쑥을 캐다 이라크 아낙을 생각하다

교사의 눈으로 본 이라크 전쟁

등록 2003.03.27 21:29수정 2003.03.28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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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쑥국을 먹었습니다. 겨우내 버려 둔 산자락 밭을 손질하다가 들에 지천으로 깔린 쑥을 캐어 온 것입니다.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연례 행사처럼 해온 일이기도 합니다. 묵은 땅을 삽으로 갈아 업고 잘 썩어 훌륭한 거름이 되어 있는 음식쓰레기를 흙과 함께 섞어 놓으면 몇 발짝 떨어진 곳에서 먼저 쑥을 캐던 아내가 바통을 이어 받아 호미로 밭 모양새를 만듭니다. 그제야 쑥을 캐는 일이 제 몫이 되지요.

한참 쑥을 캐다보면 아내가 곁에 와 있습니다. 손바닥만한 밭이라 일이랄 것도 없어 얼른 끝내고 온 것입니다. 그때부터 도란도란 이야기꽃이 핍니다. 냉이는 벌써 꽃이 피어 먹을 수 없게 되었다든지, 제비꽃을 오랑캐꽃이라고도 한다든지, 지렁이 굵기가 손가락만 하다든지, 흙을 만지니까 기분이 좋다든지, 그런 자잘한 이야기들이 이어지다가 마치 시 한 구절을 암송이라도 하듯 아내의 입에서 이런 말이 흘러나왔습니다.

"아, 평화롭다!"

그런데 평화라는 말이 귀에 들려오기가 무섭게 머리에 떠오르는 그림이 있었습니다. 지금 한참 전쟁중인 이라크의 아낙들입니다. 남의 불행이 내 행복의 단초가 되는 것은 죄스럽고 부끄러운 일이지만, 화염과 굉음과 통곡뿐인 아비규환의 거리에서 어린 자식을 품에 안고 불안에 떨고 있는 여인들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들에서 한가롭게 쑥을 뜯고 있는 우리 내외의 모습이 더없이 평화롭고 행복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a 쑥

ⓒ 안준철

전쟁이 아니라면 지금쯤 그곳의 아낙들도 들에 나와 평화롭게 나물을 캐고 있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볼과 손등에 따사로운 햇살과 바람을 느끼며 땅에 돋아난 푸른 것들을 캐어 바구니에 담아 집으로 돌아가는 발길이 얼마 가볍고 행복할까요? 지구라는 초록별에 살고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런 소박하고 평화로운 삶을 갈망하고 있겠지요.

따지고 보면, 그런 겸손하고 소박한 작은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기어이 역사가 기억해주는 최고가 되어야 한다든지, 세계 최강국으로 군림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별종들의 촌스럽고 왜곡된 가치관으로 인해 지구촌 대다수 사람들의 소중한 생명과 행복이 유린되고 있는 셈입니다. 이런 가공할만한 파괴력을 지닌 위인들을 배출하지 않는 것이 교사인 제가 해야할 일이기도 합니다.

몇 해 전인가는 반 아이들과 함께 쑥을 캐러 간 적이 있습니다. 쑥도 쑥이지만 자연이 벌이는 작고 눈부신 생명들의 잔치를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쑥이 돋아날 무렵이면 보랏빛 제비꽃과 노란 뱀딸기꽃이 한창입니다. 한데 어울려 핀 땅비단이나 냉이꽃의 아름다움도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아이들에게 자연에서 숨쉬는 살아 있는 생명을 보여주려는 것은 아이들 자신이 바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a 냉이꽃

냉이꽃 ⓒ 안준철

작가가 시대를 향하여 발언하는 사람이라면 교사는 아이들의 영혼을 향하여 발언하는 사람입니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목도하면서 교사로서 생각이 많아진 것도 그 때문입니다. 이번 전쟁에 대하여 아이들에게 어떤 말을 해줄 것인가? 더욱이 명분 없는 전쟁으로 판가름 나버린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지지하고 나선 우리의 정부의 결정에 대하여 교사로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인가?

물론 아이들이 물어보지 않는다면 그냥 지나칠 수도 있습니다. 전공이 사회 과목도 아닌 바에야 시대의 잘못된 흐름을 모른 체하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 만은 않습니다. 무한 경쟁의 시대를 넘어서서 무력과 폭력으로 세계를 지배하려는 사람들의 반생명적이고 반인륜적인 행위가 용납되다 못해, 그것이 실력과 능력으로 인정되는 사회 분위기에서는 아이들에게 관용과 평화와 희생의 정신을 심어주는 일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이슬도 뱀이 먹으면 독이 되고 젖소가 먹으면 우유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지식이나 정보는 그 자체로는 가치 중립적이지만 그 지식과 정보를 소유한 자의 태도나 가치관에 의해서 폭력으로 사용될 수도 있고 인류에게 유익을 줄 수도 있습니다. 국가의 막대한 예산을 들여서 애써 배출해낸 지식인들이 사회와 이웃에 유익을 끼치기는커녕 오히려 독이 된다는 것은 국가적으로나 개인적으로 크나큰 손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성교육이 강조되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사정이 이런데도 인성교육은 말뿐이고, 어차피 무한 경쟁의 시대이니 학교 교육부터 경쟁 체제를 유지해야한다는 위험한 주장이 힘을 얻어가고 있는 것이 우리의 슬픈 현실입니다. 그 비극적 결말에 대한 혜안을 가진 사람들은 이상주의자로 오해를 받기도 합니다. 이라크 전쟁은 과도한 경쟁이 폭력으로 이어진 하나의 예에 불과합니다.


쑥국을 끓이니 온 집안 가득 쑥 향내가 납니다. 쑥국에 말아 저녁을 맛있게 먹고 난 뒤 텔레비전을 켤까 하다가 그만 두었습니다. 이라크 전쟁 소식을 접하다 보면 저도 모르게 선정적인 화면에 눈이 쏠리기 때문입니다. 사망자 수가 늘어났나 하고 자막을 살펴보는 눈길도 수상쩍습니다. 누구를 탓하기 전에 저부터 살과 핏속에 스민 야만을 덜어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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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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