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 '안흥시장'

어린 날의 기억을 찾아서(4)

등록 2003.03.26 16:31수정 2003.03.26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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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은 없고 눈발이 손님대신 찾아오는 3월 초순의 안흥장
손님은 없고 눈발이 손님대신 찾아오는 3월 초순의 안흥장최성수
사람의 기억은, 어떤 부분에서는 지극히 개인적 경험에 얽매여 있기 마련이라서, 객관적으로 보면 전혀 아닌 일도 터무니없이 과장되어 있거나 왜곡되어 있기 십상이다.


안흥 시장에 대한 내 기억이 그렇다. 좁디좁은 산골에서 시장통이라고 해봐야 거기가 거기일텐데도, 내 기억 속의 안흥 시장은 세상에서 가장 번화하고 큰 거리로 남아 있다.

강원도 산촌은 어디나 다 그렇듯이, 내 고향인 안흥면 상안리 역시 띄엄띄엄 집들이 산 발치에 마치 산의 일부인 듯 자리잡고 있는 곳이다. 이름도 아름다운 골짜기, 소금소골, 보리소골, 함박골, 떡바우골 같은 곳. 제 모습을 드러내기 부끄러워 숨어 피는 야생화처럼, 강원도 사람들의 마음을 고스란히 담아 자리잡고 있는 집들. 그래서 이웃집은 처마를 마주 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제법 몇 백 걸음 걸어야 찾아갈 수 있을 만큼의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있다.

그런데 이런 고향 마을 집의 배치 중에서도 예외가 있었으니, 그곳이 바로 안흥 시장이었다.

시장통에는 다닥다닥 붙은 집들이 늘어서 있었고, 우리 마을에서는 볼 수 없는 붓글씨 간판을 해 단 가게들이 즐비했고, 면사무소니 지서니 하는 관공서도 자리를 잡고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시장이 있는 면(面)은 우리 같은 리(里) 단위에 사는 골짜기 아이들에게는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신기하고 새로운 문명의 공간이기도 했다.

우리가 사는 집들과는 구조가 다른, 커다란 유리문이 달려 있는 가게가 늘어서 있는 시장은, 우리 산골짜기에 사는 아이들에게는 구경을 해도해도 신기한 곳이었다.


옷 파는 노점에도 손님은 없다
옷 파는 노점에도 손님은 없다최성수
특히 장날이면 더 그랬는데, 장날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우리들은 괜히 가슴이 두근두근할 만큼 설레기도 했다. 그래서 학교가 끝나자마자 집과는 반대 방향인 시장을 향해 내달리곤 했다. 가서 아무 볼일이 없어도 장날 장터에 가는 것은 다른 어떤 놀이보다도 즐거운 놀이였다.

1960년대, 그때만 해도 장날은 면 전체의 휴일이었고, 잔치날이었다. 이른 아침이면 이곳저곳 각자의 삶의 공간에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장터로 모여들었다. 손에손에 무언가 한 가지씩을 들고 시장을 향해 나서는 날은, 곧 바쁜 농사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나는 휴일이기도 했고, 또 한편으로는 온갖 일상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구할 수 있는 날이기도 했으며, 텃밭이나 집 주위에서 수확한 자잘한 팔 것들을 돈과 바꾸는 또 다른 생업의 날이기도 했다.


장터를 향하는 마음은 어른들만 바쁜 것이 아니어서, 우리 꼬마들도 학교가 끝나면 장터를 향해 달려가곤 했다. 빈 도시락에서 딸그락대는 소리도 요란한 책보를 메고, 마치 바쁜 볼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달려간 장터에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안흥 초등학교에서 시장까지는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지만, 한껏 내달린 우리들은 숨이 턱에 차 있기 십상이었다. 특히 시장 입구의 통목고개(이 고개 이름의 유래를 모르겠다. 시장통으로 들어가는 길목이란 뜻이 아닌가 하는 막연한 추측만 해 볼 뿐이다)에 이르면 모두들 한 번씩 숨을 고르곤 했는데, 그 고개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장은 얼마나 넓고 번화했던지.

사람들이 시장 초입부터 몰려들어 온갖 볼일들에 바빴는데,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눈은 왕방울만 해 지곤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저 들에서 일하는 동네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사람의 전부였던 우리였으니까.

손님이 없어도 정리에 바쁜 노점 아줌마
손님이 없어도 정리에 바쁜 노점 아줌마최성수
시장 초입의 뻥튀기 집은 제법 마당이 넓직했다. 마당에 줄을 세워 놓아둔 자루에는 그날 튀겨야 할 옥수수가 그득했고, 그 뻥튀기 집에서는 늘 고소한 냄새가 퍼지곤 했는데, 그 냄새는 시장 구석구석을 헤집으며 우리의 군침을 돌게 만들었다.

염색하는 곳도 기억이 난다. 그 당시는 옷이 흔하지 않은 때라 어른들이 군복을 많이 입고 다녔는데, 국방색 군복을 그냥 입으면 단속에 걸린다고 해서 군용 점퍼를 염색해 입어야 했다. 그래서 염색을 하는 곳에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곤 했다. 국방색 점퍼나 바지를 검정색으로 물들여 주는 염색집에는 물이 펄펄 끓는 드럼통이 놓여 있곤 했다.

시장 끝의 소시장도 기억이 난다. 주인을 따라 팔리기 위해 나온 소들이 말뚝에 매여 슬픈 울음을 울던 곳. 그곳에는 돈 다발을 세는 소장수와 소 주인이 있었고, 제 운명을 미리 짐작이라도 했는지, 가끔씩 하늘을 쳐다보며 '음메'하고 소리치는 소들로 가득했다.

시장 곳곳에, 머리에 이고 등에 지고 온 팔 물건들을 늘어놓은 할머니와 아주머니들이 햇살을 쬐며 앉아 있던 곳. 안흥 면뿐만 아니라 강림과 같은 다른 면에서도 안흥장을 보러 사람들이 몰려들던 곳. 그래서 북적이는 사람들로 좁은 면 소재지가 가득 차던 곳이 바로 안흥 시장이었다.

때로는 곡마단이나 이동 영화관이 들어와 사람들을 불러모으곤 했는데, 그런 날이면 천막 안으로 입장을 하지 못한 우리들은 그저 바깥을 빙빙 돌면서도 신이 나곤 했다.

어느 날이었던가, 아마도 영화나 곡마단이 들어온 날이었을 게다. 나는 형, 누나들과 함께 시장에서 놀다 늦게 돌아오게 되었다. 시장을 벗어나, 통목고개를 지나고 안흥 초등학교를 거쳐 양회다리(초등학교를 지나 조금 상안리 쪽으로 가다 보면 시멘트로 만든 다리가 하나 있었는데, 그 다리를 사람들은 양회다리라고 불렀다. 아마도 시멘트를 양회라고 불러 그렇게 이름을 붙인 것이리라. 그 당시 다리들은 대부분 시멘트가 아니라 나무로 만들었으니까)를 건너게 되었는데, 마침 누군가가 무서운 귀신 이야기를 꺼냈다.

어린 나는 그 이야기에 그만 머리카락이 꼿꼿이 서는 것 같았는데, 나중에는 무서워서 신작로 길을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마구 내달려버렸다.

그때 신작로에는 가로수로 미루나무가 서 있었는데, 달아나다 뒤돌아보면 미루나무가 어른 키 만큼씩 더 커지고 있었다. 뒤돌아보면 또 그만큼 커지고, 또 뒤돌아보면 이번에도 미루나무는 또 그만큼 커져 있었다. 결국은 울음을 터트리며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는데, 그 뒤로는 양회다리를 지날 때마다 그날의 일이 생각나 온 몸이 오그라들곤 했었다.

장날, 시장 바닥을 돌아다니다 때로는 장에 나온 어머니나 아버지를 만날 때가 있는데, 그런 날이면 국밥이나 국수 한 그릇을 얻어먹기도 했다. 가마솥에 펄펄 끓는 장국밥이나, 긴 막대기로 건져내던 국수발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간식 거리가 없던 시절이라, 장날 어쩌다 부모님께서 사주시던 국밥이나 국수는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파장 무렵이 되면 사람들은 모두들 잔치 뒤끝의 미진한 마음이거나 혹은 허전한 표정으로 늦은 버스를 기다리고, 더러는 긴 장터마당에 그림자를 늘이며 집으로 돌아가던 곳. 지금은 기억 속에나 남아있는 우리들의 아버지 혹은 어머니들이 새끼줄에 매단 간고등어나 소금에 절인 꽁치를 들고 한 잔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귀가하던 안흥 장터. 나는 그 장터를 세상에서 가장 번화한 곳으로 기억한다. 어린 날의 내 눈에는 세상에서 그만큼 사람이 많이 모이고 흥겨웠던 곳이 없었으므로.

어쩌다 손님이 찾은 나물과 야채 따위를 파는 노점
어쩌다 손님이 찾은 나물과 야채 따위를 파는 노점최성수
3일과 8일에 열리는 오일장인 안흥 장은 지금도 그 날짜에 어김없이 서기는 선다. 그러나 이제는 간고등어를 사들고 돌아가는 아버지들도 없고, 소 시장이나 국밥집도, 그 흥성하고 구수하던 국수집도 다 없어졌다. 장날이라고 특별한 것도 없어서, 그저 노점의 옷 장사나 생선 장사 몇몇이 심심파적삼아 앉아 손님을 기다리는 것 같은 안흥 장터. 그래서 장사꾼들끼리 모여 술추렴으로 하루를 보내기도 하는 안흥 장은 서산에 걸린 노을처럼 쓸쓸하다. 기다리는 손님은 없고, 일 삼아 장 구경을 오던 사람들도 다 사라지고, 생의 마지막 길목에 서 있는 것 같은 덧없음과 허전함이 요즘 안흥 장의 모습이다.

때때로 장날에 고향엘 갈 때가 있다. 그러면 나는 일부러 안흥 시장에 들러 스러지는 이 시대의 마지막 풍경을 덧없이 바라보곤 한다. 어린 날 그 높고 아득해 보이던 시장 어귀 통목고개는 이제 보면 그저 밋밋한 둔덕에 지나지 않을 만큼 낮고 작다.

고개가 낮아진 것이 아니라, 내가 그만큼 기억에서 멀어진 때문일 것이고, 세월이 기억의 언덕을 깎아버린 탓이리라. 기억은 녹슬고, 세상은 날을 세우며 바쁘게 지나간다. 그래서 그 날의 한켠에 비켜서서 되돌아보는 안흥 장의 모습이 더 나직하고 허전한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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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장다리꽃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랑은>, <천년 전 같은 하루>, <꽃,꽃잎>, <물골, 그 집>, <람풍>등의 시집과 <비에 젖은 종이 비행기>, <꽃비> , <무지개 너머 1,230마일> 등의 소설, 여행기 <구름의 성, 운남>, <일생에 한 번은 몽골을 만나라> 등의 책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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