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발스님과 선친에 대한 좋은 기억 한가지

등록 2003.04.01 08:40수정 2003.04.02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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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버스 터미널에서 참으로 오랜만에 탁발스님을 보았다. 집집을 돌아다니는 탁발이 아니고, 터미널 대합실 한 쪽에 시주함을 놓고 서서 목탁을 두드리는 식의 말하자면 소극적인 탁발이었다.

서울에 가면 지하도나 지하철 역내에서 종종 보는 풍경을 우리 동네 버스 터미널에서 보게 되니 은근히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그 스님이 노상 거기에 서서 목탁을 두드리고 있지는 않겠지만, 설령 그 탁발이 일상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나로서는 자주 볼 수 없을 것이다. 차를 가지고 사는 덕에 정말 버스 터미널에 갈 기회가 아주 드물기 까닭이다.


하여간 우리 고장 버스 터미널에서 탁발스님을 보는 것이 왠지 정말 반가웠고 (불교 신자도 아니면서 탁발스님을 보고 반가움을 느끼는 내 마음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이며, 그 이유는 무엇이며, 사람들이 그것을 이해할 수 있을까?), 그 순간 불현듯 아버님 생각이 떠올랐다.

길을 가다가도 노인들을 보면 나는 으레 내 아버님을 떠올리곤 하는데, 그건 자식으로서 당연한 일이기도 할 터이다. 노인들을 볼 때마다 괜히 저 노인은 올해 연세가 어떻게 되시는지 궁금하다. 벌써 먼 17년 전에 너무 아까운 연세로 작고하신 내 아버님이 지금도 살아 계시다면 올해 연세 83세. 진작에 여든을 넘어 구순을 바라보면서도 건강하게 수(壽)하시는 노인들을 뵈면 아버님 생각이 절로 나고, 부러움과 함께 내 불민함과 불효를 다시 한탄하게 된다.

노인들을 볼 때마다 내 선친을 떠올리는 것이야 그렇게 당연한 것이지만, 버스 터미널의 대합실에서 탁발스님을 보고 왜 불현듯 아버님을 떠올렸던 것일까?

요즘은 집집을 돌아다니는 탁발스님은 거의 없는 것 같다. 몇 해 전에 사촌형님의 가게에 갔다가 차례차례 가게들을 들르는 스님을 본 적이 있지만, 그 후로는 그런 탁발스님을 본 기억이 없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유들 중의 하나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무척이나 많아진 탓이 아닐까?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예수님 믿는다는 말을 아주 쉽게 토하면서 시주를 거절하기 때문이 아닐까?

옛날 내 선친께서 살아 계실 때의 일, 우리 집에서 있었던 삽화 하나를 나는 소중히 기억한다. 아스라한 내 청소년 시절의 일이었다. 그리고 전에 살았던 태안읍 남문리 행길가 옴팡집에서의 일이었다.


어느 날 우리 집에 탁발스님이 왔다. 대문이 열려 있는데도 스님은 집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문 앞에 서서 경을 외며 목탁을 두드렸다.

우리 집은 서슴없이 듬뿍 시주를 할 수 있을 만큼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탁발스님에게 쌀 한 사발 시주를 했다고 형편이 더욱 어렵게 되는 것은 아니었다.


탁발스님을 먼저 본 내가 뒤란에서 무슨 일인가를 하시는 아버지와 어머니께 가서 중이 왔다는 식의 말을 했다.

아버지는 어머니께 눈짓을 했고, 뒤란에서 부엌으로 들어온 어머니는 잠시 뭔가를 망설이는 듯하더니 그냥 빈손으로 부엌을 나왔다. 그리고 대문께로 간 어머니는 문 밖의 탁발스님에게 말했다.

"우리 집은 예수님 믿어유."
그러자 염경과 목탁을 그친 탁발스님은 아무 말 없이 이내 발을 돌렸다.

탁발스님을 그냥 보낸 어머니는 다시 부엌을 거쳐 뒤란으로 갔고, 나는 이상한 호기심 같은 것을 느끼며 어머니를 따라갔다.

"워떻게, 뭣 좀 디렸남?"
아버지가 어머니께 묻는 말이었다.

"안유. 우리 집은 예수님 믿는 집이라구 헤가지구 그냥 보냈유. 내가 그러니께 곧바루 그냥 가대유."

그러자 아버지는 어이없어하는 표정이었다.

"그런 식으루 예수님 이름을 함부루 팔면 워떡헌다나?"
"예수님 이름을 팔다니유?"
"좋은 일이다가 예수님 이름을 팔어야지, 그렇게 탁발스님헌티 시주 애끼는 그런 인색헌 일이다가 예수님 이름을 팔어? 그러면 뭇 쓰는 겨. 그건 예수님께 누를 끼치구, 꾸중을 들을 일이여."

그러더니 아버지는 내게 다급하게 말했다.
"너 얼릉 쫓어가서 그 스님 보구 다시 오시라구려."

나는 지체 없이 빠른 걸음으로 부엌을 거쳐 집밖으로 나갔다.

그 탁발스님은 우리 옆집들을 그냥 지나쳤는지 저만치 가고 있었다. 아마 이웃집들도 예수님 믿는 집들일 거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뛰어가며 "저기요." 소리로 스님을 불렀다. 발을 멈추고 돌아서는 스님에게 말했다.
"우리 아버지가유, 스님, 도루 오시라는디유."

곧 내가 앞장을 섰고 스님이 내 뒤를 따라왔다.

어머니가 쌀이 가득 담긴 사기대접을 들고 문 앞에 서 있었다. 탁발스님은 합장하고 절을 한 다음 바랑을 벌렸고, 어머니는 그 바랑 안에다 대접의 쌀을 조심스럽게 부었다.

그 뒤로 어머니는 탁발스님이 올 때마다 아버지의 엄명대로 예수님 이름을 팔지 않고 꼭꼭 시주를 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아버지는 내게 부처님 이야기도 들려주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청년 시절 천주교 신자가 되기 전에 잠시 개신교 신자였고, 그 전에 불교 공부도 많이 했다고 했다. 아버지는 불경을 많이 알고 있었다. 나를 앉혀놓고 불교 이야기를 시작하면 금강경, 연화경 등을 줄줄 외우다시피 하면서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청년 시절 불교에 심취했던 아버지는 개신교를 거쳐 천주교 신자가 되어 충실히 신자 생활을 하면서도 불교를 매우 좋은 종교로 여기고 존중하며 아꼈다. 자식에게 천주교 신앙을 가르치는 만큼 불교 이야기도 곁들여 많이 들려주시곤 했던 것이다.

나는 그런 내 선친을 기억하는 것이 참 즐겁다. 즐거운 만큼 아버님이 그립다. 또 그리운 만큼 아버님께 이승에서 효도를 다하지 못한 내 불민함이 다시금 절절히 한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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