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러그를 뽑는 삶

등록 2003.03.19 20:53수정 2003.03.20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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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삼 년 전에 수동은 어떠했을까.
그것도 전기도 들어가지 않고, 차도 제대로 들어가기 어려운 산고개를 넘고 넘어 들어간 골짜기, 가파른 경사지에서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a 농장 가는 길

농장 가는 길 ⓒ 이형덕


그리고 나찰 같은 가시덤불을 걷어내고, 돌을 골라내고, 거기에 주목이며 소나무 묘목과 복숭아와 포도 같은 과일나무를 심고, 거름을 퍼 나르던 마음은 어떠했을까.

모르긴 몰라도 그것이 돈을 위해서라면 그 십여 년의 고생을 감당하기 어려웠으리라. 그것은 마음에 욕심을 채운 이로서는 감당키 어려운 인고의 시간이었으리라.

교단에서 아이들을 가르치시다가 그만두고 아이들 대신 나무를 기르게 되었지만, 김형택님의 삶은 그 어떤 것이든 욕심이 아니라 즐거움에서 비롯된 것임에는 어김없으리라.

a 사람의 정성만큼 강한 것이 있을까

사람의 정성만큼 강한 것이 있을까 ⓒ 이형덕

얼마전에 전화를 받았다. 수동에 사신다면서 수사모 모임에 관심을 가지셨다. 조금 늦어지긴 했지만 수사모 송년 모임에 참석하신 김형택님은 생각보다 연세가 많으셨다. 그러나 모임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나는 사람의 나이란 것이 실로 주관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아름드리 간벌목들을 비탈진 산자락에서 끌어다 그것을 활용하여 귀틀집을 몸소 지으신 이야기부터 일부러 전기없이 사는 생활을 하고 계시다는 말에, 집 뒤편 산자락에서 간벌목 몇 개 옮겨보느라 땀깨나 흘린 나로서는 그것이 얼마나 만만찮은 일이며, 또 전기없는 삶을 막연히 꿈꿔 오던 내게는 그분이 바로 내 삶의 나침반처럼 느껴졌다.


모임이 끝나고, 대강 들은 대로 그분의 농장을 찾아가 보았다. 분당에 살면서 이곳을 오가며 농장 일을 돌보왔다기에 그저 취미생활 삼아 주말농장 격으로 텃밭이나 일구었겠거니 하고 찾아간 그곳은, 우선 길 찾기가 만만찮다는 데서부터 예상을 엇나가게 했다.

몇 차례 헛걸음을 한 끝에야 겨우 길을 바로 잡았는데, 이번에는 차가 들어가기 어려운 미끄러운 산길이었다. 비포장길은 가파른 경사에다가 드문드문 통나무를 깔아 겨우 물골을 지나가게 되어 있었다.


a 돌밭에 일군 포도밭이 십여년이 지나자 제법 달콤한 결실을 맺는다고 한다

돌밭에 일군 포도밭이 십여년이 지나자 제법 달콤한 결실을 맺는다고 한다 ⓒ 이형덕

몇 구비쯤 돌고, 오른 끝에 드디어 산길과 농장길을 알리는 이정표 같은 게 보였다. 거기서 산모롱이를 돌아서니 정말 한세상 잊고 지내기 좋은 오목한 무릉도원이 내다보였다.

함께 간 장인, 장모는 연신 이런 외진 곳에서 어떻게 사냐고 혀를 찼지만 내게는 어느 곳보다 마음이 편해지고 정감이 가는 길이었다. 봄이 되어 뻐꾸기 울음 소리라도 호젓해지면, 정말 이 모롱이를 돌아서는 순간 세상의 모든 것을 잊어도 좋을 법했다. 아마 이곳에 자리잡은 분도 이런 즐거움에 이끌려 왔을 것이다.

a 향기로운 해우소

향기로운 해우소 ⓒ 이형덕

농장에 이르니 우선 여기저기 정성스레 심겨진 관상수들이 주인이 그동안 들여온 공덕을 눈에 보이게 했다. 제법 튼실하게 자란 주목이며, 향나무, 복숭아나무들이 여기저기 이끼낀 바위들 틈에서 잘 어울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한참만에야 언덕바지에 자리잡은 산막 비슷한 것이 보였다. 조금 규모가 작다 싶었는데 올라가 보니, 그것은 집이 아니라 측간이었다. 지붕에 너와를 이고, 잣나무를 켜켜이 쌓아 제대로 지은 것이었는데, 가만히 앉아서 잣나무 향기를 맡는 정취도 아름다운 일이리라.

a 간벌목을 끌어다 직접 지은 귀틀집

간벌목을 끌어다 직접 지은 귀틀집 ⓒ 이형덕


a 귀틀집의 내부 모습

귀틀집의 내부 모습 ⓒ 이형덕

귀틀은 구들을 들였는데, 구들돌은 인근에서 주워다 깔았다고 한다. 귀틀집에 쓰인 나무들은 모두 아름드리 간벌한 잣나무들인데, 200여 개를 자동차에 줄로 달아 끌고 왔다 한다. 그것이 얼마나 힘들고, 오랜 시간과 인내심을 요구하는 일인지 생각하니 감탄이 나올 뿐이었다.

나무는 서리가 내리기 전에 하여야 껍질이 잘 벗겨진다고 했는데, 갈고리로 찍어 그것을 산길로 끌어내리고, 다시 그것을 도르래로 달아 올려 차에 매단 후 끌고 온 것이 이백 여개.

집주인은 무엇보다 산간에 버려져 제풀에 썩거나, 시골집 아궁이로 들어가고 마는 간벌목을 활용하는 방안을 널리 소개하고 싶다고 한다. 집을 지을 때는 집짓는 데 관심있는 분들의 도움을 받아 품앗이 식으로 하였고, 일부는 목수를 사서 함께 지었다 했다.


a 겨우내 뜨끈뜨끈한 온돌방을 덥혀 주는 아궁이가 두 개 있다

겨우내 뜨끈뜨끈한 온돌방을 덥혀 주는 아궁이가 두 개 있다 ⓒ 이형덕

집의 형식은 껍질을 벗겨 이태쯤 노지에서 건조한 잣나무를 켜켜이 쌓아 이를 맞춘 뒤 그 틈새를 짚을 섞은 황토로 발라 막은 전형적인 귀틀집이었다. 거실에는 잣나무를 켠 마루가 깔려 있었고, 천장이 트인 채 지붕 밑의 박공은 다락방처럼 쓰이는 것이 특이했다. 삼 년째 손을 보고 있는데 아직도 천장 마감이 조금 남아 있다고 했다.

a 전기대신 밤을 밝히는 전등이다

전기대신 밤을 밝히는 전등이다 ⓒ 이형덕

벽에는 전등이 걸려 있어 전기없이 밤을 맞이하는 생활이 눈에 보였다. 부근에서 딴 솔잎과 과실들을 발효시킨 음료와 발효주를 맛 보라며 내 주셨는데, 얼마전 술탈이 나서 더친 속이 걱정되어 조금 마셔 보았는데 신 맛에도 불구하고 속이 쓰리지를 않았다.

이곳에 자리를 잡는 동안, 필요하여 오백만원주고 중고 포크레인까지 마련을 하셨다는데 그 연세에도 중장비 운전까지 익혀 면허를 취득하셨다니 후배의 게으름이 부끄럽기만 했다.

마당에는 옆 자리에 광이나 창고 같은 별채를 짓기 위한 나무들이 다듬어진 채 건조되고 있었는데, 서울 연신내에서 집짓는 법을 실습차 오셨다는 젊은 분이 함께 계셨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차근차근 준비하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는 말씀이었다.

오래 머물지는 않았지만 내게는 참으로 정겹고, 고향 친지 집에 들른 기분이었다. 아마 내가 오래전부터 꿈꿔 오던 삶의 모습을 눈앞에서 마주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한동안 집까지 들어오는 길문제로 신경을 쓰신 듯한데,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기 어려운 점이 이곳의 삶을 온전히 지켜내는 비결인 듯했다. 무엇보다 이런 삶의 유지는 전기와 자동차가 접근하기 어려운 곳일수록 보장받는다는 점이 묘한 뒷맛을 주었다.

a 주인과 함께 이 자리를 지키는 조선 소나무

주인과 함께 이 자리를 지키는 조선 소나무 ⓒ 이형덕

사람이 사람을 피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세속의 온갖 관계가 얽어대는 실타래 쏙에서 온전히 지켜지지 않는 우리네 삶이 고달프게만 느껴진다. 무언가 우리들 욕망의 전원을 끊고, 살벌한 이해와 경쟁으로 얽혀진 세속의 질긴 플러그를 뽑을 때만이 이곳의 삶이 가져다 주는 행복감을 알게 하리라.

경관만 좋고, 맑은 물만 흐른다면 펜션이다 뭐다 더 뜨거운 플러그를 끌고 들어가는 요즈음의 시골살이가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를.. 이 돌밭을 일군 농장에서 깨닫게 되기를 바란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시골로 가는 마지막 기차> 홈페이지에 이시백이라는 필명으로 게재되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시골로 가는 마지막 기차> 홈페이지에 이시백이라는 필명으로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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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동면 광대울에서, 텃밭을 일구며 틈이 나면 책을 읽고 글을 씁니다. http://sigo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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