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고향, 명동촌

항일유적답사기 (15) - 윤동주 생가Ⅰ

등록 2003.05.09 19:46수정 2003.05.11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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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윤동주 생가' 마을을 알리는 표지석

'윤동주 생가' 마을을 알리는 표지석 ⓒ 박도

명동촌

12시 30분, 항일 독립운동 요람지 용정(龍井) 시가를 벗어나 30여 분 비포장도로를 더 달린 끝에 마침내 윤동주(尹東柱) 시인이 태어난 명동 마을에 이르렀다.


동네 들머리에 ‘윤동주 생가’라고 새긴 큰 바위 덩어리가 세워져 있어서 쉽게 마을을 찾을 수 있었다.

이곳은 아직도 1930년대의 초가집들이 듬성듬성한 20여 호 정도의 자그마한 마을로, 시심이 저절로 우러나올 만큼 주변 산수가 빼어나게 아름다웠다.

a 명동촌 언저리 산수

명동촌 언저리 산수 ⓒ 박도

이 명동 마을은 사방이 산으로 병풍처럼 둘러싸인 분지로써 퍽 아늑했다. ‘인걸은 지령(地靈)이라’ 하더니, 이렇게 아름다운 고장이었기에 위대한 시인이 탄생했나 보다.

윤동주 시인의 생가는 큰 도로에서 좁은 길로 100여m 내려가자 명동 교회와 나란히 붙은 첫 집이었다.

교회 들머리에는 마을 주민 대여섯 분이 카세트테이프를 틀어놓은 채, 낯선 방문객을 호기심 어린 눈길로 바라보았다.


개가 하품을 할 정도로 무료하고 조용한 마을에 문명의 소리 -카세트에서 흘러나온 랩 음악-는 그곳을 찾은 나그네에게는 한낱 소음으로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마을 주민들로서는 방문객을 환영하기 위해 틀어놓은 음악인 지는 몰라도.

a 명동 교회 옆 종을 걸어두었다는 나무와 김약연 선생 송덕비

명동 교회 옆 종을 걸어두었다는 나무와 김약연 선생 송덕비 ⓒ 박도

생가로 가자면 교회 마당을 거쳐야 했다. 교회로 들어서자 두 젊은이가 불쑥 나타나서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두 사람 다 조선족 청년으로 우리말이 유창했다.


한 젊은이는 비치파라솔을 펴놓고 그곳 특산물인 삼베, 약재 따위를 좌판에 잔뜩 늘어놓았다. 나는 예의상 좌판의 상품을 설핏 훑고는 교회 한 쪽에 있는 비석에 눈길을 돌리자, 다른 한 젊은이가 얼른 앞장서면서 친절하게 안내했다.

그 비석은 명동 교회를 세웠던 목사요, 독립운동가이며, 명동소학교 교장이었던 김약연 선생 송덕비였다. 유감스럽게도 비석 머리 부분은 떨어져 나갔다.

비석 바로 뒤편에는 100여 년을 더 지났을 고목이 녹음을 잃지 않은 채, 우람하게 서 있었다. 젊은 날 윤동주가 이 교회에서 봉사할 때는 교회 종을 이 나무에 매어두고 종을 울렸다고 했다.

교회는 단층 한옥 건물로 벽은 회칠을 한 기와지붕이었다. 안내하는 청년이 건네준 ‘명동교회당 건물 소개’ 팸플릿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명동교회는 창립 당시인 1909년에 8간 집을 사서 예배당으로 사용하다가 1916년에 김약연 목사의 주선 아래 지금의 명동교회당 건물을 세우게 되었다.

a 명동 교회 예배당

명동 교회 예배당 ⓒ 박도

명동교회당 건물은 연변에서 가장 일찍이 세워진 건물 중의 하나로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1993년 4월, 룡정시 지산동 명동촌이 룡정시 관광점으로 된 후 룡정시 인민정부에서는 명동교회당 건물을 문물보호단위(문화재 보호)로 명명하였으며 지산향 인민정부에서는 한국해외민족연구소의 협찬으로 1994년 8월에 새롭게 수선하였다.

1994년 8월 29일
룡정시 지산향 인민 정부

【시인 김규동 선생의 김약연(金躍淵) 선생에 대한 회고담】

a 비석 머리가 잘린 김약연 선생 송덕비

비석 머리가 잘린 김약연 선생 송덕비 ⓒ 박도

김약연 선생은 너그럽게 생기신, 머리가 하얀 노인으로 일 년에 두어 번 종성 우리 집에 오셨지요.

병원을 경영하시던 아버님이 김약연 선생님 오실 때는 그때 돈 200원 혹은 300원을 독립자금으로 내놓곤 하시는 걸 저는 어릴 때 보고 자랐습니다.

제 아버님은 문익환 목사의 선친 문재린 목사와 명동학교 동창이었다고 합니다.

이런 일 때문에 아무 것도 모르시는 우리 어머니는
“너희 아버지는 돈 없는 사람한테는 약값도 받지 않고 치료하고, 겨우 겨우 먹고살 만큼 돈푼이나 모아놓았는가 하면 감약연 선생님 오시면 지전으로 곱게 인두로 다려서 그것을 흰 수건에 곱게 싸서 무릎을 꿇으시고 선생님한테 내놓으셨단다.

그리고는 너희들한테는 된장국이나 좁쌀 밥만 먹였단다.

규동아, 너는 입쌀밥이 그토록 먹고 싶다하지만 아버지가 좁쌀 밥하라는 데 너만 입쌀밥 어떻게 먹일 수 있겠느냐?”

어머니는 이와 같은 하소연 같기도 하고, 탄식 같기도 한 이야기를 더러 하셨지요.

지금 생각하면 어머니는 독립운동이 어느 만큼이나 중하고 급한 것인지를 모르시는 탓으로 하신 말씀으로 생각합니다.
- 2000년 11월 7일 김규동. 필자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a 김규동 선생님의 편지

김규동 선생님의 편지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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