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데 왜 경찰들이 총을 쏴?"

<내 추억 속의 그 이름 66> 백일장

등록 2003.04.07 17:03수정 2003.04.07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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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무언가를 열심히 쓰고 있는 푸름이

무언가를 열심히 쓰고 있는 푸름이 ⓒ 이종찬

"아빠! 내일 백일장에 가야 돼."
"무슨 백일장인데?"
"오전 10시에 3.15 국립묘지에서 열리는 백일장이야."


지지난 주 토요일 오후, 내가 마산에 있는 큰대포집에서 마악 막걸리 첫 잔을 기울일 때 큰딸 푸름이한테서 급한 전화가 왔다. 마산 3.15 국립묘지에서 3.15의거 43돌을 기념하는 전국백일장이 열리는데, 학교에서는 저 혼자 참가하기 때문에 무조건 아빠가 따라가야 한다는 거였다.

그래. 나도 한때 백일장에 참가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주어진 시간 안에서 주어진 제목으로 글을 쓴다는 것, 그 자체가 아예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 문학동아리에서 같이 활동하던 벗들이 이번 기회에 본때를 한번 보이라며 마구 추켜세웠다. 말하자면 내 실력을 저울질 해보겠는 것이었다.

그날 타의 90%, 자의 10%로 백일장에 참석한 나는 몹시 곤혹스러웠다. 제목을 받아들고 아무리 시상을 떠올리려고 해도 내가 받아든 백지처럼 머리 속이 텅 비기만 했다. 하지만 나는 주어진 시간 안에 그 백지를 채워내야만 했다. 그날, 나는 백일장이 끝날 무렵이 되어서야 겨우 내게 주어진 숙제를 마무리했다. 그날 저녁, 벗들의 기대대로 상은 탔지만 말이다.

하지만 나는 백일장 제도 그 자체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글이란 것이 주어진 시간 안에 딱 맞아 떨어지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내 생각과는 아무런 상관 없이 제목까지 주어지는, 마치 빵틀에서 일정한 시간 안에 구워내는 빵같은 것이 현재의 백일장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3.15가 뭔지 알기는 알아?"
"대충은 알지만 정확하게는 잘 몰라."
"우선 인터넷으로 검색부터 좀 해 봐."
"그럼 따라갈 거지?"


그래. 3.15의거 하면 제일 먼저 김주열 열사가 떠오른다. 경찰이 쏜 최루탄을 머리에 맞고 마산 앞바다에 수장되었다가 어부의 그물에 의해 건져올려진 김주열 열사. 전북 남원이 고향이었던 김주열은 당시 마산으로 유학, 마산상업고등학교에 갓 입학한 꿈많은 고등학생이었다.

a 백일장이 열린 3.15 국립묘지

백일장이 열린 3.15 국립묘지 ⓒ 이종찬

4.19혁명의 불씨가 되었던 김주열. 하지만 마산 항간에서는 김주열 열사를 두고 말이 많다. 과연 김주열을 열사의 반열에 올리는 것이 옳은 것인가에 대한 시시비비다. 그 시시비비 중에 가장 핵심이 되는 내용은 당시 마산에서 일어난 3.15부정선거에 반대하는 시위에 김주열 열사가 직접 참여한 게 아니라 구경을 보러 나왔다가 변을 당했다는 것이었다.


"당시 중학교를 갓 졸업하고 마산으로 유학 온 김주열이가 무얼 알았겠어? 또 김주열이가 부정선거에 대한 나름대로의 의식이 있었다캐도 마산까지 공부하러 온 주제에 시위에 우째 참가할끼고."
"그라모 니는 시위 때 시위군중을 보러 거리에 나왔던 무고한 사람이 최루탄에 맞아 죽어도 괘않타 이 말이가. 그라고 그 당시, 구경을 했건 우쨌건 간에 김주열 열사가 시위 현장에 있었다는 그 자체만 해도 시위에 묵시적인 동조를 한 거나 마찬가지 아이가."

당시 상황을 들어보면, 시위 군중이 대부분 해산했을 때 웬 학생 한명이 머리에 최루탄이 박힌 채 거리에 나뒹굴고 있었단다. 그래서 놀란 경찰이 엉겁결에 김주열의 시신에 돌멩이를 매달아 마산 앞바다에 던졌다고 한다. 그런데 그 시신이 당시 마산 앞바다에서 고기를 잡고 있던 어부의 그물에 걸려 솟아올랐던 것이었다.

그랬다.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는 바로 그 참혹한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떠오름으로 인해서 전국적으로 불타 올랐다. 그리하여 마침내 이승만 부패정권의 하야를 이끌어낸 것이 바로 4.19혁명이 아니었던가. 그래. 어쩌면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김주열은 당연히 열사의 반열에 올려야 되지 않겠는가.

"이제 3.15가 뭔지, 왜 이 국립묘지를 만들어 놓았는지 알겠어?"
"응, 이제 확실히 알겠어."
"빛나는?"
"근데 왜 경찰들이 사람들에게 총을 쏴? 미국에서 보낸 경찰이야?"
"???"

백일장이 열리기 전, 3.15에 대한 여러가지 전시물들을 둘러 본 딸들의 얼굴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특히 경찰들이 거리에 나와 시위하는 군중들을 향해 총을 쏘고 있는 모형들을 오래 바라본 딸들의 눈빛은 예사롭지가 않았다. 아무리 보아도 그러한 사실들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투였다.

"에이! 시제가 '탑'이 뭐야? 아빠, 나는 산문을 쓸래."
"그래, 알아서 해. 빛나는?"
"나는 시를 쓸래. 근데 뭘 쓰지?"
"저기 탑이 있잖아. 저 탑을 보면서 잘 생각해 봐."

그날, 초등부 고학년 백일장 제목은 '탑'(운문)과 '봄나물'(산문)이었다. 푸름이는 봄나물을 제목으로 1시간여에 걸쳐 깨알 같은 글씨로 꽤나 긴 산문을 썼다. 빛나는 탑이라는 제목의 시를 20여분도 채 되기 전에 마무리 했다. 무엇이든지 대충대충 해치우는 빛나의 성격이 백일장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하지만 빛나가 쓴 시는 대충 쓴 것 치고는 제법 잘 쓴 것 같았다. 빛나가 쓴 시를 대략 정리하면 저기 탑이 있는데, 그 탑이 바람이 불면 고함을 치다가, 비가 오면 엉엉 운다는 그런 내용의 시였다. 푸름이는 봄나물이 꽃보다 더 좋다는 그런 내용을 친구들과 할머니의 이야기를 예를 들어가며 제법 잘 썼다.

"아빠! 어때?"
"참 잘 썼어. 역시 아빠 딸다워. 하지만 상을 타고 안 타고에는 너무 얽매이지는 마."
"왜?"
"오늘 입상을 못한다고 해서 푸름이와 빛나의 글짓기 실력이 모자란다는 게 아니거든. 왜냐하면 글이란 것은 그날 감정에 따라서 잘 쓰지기도 하고, 잘 안 쓰지기도 하거든."

a 푸름(좌)과 빛나의 글쓰는 모습

푸름(좌)과 빛나의 글쓰는 모습 ⓒ 이종찬

나는 평소에도 딸들의 백일장에 따라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백일장 심사위원들 대부분이 내가 잘 아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 장소에 가서 그분들을 애써 모르는 척하기도 그랬고, 또 잘 아는 척하기도 그랬다. 나와 딸, 그리고 심사위원 주변에는 수많은 눈이 있기 때문이었다.

"아빠가 심사위원을 하면 좋을 텐데."
"그러면 더욱 너희들 글을 입상작으로 뽑을 수가 없겠지?"
"왜?"
"아빠 딸이니까."

그날, 나는 오랜만에 두딸을 데리고 벚꽃과 개나리, 목련,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어나고 있는 3.15 국립묘지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3.15 국립묘지 바로 아래에는 맥주박스를 빼곡히 쌓아둔 하이트 공장이 보였다. 그리고 저만치 희뿌연 연기 속에 김주열 열사가 주검으로 떠오른 마산 앞바다가 보였다.

"이게 무슨 냄새야?"
"맥주 만드는 냄새잖아. 바로 저게 하이트 맥주를 만드는 공장이야."
"아빠! 배 고파."
"근데 3.15 열령들은 좋겠다?"
"왜에에?"
"매일 맥주 냄새 때문에 반쯤 취해서 있을 거 아냐."
"아빠! 술 생각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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