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이 없어도 정리에 바쁜 노점 아줌마최성수
시장 초입의 뻥튀기 집은 제법 마당이 넓직했다. 마당에 줄을 세워 놓아둔 자루에는 그날 튀겨야 할 옥수수가 그득했고, 그 뻥튀기 집에서는 늘 고소한 냄새가 퍼지곤 했는데, 그 냄새는 시장 구석구석을 헤집으며 우리의 군침을 돌게 만들었다.
염색하는 곳도 기억이 난다. 그 당시는 옷이 흔하지 않은 때라 어른들이 군복을 많이 입고 다녔는데, 국방색 군복을 그냥 입으면 단속에 걸린다고 해서 군용 점퍼를 염색해 입어야 했다. 그래서 염색을 하는 곳에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곤 했다. 국방색 점퍼나 바지를 검정색으로 물들여 주는 염색집에는 물이 펄펄 끓는 드럼통이 놓여 있곤 했다.
시장 끝의 소시장도 기억이 난다. 주인을 따라 팔리기 위해 나온 소들이 말뚝에 매여 슬픈 울음을 울던 곳. 그곳에는 돈 다발을 세는 소장수와 소 주인이 있었고, 제 운명을 미리 짐작이라도 했는지, 가끔씩 하늘을 쳐다보며 '음메'하고 소리치는 소들로 가득했다.
시장 곳곳에, 머리에 이고 등에 지고 온 팔 물건들을 늘어놓은 할머니와 아주머니들이 햇살을 쬐며 앉아 있던 곳. 안흥 면뿐만 아니라 강림과 같은 다른 면에서도 안흥장을 보러 사람들이 몰려들던 곳. 그래서 북적이는 사람들로 좁은 면 소재지가 가득 차던 곳이 바로 안흥 시장이었다.
때로는 곡마단이나 이동 영화관이 들어와 사람들을 불러모으곤 했는데, 그런 날이면 천막 안으로 입장을 하지 못한 우리들은 그저 바깥을 빙빙 돌면서도 신이 나곤 했다.
어느 날이었던가, 아마도 영화나 곡마단이 들어온 날이었을 게다. 나는 형, 누나들과 함께 시장에서 놀다 늦게 돌아오게 되었다. 시장을 벗어나, 통목고개를 지나고 안흥 초등학교를 거쳐 양회다리(초등학교를 지나 조금 상안리 쪽으로 가다 보면 시멘트로 만든 다리가 하나 있었는데, 그 다리를 사람들은 양회다리라고 불렀다. 아마도 시멘트를 양회라고 불러 그렇게 이름을 붙인 것이리라. 그 당시 다리들은 대부분 시멘트가 아니라 나무로 만들었으니까)를 건너게 되었는데, 마침 누군가가 무서운 귀신 이야기를 꺼냈다.
어린 나는 그 이야기에 그만 머리카락이 꼿꼿이 서는 것 같았는데, 나중에는 무서워서 신작로 길을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마구 내달려버렸다.
그때 신작로에는 가로수로 미루나무가 서 있었는데, 달아나다 뒤돌아보면 미루나무가 어른 키 만큼씩 더 커지고 있었다. 뒤돌아보면 또 그만큼 커지고, 또 뒤돌아보면 이번에도 미루나무는 또 그만큼 커져 있었다. 결국은 울음을 터트리며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는데, 그 뒤로는 양회다리를 지날 때마다 그날의 일이 생각나 온 몸이 오그라들곤 했었다.
장날, 시장 바닥을 돌아다니다 때로는 장에 나온 어머니나 아버지를 만날 때가 있는데, 그런 날이면 국밥이나 국수 한 그릇을 얻어먹기도 했다. 가마솥에 펄펄 끓는 장국밥이나, 긴 막대기로 건져내던 국수발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간식 거리가 없던 시절이라, 장날 어쩌다 부모님께서 사주시던 국밥이나 국수는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파장 무렵이 되면 사람들은 모두들 잔치 뒤끝의 미진한 마음이거나 혹은 허전한 표정으로 늦은 버스를 기다리고, 더러는 긴 장터마당에 그림자를 늘이며 집으로 돌아가던 곳. 지금은 기억 속에나 남아있는 우리들의 아버지 혹은 어머니들이 새끼줄에 매단 간고등어나 소금에 절인 꽁치를 들고 한 잔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귀가하던 안흥 장터. 나는 그 장터를 세상에서 가장 번화한 곳으로 기억한다. 어린 날의 내 눈에는 세상에서 그만큼 사람이 많이 모이고 흥겨웠던 곳이 없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