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자무협소설> 전사의 후예 122

은폐된 진실 (2)

등록 2003.05.02 13:14수정 2003.05.02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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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보도는 여러 상황으로 미루어 분타주 자리에 오래 앉아 있는 것에 중대한 문제가 발생되었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하여 이러한 상황을 반전시킬 것이 없을까를 고심하는 한편 잔뜩 독이 오른 독사처럼 선무곡 곳곳을 노려보는 중이었다. 무엇이든 꼬투리만 생기면 즉각 잡아채려는 것이다.


일신의 영달을 위해서라면 지금껏 충성을 아끼지 않던 그 어느 누구라도 희생시킬 생각을 품고 있었다.

때마침 무림천자성 총단에서 주석교에 공급하던 식량을 끊었다. 그러자 멈추었던 천뢰탄 개발을 재개하겠다고 만천하에 천명하고 나섰다. 이에 무림천자성에서는 즉각 멈추지 않으면 공격도 불사하겠다고 선언하였다.

하지만 주석교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듯하였다. 이에 주변 문파들은 아연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칫 불똥이 잘못 튀면 엄청난 손실을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여 다각도로 주석교를 진정시키려 선을 대는 중이었다.

전 같으면 이런 상황에 선무곡도들은 무림천자성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이번엔 달라도 너무 많이 달랐다. 오히려 선무분타를 철수시키라는 주장까지 나온 것이다.


과거에는 이런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무림천자성에 대한 반감을 지닌 사람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언제나 일부 극소수가 나서서 선무분타의 철수를 주장하곤 하였다. 그들 대부분은 젊은 청년들이었다.


그럴 때마다 선무곡의 어른들은 뭘 모르는 소리하지 말라면서 나무라곤 하였다. 선무분타가 없어지면 주석교에 의하여 먹힌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의 목소리는 잦아들기 마련이었다.

이는 주석교가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적어도 선무곡에서는 청년들이 어른을 공경(恭敬)할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철수를 주장하던 청년들도 어른이 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침묵으로 일관하곤 하였다. 그런데 이번엔 달라도 많이 달랐다.

철수를 요구하는 인원이 부쩍 늘어난 데다가 마땅히 나무라야 할 어른들까지 동조하고 있었던 것이다.

허보도로서는 이래저래 곤혹스러움의 연속이었다. 그렇다고 정의수호대원들을 풀어 강제로 해산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런 죄도 없는 두 소녀의 죽음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밝히지 못할 중대한 비밀이 하나 있었다. 두 소녀가 결코 우연한 사고로 죽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 그것이다.

마차를 몰았던 두 놈은 술에 만취된 상태였다. 그런데 그들은 다분히 가학적(加虐的)인 성품을 지닌 자들이었다.

일상적인 정찰 임무를 마치고 분타로 귀환하던 둘은 앞서가던 두 소녀를 보자 불현듯 돋은 살심(殺心)을 제어할 수 없었다. 하여 일부러 소녀 쪽으로 마차를 몰았다.

그들에게 있어 앞서가는 두 소녀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직 나이가 어리기에 욕정의 대상조차 될 수 없었기에 아마도 사람이 아닌 짐승이나 장난감으로 보았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두 소녀가 가던 곳의 우측에는 높은 언덕이 있었다. 무공을 모르는 그녀들로서는 기어오를 수 없는 높이였기에 뒤에서 밀어붙이면 피할 곳이 전혀 없는 그런 곳이다.

자신들을 노리고 빠른 속도로 쇄도하는 마차에 놀라 황급히 피하려다 쓰러진 두 소녀는 육중한 마차 바퀴에 치일 수밖에 없었다. 비명을 지르며 쓰러진 두 소녀는 즉사하지 않았다.

놀라서 쓰러진 뒤 다리를 치었기에 목숨을 잃을 정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때라도 제대로 구호를 하였다면 병신은 되었을지 모르나 목숨은 잃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를 확인한 두 놈은 구호를 하기는커녕 마차를 앞뒤로 몰아 현장에서 즉사하도록 하였다. 그래서 두 소녀의 몸 전체에 마차바퀴 자국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이것은 처음 현장에 도착하여 조사한 수하의 보고였다.

사태의 심각성을 간파한 허보도는 이일이 외부로 알려질 경우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 판단하고는 즉시 현장을 치우도록 하였다. 그리고는 현장 조사를 나온 선무곡 제자들을 쫓아냈다.

사고를 낸 둘을 심문한 분타주는 불과 며칠만에 임무 수행 중 발생된 미필적(未畢的) 고의에 의한 사고로 결말을 짓고 황급히 다른 곳으로 전출시켰다.

그들을 데리고 있을 경우 심각한 문제가 발생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만일 분노한 선무곡도들에 의하면 맞아죽는다면 무림천자성으로서는 보통 체면 구겨지는 일이 아닐 것이다.

그것으로 인하여 지금껏 쌓아올린 명예로운 명성이 하루아침에 박살날 수도 있다. 그들이 죽으면 선무분타에 배속되어 있는 정의수호대원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어찌되었건 동료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나서면 보통 심각한 문제가 발생되는 것이 아니다. 곧바로 선무곡 전체와 일대 혈전을 각오하여야 할 상황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예 사건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서둘러 전출시킨 것이다. 물론 욕먹을 각오를 했다.

이것 때문에 선무곡도들의 항의는 더욱 심해졌다. 하여 이래저래 골치가 아파진 허보도는 난국을 타파할 묘수를 찾았다.

그러던 중 낯선 인물을 발견한 그는 무릎을 쳤다. 그리고는 수하들에게 모종의 명을 내렸다.

한편 이회옥은 보고서 작성을 끝낸 후 허보도의 권유를 받아 선무팔경 가운데 하나인 금강암(金剛巖) 구경을 떠났다.

강호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모두 일만이천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금강암은 중원의 그 어떤 절경과 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을 그야말로 절경 중의 절경이었다.

유람을 마친 이회옥은 즐거운 마음으로 돌아왔다. 이번 유람에서 일타홍 홍여진과 부쩍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회옥의 이마에 새겨진 삼천이십칠이라는 글자를 흉측하다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것을 만져보면서 얼마나 아팠었느냐고 물었을 뿐이다. 그러면서 반드시 뛰어난 솜씨를 지닌 의원을 찾아 그것을 없애도록 하겠다고 하였다.

유람하는 내내 많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일타홍은 이회옥이라는 인물에 대한 재평가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림지옥갱에서 탈출할 때의 이야기를 듣고는 굳은 심지와 끈질긴 인내력에 감탄하였다. 냉혈살마와 비접나한의 비참한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에는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과 진실로 타인을 긍휼히 여길 줄 아는 마음씀씀이를 느꼈다.

뚜렷하게 남아 있는 추수옥녀 여옥혜에 대한 기억이 다소 마음에 걸리기는 하였다. 하지만 어릴 때의 일이기에 애써 무시한 그녀는 이회옥이 지금껏 다른 여인과의 인연이 없었던 것을 지극히 마음에 들어하였다.

말은 안 했지만 홍여진은 아직 아무도 차지하지 않은 이회옥의 비어 있는 마음 한구석을 차지하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하였다. 언제나 시선을 맞추려는 것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아무튼 금강암 유람을 하는 내내 잠자리에 들기 위하여 헤어져 있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하루종일 조잘거리는 그녀를 보면서 이회옥은 내심 실소를 머금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한시도 쉬지 않고 입을 놀릴 수 있는지 너무도 놀라웠기 때문이다. 처음엔 마땅한 화제가 없었기에 선무곡과 무림천자성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허보도에게서 듣지 못한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다! 따라서 허보도의 말과 홍여진의 말에는 서로의 입장 차만큼이나 많은 괴리가 있었다. 그 차이가 너무 컸기에 처음엔 어리둥절할 정도였다. 하지만 누구의 말이 진실인지를 알 수 있었다.

홍여진의 눈빛 때문이었다.

밤하늘에 빛나는 별빛보다도 더 신비롭고 요요로운 그녀의 눈빛은 어떤 것이 사실인지를 대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아직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백지나 다름없는 이회옥의 마음에 지울 수 없는 그림을 그려놓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그녀의 의미심장한 눈빛을 떠올리며 들어서던 이회옥은 느닷없는 비명 소리에 놀란 표정을 짓고는 분타주 집무실 뒤쪽으로 달려갔다. 무슨 일인가 싶었던 것이다.

"무엇들 하느냐? 그것 가지고는 부족한 모양이다. 하나를 더 올려라. 아니 아예 두 개를 더 올려라!"
"존명!"

"으아아아아악! 으으으으윽!"
"아니! 저건…?"

이회옥은 머리를 풀어헤쳐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사내의 무릎 위에 올려진 돌들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말로만 듣던 압슬형(壓膝刑)이 시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닥에는 날카롭게 깨어진 사금파리 조각들이 즐비하게 놓여 있었고, 무릎 위에는 선무곡 사람들만이 사용하는 다듬잇돌이 여섯 장이나 올려져 있었다.

다듬잇돌은 하나의 무게만 하여도 족히 오십 근은 되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 올려져 있는 것만도 삼백 근이나 되었다.

세 사람이 올라선 것과 같은 무게이다. 그런데 그것으로도 모자라 두 장이나 더 얹으려는 것이다.

무슨 죄를 지어 끌려왔는지는 모르나 형을 당하는 사내의 무릎 부위는 낭자한 선혈로 인하여 온통 피투성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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