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나무 사이에 도라지를 심으면, 여름에는 아름다운 도라지꽃이 피어날 것이다.최성수
"이제 나무 심은 사이에 도라지를 심을 거란다. 한 이삼 년 키우면 밭도 괜찮고, 나무도 그 때쯤이면 제법 자라 있을 거야."
아버지는 일을 마치고 식사를 하시며 그런 말을 하셨는데, 그런 말씀을 하시는 표정에는 마치 큰 일을 하나 마치셨다는 듯 환한 미소가 번지셨습니다.
나는 그런 아버지를 보며, 문득 우리 아버지는 중국 고사에 나오는 우공(愚公)과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열자(列子)>에 나오는 우공이산(愚公移山)의 고사가 떠올라서였습니다.
기주(冀州) 남쪽과 하양(河陽) 북쪽에 둘레가 700리 정도 되는 산이 있있습니다. 그 마을에 우공(愚公)이라는 나이 90이 가까운 노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우공의 밭은 산 반대편 쪽에 있었는데, 그 밭으로 일을 하러 가기가 너무나 불편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우공은 자식들과 의논하여 산을 다른 곳으로 퍼 옮기기로 하였습니다.
우공네 가족은 모두들 산에 덤벼들어 흙을 파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본 우공의 친구가 물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수로 그 산을 옮기겠다고 하는가?"
우공은 웃으며 친구의 말에 대답했습니다.
"산의 양은 한정이 있기 마련이라네. 하지만 우리 가족은 내가 있고, 아들이 있고, 또 손자가 있네. 손자가 또 아이를 나으면 자손 대대로 이어질 것이니, 한정 있는 산을 무한한 우리 가족이 왜 옮기지 못하겠나."
이 이야기에서 비롯되어 우공이산은 아무리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꾸준히 노력하면 이룰 수 있다는 말로 쓰이게 된 것이지요.
올 해, 아버지의 나이 팔순이십니다. 아마도 아버지는 당신이 심은 저 은행나무의 열매를 수확하지 못할 지도,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가을이면 황금빛으로 세상을 밝히는 것도 보지 못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은행나무를 심으면서, 마음 속으로는 그 은행나무 숲길을 거닐 당신의 손자인 내 아이들을, 또 그 아이들의 아이들을 생각하고 계셨는지도 모릅니다. 마치 내가 아니라도 자손 대대로 이어지면 결국은 산을 옮기게 된다는 믿음을 가졌던 우공처럼 말입니다.
평생을 나무 심는 일을 해 오신 아버지.
"나는 평생동안 짐승 길러서는 성공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나무를 심으면 손해를 보지는 않았어. 나하고 나무가 잘 맞는 것 같구나."
가끔 술을 드시면 아버지는 그런 말을 하시곤 했습니다. 한때는 국가에서 지정한 우수 독림가이기도 하셨던 아버지. 5.16 군사 쿠데타 이후 공무원에서 쫒겨나 온갖 일들로 살아오셨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좋았던 것이 나무 심고 가꾸는 일이라는 아버지는 요즘도 산에 가실 때면 빈손인 적이 없습니다. 꼭 낫을 들고 가서 가지치기라도 하셔야만 마음이 편하다고 하십니다.
"그냥 지나가는 것보다는 이렇게 한번이라도 관심을 가지면 나무는 속이지 않고 잘 자라는 법이란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은 때때로 나무를 닮아 있습니다.
한 밤중, 별이 초롱초롱한 마당가에 나가 나는 한동안 별빛 아래 빛나는 은행나무 밭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문득, 거기 아버지가 심은 은행나무들이 어느샌가 아름드리로 자라 골짜기를 아름답게 뒤덮고 있는 풍경을 마치 환영처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