한 심정을 그대로 글로 옮겨보라고 합니다. 의도하지 않는 글쓰기 훈련과 더불어 자기 다짐의 시간이 되어버린 셈이지만 아이들은 그것까지 눈치채지는 못합니다. 다음은 아이들이 쓴 글들입니다.

a 나의 모습 찾기

나의 모습 찾기 ⓒ 안준철

"선생님께서 두 가지를 지우라고 하셨을 때 그 어떤 것도 포기할 수 없었지만 나머지 4개보다 덜 소중한 TV와 만화책을 지웠다. 마지막으로 4개 중 한 개만 선택하라고 하셨을 때 나는 많이 망설였지만 그래도 사랑하는 가족을 선택했다. 그 이유는 내가 이 세상에 없을 때 가정 슬퍼하고 아파할 사람이 내 가족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나를 가장 사랑해주고 아껴줄 사람도 내 가족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도 내 가족에게 늘 힘이 되어주고 아껴주고 사랑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 자신, 이 하나를 선택할 때 솔직히 많이 망설였다. 막상 적고 보니 조금 쑥스럽다. 날 내 자신을 위해 올 한 해는 내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과 나 자신이 모두 행복해졌으면... 하는 작은 소망이 있다."

"처음에 지울 것을 생각했을 때 돈이 있으면 집이 없어도 된다고 생각했다. 두 번째 지울 것을 생각했을 때 돈이 있으니까 밥을 사 먹을 수 있기 때문에 밥을 지웠다. 마지막 소중히 생각하는 것을 고를 때는 가족과 나의 그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 물론 가족도 소중하지만 내 자신이 소중해야 다른 것들이 소중해 보일 수 있기 때문에 내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마지막에 가장 소중한 것을 고르지 못하겠다. 가족이나 친구...나 한테는 너무나 소중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가족, 친구...가족에겐 언제나 소중한 딸. 말썽 부리지 않는 딸이 되겠고 친구들에겐 좋은 친구가 되겠다."

"쓸 때는 막상 무엇을 써야할지...고민도 됐지만 남자 친구한테는 조금 미안하지만.. 헤헷..저에게는 제 자신이 가장 소중하구요, 다른 것도 소중하지만 젤 먼저 제 자신을 가꾸고 다듬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학년 때는 제 꿈을 위해서 학교도 열심히 다니고 노력하겠습니다."

"쓰는 것도 어려웠는데...지우라니? 무척 고민이 되었다. 역시 돈이 최고다! 이런 것들은 지워주면 돈만 있다면 다 해결되니깐..."


최종적으로 돈을 선택한 아이는 한 명뿐이었습니다. 누구일까 궁금한 생각이 들어 얼굴을 확인해보니 예쁘장하고 귀엽게 생긴 아이입니다. 그가 선택한 돈이 그가 지웠거나 선택하지 않는 '컴퓨터' '선물 받은 것들' '핸드폰' 'H.O.T에 관한 모든 것 CD 잡지'들은 살 수 있겠지만 가족까지 돈으로 살 수 있는지 한 번 물어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정답을 강요하는 질문이 될 것 같아서 그만두었습니다. 다만, 언젠가 기회가 되면 그 아이뿐만 아니라 반 전체 아이들에게 이 세상에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귀한 것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얘기해줄 생각입니다. 그것이 교육이고 교사가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집단상담을 그렇게 끝내고 다음날부터 토요일 오전까지 닷새 동안 개인면담에 들어갔습니다. 학기초가 되면 이런 저런 잡무들이 많아 첫 주에 전체 학생 면담을 끝낸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일이지만 행정적인 업무를 잠시 뒤로 미루더라도 아이들과의 면담시간을 먼저 갖는 것은 무장해제가 된 교사로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합니다.

그런 이유 말고라도 학비지원을 해줄 학생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아이들의 가정사정을 소상하게 알아야만 합니다. 이런 일을 너무 급하게 처리하다 보면 아이들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기에 미리 자연스럽게 아이들의 집안 사정을 알아두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미 상처를 받아버린 아이들의 닫혀진 마음을 여는 일입니다. 물론 그 열쇠는 교사의 신뢰와 사랑밖에는 없습니다.

올해는 유난히도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편모 슬하에서 생활하는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열 손가락이 거의 다 채워질 정도입니다. 처음 글로 써서 제출한 자료에는 이런 사실을 숨겼다가 대화 도중에 사실을 고백한 아이도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계시지 않는다는 것이 여학생에게는 큰 상실이요, 마음의 깊은 그늘로 느껴져 마음이 무척 아팠습니다.

아이들이 저에게 털어놓은 아픈 얘기들을 저는 교무수첩에 빼곡이 적기도 하고, 어떤 것은 제 가슴에 적어놓기도 했습니다. 그 내밀한 기록들을 컴퓨터에 올리거나 하는 일은 절대 안 하려고 합니다. 그 첫째 이유는 그 아이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도 저는 학생과 상담한 구체적인 내용을 컴퓨터에 올린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장학검열에 대비하여 어쩔 수 없이 올려놓을 때도 컴퓨터 프로그램에 정해진 형식대로 이렇게 적어놓았을 뿐입니다.

2002년 3월 21일 13:00 교무실 비공개 가정환경에 대한 상담

수업연구를 하든지 아이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실질적인 상담을 해야할 시간에 컴퓨터에 앉아 아무 내용도 없는,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는 순간이 저에게는 교사로서 가장 괴로운 시간입니다.

학년 부장 선생님이나 전산 담당자의 독촉도 있고, 그분들의 입장을 생각해서 자판을 열심히 두드리고 있다가도 무슨 짓인가 싶어 울컥 화가 치밀기도 합니다. 그때마다 기록을 거부할까 하는 생각도 여러 번 해보았지만 저 혼자만 유난을 떠는 것 같기도 하여 마음을 접곤 했던 것입니다.

아이들을 보면 교육이 보입니다. 요즘 NEIS(교육행정정보시스템) 문제로 교육계가 시끄러운데 그 해법을 찾는 것도 제가 보기에는 아주 간단합니다. NEIS가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는가? 그것을 따지면 금방 풀릴 일입니다.

가령, 담임 교사가 아이들로부터 들은 내밀한 얘기(혹은 정보)들을 교무수첩이나 가슴에 담아두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다시 컴퓨터에 올린다면 학생들에게 무슨 유익이 있는가?

만약에 있다면 그것이 안전장치의 미비로 인해 정보가 유출될 수도 있는 위험 상황을 무릅쓰고도 감행해야할 만큼 대단한 것인가?

현장교사의 경험을 바탕으로 말씀드린다면 학생들의 상담정보를 컴퓨터에 올림으로써 얻을 수 있는 유익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양호실에서 치료를 받은 학생들의 병력기록도 마찬가지입니다. 인터넷 강국이라고 하지만 보안 시스템에서는 세계의 웃음거리가 되고 있는 우리 나라의 상황을 고려해볼 때 유익은커녕 학생들에게 엄청난 불이익과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겨줄 수도 있습니다.

새로 임명된 교육부총리께서 NEIS의 문제점을 공감하시고 중단, 유보의사를 피력하신 것은 정말 환영할 만한 일입니다. 기왕이면 교육개방도 막아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교육이 공공서비스가 되지 않고 외국자본이 유입되는 시장의 영역으로 포섭된다면 종국에 가서는 공교육은 무너지고 가정 형편이 어려운 우리 아이들은 인생의 출발점에서부터 낙오자가 되고 말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을 충분히 교육시키지 못한 무능한 부모를 원망하며 가족이나 자신의 생명보다도 돈을 더 중히 여기는 황금만능의 풍조가 팽배해질 것은 불을 보듯이 뻔한 일입니다.

만약 그런 불행한 일이 정말 생긴다면 저는 가족보다는 돈을 선택한 그 아이에게 다가가 돈으로 살 수 없는 인간의 아름다운 덕목들에 대하여 얘기해주는 교사가 되는 것을 단념해야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교사에게 그것보다 더 불행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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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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