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그들은 승동교회로 갔다

[문화유산답사 57 ] 서울 인사동 ‘승동교회’를 찾아

등록 2003.03.14 12:56수정 2003.03.17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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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 인사동. 조선 문화재가 일본으로 반출되는‘집하장’구실을 했던 과거를 아는지 모르는지 흔히 한국의 전통문화를 보려면 인사동으로 가란다. 요즘에는 보기 힘든 물품들을 모아 놓은 골동품점과 화방, 미술관 등이 골목 구석구석에 산재해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a 서울 종로구 인사동 골목에 위치한 승동교회. 이 교회가 3.1운동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이는 몇 되지 않는다. ‘3․1운동 유적지’이자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30호다.

서울 종로구 인사동 골목에 위치한 승동교회. 이 교회가 3.1운동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이는 몇 되지 않는다. ‘3․1운동 유적지’이자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30호다. ⓒ 권기봉

인사동 ○○갤러리에서 ○○○의 개인전을 관람한 후 고급스런 한정식집에서 저녁 먹고 분위기 좋은 찻집이나 요즘 들어 늘어나는 카페 체인에서 차 한 잔하고, 그냥 집으로 돌아가기 뭣해 인도풍 액세서리 하나 사며 나름대로 한국의‘전통문화’를 체험했다고 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도대체 인사동에서 무엇을 보고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한국의‘전통문화’를 보겠다고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인사동을 찾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인사동에도 어김없이 거대 자본의 손길이 뻗치기 시작했고, 내용보다는 외양과 형식이 앞서는 것이 대세인지 나름의 대형화·고급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추세다. 그런데 한국의‘전통문화’와 관련한 것들은 윤기가 잘잘 흐르는 반면, 정말로 한국인의 의식 근저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던 것들은 뒤로 밀려난 채 경시되고 있는 듯 하다.

이를테면 탑골공원이 지척인 인사동 골목은 3.1운동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데,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문을 낭독했던 곳이자 친일파 대표주자 이완용의 별장이 있었던 태화관 터나 3.1운동에 있어 큰 역할을 했던 천도교의 중앙대교당, 또 개화기를 돌아보는 데 있어 중요한 인물 중 하나인 박영효의 집터 등은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3.1운동, 학생들도 있었다

a 1919년 2월 20일 승동교회 청년면려회장으로 있던 연희전문 출신 김원벽(金元壁)을 비롯한 학생대표들은 1층 기도실에 모여 독립만세운동에 대한 논의, 즉 제1회 학생지도자대회를 열었다. 이후 종교단체를 위시한 민족대표들과 운동을 일원화하게 된다.

1919년 2월 20일 승동교회 청년면려회장으로 있던 연희전문 출신 김원벽(金元壁)을 비롯한 학생대표들은 1층 기도실에 모여 독립만세운동에 대한 논의, 즉 제1회 학생지도자대회를 열었다. 이후 종교단체를 위시한 민족대표들과 운동을 일원화하게 된다. ⓒ 권기봉

승동교회(勝洞敎會)도 마찬가지다. 아마 이 이름을 처음 들어보는 사람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중·고등학교 역사시간을 통해 3.1운동과 관련, 일제의 무단통치나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등 배경이나 의미, 결과 등은 간략하게나마 배운 바 있지만 그 과정에 대해서는 거의 들어본 바가 없으니 말이다. 특히 3.1운동을 조직했던 이들로서 민족대표 33인은 알아도 다른 한 축이었던 학생들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알고 있는 이가 거의 없는 실정이다.

33인의 민족대표(실제로 태화관에 모인 사람은 29명)라는 사람들은 독립선언문 낭독 직후 자진해 종로경찰서로 연행되어 가는 등 힘없게 무너져 버렸지만 사실 3.1운동은 매우 착실하게 준비되어온 항쟁이었다.


이를테면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망한 뒤 1918년 1월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파리강화회의에서 14개조로 이루어진 전후(戰後)처리 원칙의 하나로‘각 민족의 운명은 그 민족 스스로 결정한다’는 민족자결주의를 제창, 만약 조선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난다면 미국 등 열강이 지지할 것이라는 (나중에 오판이었음이 드러났지만) 판단을 내리게 된다.

이는 일제의 무단통치가 한창 주가를 올리던 1919년 1월 22일 갑자기 승하한 황제 고종의 사인(死因)으로 일제에 의한 독살설이 퍼지는 것과 함께 바야흐로 국제 분위기와 국내의 일제에 대한 반감이 최고조에 이르렀다고 파악했던 것이다.


이에 손병희(孫秉熙)와 오세창(吳世昌), 권동진(權東鎭), 최린(崔麟) 등은 1919년 2월초부터 독립선언에 대한 검토 작업에 착수, 기독교 계열 16명과 천도교 15명, 한용운(韓龍雲)과 백용성(白龍城) 등의 불교계 2명 등 모두 33인의 민족대표를 구성하는 작업까지 끝마쳤다. 그러나 앞서 말했다시피 민족대표들은 독립선언문을 낭독하자마자 체포되어 수감되었으니 운동을 이끌어나갈 지도자 그룹이 없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애초 운동을 계획할 때부터 함께 참여했고, 이후 실질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을 이끌어갔던 학생들이 있었기에 3.1운동의 열기가 근 한 달간이나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실제로 3.1운동은 기독교와 천도교, 불교 등의 종교단체와 학생들이 개별적으로 추진해오던 상황이었다. 이후 다른 단체들에서도 비슷한 운동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 알려졌고, 이를 일원화한 결과 나온 것이 1919년 3월 1일의 독립만세운동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학생들은 어떤 준비를 해오고 있었을까?

승동교회를 아시나요?

a 올해 110주년을 기념해 재건축을 계획하고 있다는 승동교회. 건물이 워낙 낡아 복원 공사를 할 수밖에 없다고는 하지만, 이후 과연 어떤 모습을 할지 염려가 된다. 공사가 시작되면 장막에 가려져 더 이상 방문객들은 우뚝 서서 맞아주지는 못할 것이다. 그 전에 한번쯤 승동교회에 들러보자.

올해 110주년을 기념해 재건축을 계획하고 있다는 승동교회. 건물이 워낙 낡아 복원 공사를 할 수밖에 없다고는 하지만, 이후 과연 어떤 모습을 할지 염려가 된다. 공사가 시작되면 장막에 가려져 더 이상 방문객들은 우뚝 서서 맞아주지는 못할 것이다. 그 전에 한번쯤 승동교회에 들러보자. ⓒ 권기봉

1919년 2월 20일 승동교회의 청년면려회장으로 있던 김원벽(金元壁)을 비롯한 학생대표들이 1층 기도실에 모여 독립만세운동에 대한 논의, 이른바 제1회 학생지도자대회를 열었던 곳이 바로 이번 답사지인 승동교회다. 그런데 당시 종교단체를 위시한 민족대표들을 중심으로 독립만세운동의 단일화 논의가 한창이던 때라 학생지도자대회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남달랐다.

이에 학생대표들은 전문학교를 비롯한 각 학교의 학생들을 모두 아우르기로 합의하고 독립운동의 선봉에 설 것을 결의했지만, 사흘 뒤인 23일 다시 승동교회에 모여 학생대표들이 만들었던 독립선언문을 태워 없애버리고 범민족적인 독립만세운동에 합세할 것을 결의한다.

이에 호응이라도 하듯 당시 기독교 중심의 청년학생단을 만들어 독립운동을 일으키려던 중앙기독교청년회 간사 박희도(朴熙道)는 26일경 보성전문학교의 주익(朱翼)과 강기덕(康基德), 연희전문학교의 김원벽, 세브란스의전의 이용설(李容卨) 등 8명의 학생대표를 서울 관수동의 대관원(大觀園)에서 만나 천도교와 기독교 단체들과 행동을 통일하자고 제의, 승낙을 받았다.

대관원에 모였던 학생대표들은 즉각 자신의 학교로 돌아가 학생들을 조직하기 시작했고 이어 기독교계와 천도교, 불교계가 함께 행동하기로 합의, 3.1운동의 주체가 단일화됨으로써 독립만세운동 계획은 급물살을 타게 된다. 이로써 종교단체뿐만 아니라 학생들까지 아우르는 대규모 운동의 조직이 어느 정도 완성된 셈이다.

a 그런데 왜 학생대표들은 굳이 승동교회로 갔을까? 일제의 무단통치로 인해 각종 사회단체에 대한 압박이 심해진 가운데 비교적 종교 활동은 자유로웠고, 김원벽 등이 승동교회 교인이었기에 낙점됐던 것은 아닐까? 특히 승동교회는 3.1운동의 시발지인 탑골공원에서 걸어서 채 2~3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에 있다.

그런데 왜 학생대표들은 굳이 승동교회로 갔을까? 일제의 무단통치로 인해 각종 사회단체에 대한 압박이 심해진 가운데 비교적 종교 활동은 자유로웠고, 김원벽 등이 승동교회 교인이었기에 낙점됐던 것은 아닐까? 특히 승동교회는 3.1운동의 시발지인 탑골공원에서 걸어서 채 2~3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에 있다. ⓒ 권기봉

이어 현 조계사 뒤편에 있던 보성사(普成社)에서 인쇄된 독립선언문이 거사 하루 전인 2월 28일 아침부터 전국 각지로 우송되기 시작했는데, 이 중 약 1500장은 승동교회로 우송되어 승동교회 청년면려회장으로 있던 김원벽 등의 학생대표들을 중심으로 밤을 틈타 서울 각처로 배포되었다. 특히 김원벽은 독립만세운동이 시작된 지 나흘 뒤인 3월 5일 서울역과 남대문 일대에서 인력거에 올라타고 대형 태극기를 휘날리는 등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일경(日警)의 칼에 어깨를 다치고 체포, 3년 반정도 옥고를 치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그들은 승동교회로 갔다

김원벽을 비롯한 학생대표들의 아지트 역할을 했던 승동교회. 1912년 현 위치에 지금의 건물이 세워진 뒤 몇 차례의 증축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다. 이미 지난 1993년‘3.1운동 유적지’로 지정된 데 이어 2001년에는 본당 건물이 서울시로부터 유형문화재 제130호로 지정되기도 했다. 기나긴 역사뿐만 아니라 그 특별한 의미 때문인지 여느 교회당과는 느낌이 사뭇 다르다.

그런데 왜 학생대표들은 굳이 승동교회로 갔을까? 아무래도 일제의 무단통치가 시작된 이후 각종 사회단체들에 대한 압박이 심해지면서 이들 단체의 사무실이나 학교 등에서 모이기는 힘들었던 것이 아닐까? 물론 학교는 그나마 자유로웠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일본인 교사도 있고 여러 학교의 학생대표들이 한 학교로 모이는 것은 자칫 위험을 자초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예배를 목적으로 정기적으로 모임을 가질 수 있던 교회 등의 종교시설이 제격이 아니었을까 상상해 본다. 게다가 승동교회는 애초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기로 했던 탑골공원에서 채 2~3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에 있지 않은가!

a 승동교회의 오른쪽 벽면 모습으로, 붉은색 벽돌이 상당히 인상적이다. 당시 근대 건축물을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을 주고 있다.

승동교회의 오른쪽 벽면 모습으로, 붉은색 벽돌이 상당히 인상적이다. 당시 근대 건축물을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을 주고 있다. ⓒ 권기봉

물론 승동교회 건물 그 자체만으로는 역사가 오래되었다는 것뿐 다른 어떤 특별한 의미를 찾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나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고 했던가? 김원벽 등의 학생대표들이 독립만세운동에 대한 논의를 위해 찾았던 곳이 승동교회였기에 그 중요성을 새삼 강조해도 모자라지 않는 것이다. 즉 승동교회의 존재를 확인하며 당시의 독립만세운동과 민중의 저항정신을 떠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올해 1백10주년을 기념해 재건축을 계획하고 있다는 승동교회. 건물이 워낙 낡아 복원 공사를 할 수밖에 없다고는 하지만, 이후 과연 어떤 모습을 할지 염려가 되지 않을 수 없다. 공사가 시작되면 장막에 가려져 더 이상 방문객들은 우뚝 서서 맞아주지는 못할 것이다.

비싼 한정식과 국적불명의 차를 즐기고 피마골에 들러 막걸리 한잔 걸치는 것이 꼭 한국의 ‘전통문화’를 체험하는 것은 아닐 진저, 만약 인사동에 갈 일이 있다면 한번쯤 여유를 갖고 승동교회에 들러보자.

a 인사동에는 갤러리와 찻집, 한정식집만 있는 것이 아니다. 곳곳에 역사의 숨결이 느껴지는 진짜 보물들이 숨겨져 있으니 앞으로는 ‘뒷골목’에도 한번 시선을 주는 것이 어떨까?

인사동에는 갤러리와 찻집, 한정식집만 있는 것이 아니다. 곳곳에 역사의 숨결이 느껴지는 진짜 보물들이 숨겨져 있으니 앞으로는 ‘뒷골목’에도 한번 시선을 주는 것이 어떨까? ⓒ 권기봉


승동교회 찾아가는 길

ⓒ승동교회

종로에는 근현대사 관련 유적들이 생각보다 많이 남아 있고, 실물은 없더라도 의미 있는 장소들이 생각보다 많다. 그저 인사동에서 비싼 차 마시고 피마골에서 술 마시는 곳이 종로는 아니다.

당연한(?) 이야기는 그만하고 어서 승동교회를 찾아가보자. 먼저 지하철 1호선 종각역이나 종로3가역에서 내린다. 어느 역에서 내리든 간에 서로 가까워지는 방향으로 걷자. 그러면 이내 탑골공원이 보일 텐데, 탑골공원 정문인 삼일문 왼쪽으로 도로가 나 있고 그 위에 횡단보도가 있다.

횡단보도를 건너면 금강제화 간판이 붙어 있는 상점이 보인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조금만 가면 이내 왼쪽으로 남인사광장이 열리면서 인사동 입구에 닿게 된다. 이제 다 온 셈이나 마찬가지다.

인사동 골목으로 들어가자마자 오른쪽으로 대일빌딩이 보이는데, 길을 중심으로 그 맞은편에 작은 골목이 하나 보인다. 그 골목 양쪽으로 노암갤러리와 한국관광명품점이 있으니 찾기는 쉬울 것이다. 이 골목으로 따라 들어가면 3.1운동 당시 학생들이 모여 의논을 했던 승동교회가 나온다. 전화: 02)732-2341~3
/ 권기봉

덧붙이는 글 | 권기봉 기자의 홈페이지는 www.freechal.com/finlandia 입니다.

덧붙이는 글 권기봉 기자의 홈페이지는 www.freechal.com/finlandia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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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기억 저편에 존재하는 근현대 문화유산을 찾아 발걸음을 떼고 있습니다. 저서로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알마, 2008), <다시, 서울을 걷다>(알마, 2012), <권기봉의 도시산책>(알마, 2015)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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