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빛나'는 못말려

<내 추억 속의 그 이름 76>딸들의 편지

등록 2003.05.12 15:15수정 2003.05.12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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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큰딸 푸름이의 편지

큰딸 푸름이의 편지 ⓒ 이종찬

"푸름 그리고 빛나!"
"아빠아~"
"그래. 저녁은 먹었어?"
"응. 근데 잠깐만"
"왜?"
"여기"
"아빠! 내가 달아줄게"


지난 토요일 밤이었다. 그날 내가 9시쯤에 집에 도착하여 막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푸름이와 빛나는 오래 기다렸다는 듯이 빨간 카네이션을 내밀었다. 그리고 두 딸들은 서로 자기가 먼저 내 가슴에 꽃을 달아준다며 난리법석을 떨었다.

"아빠 이거 선물이야"
"선물은 무슨... 이게 뭔데?"
"어서 풀어봐"
"어, 이게 무슨 컵이야?"
"녹차 걸러먹는 컵이야"
"왜 이렇게 비싼 걸 샀어?"
"아빠 건강하라고"

큰딸 푸름이는 그동안 모은 용돈을 몽땅 다 털어, 백화점까지 가서 그 컵을 샀다고 했다. 참으로 기특했다. 그리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올해 열세 살 먹은 큰딸이 벌써 제 아빠 건강까지 걱정할 정도로 마음 씀씀이가 깊어졌단 말인가.

언제나 절 사랑해주시는 부모님께...

엄마, 아빠 안녕하세요? 저, 큰딸 푸름이에요. 어버이날도 얼마 남지 않았고 해서 이렇게 편지를 씁니다.


음.. 우선, 죄송하다는 말부터 올립니다. 그동안 툭하면 짜증내고, 회풀이하고, 결국 부모님까지 저로 인해 화가 나셨었죠? 그럴 때마다 오히려 제가 더 화를 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까 왜 제가 화를 냈는지 이해가 안 가네요. 앞으로 그러지 않도록 할게요.

또, 감사하다는 말도 해야겠어요. 13년 동안, 저를 이렇게 별 탈없이 키워주신 부모님께 감사하단 말 한번 제대로 못했네요. 늘 다른 아이들과 비교해 보시면서, 저를 뒤처지지 않는 딸로 키우기 위해서 얼마나 힘드셨어요? 피아노, 미술, 수학, 영어, 과학이며 제가 부족하다 싶은 것들을 채워주시려고 하시는 맘도 이해 못하고...


앞으로, 부모님 마음과 생각에 걸맞는, 뒤쳐지지 않는 딸로 크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부모님, 늘 감사하고, 죄송한 마음을 이렇게 편지로 표현해 봤습니다. 늘 사랑하고, 감사해요!
2003. 5. 6. 화요일
엄마 아빠의 큰딸 푸름 올림


그랬다. 이제 큰딸은 내가 만만하게 볼 정도의 어린애가 아니었다. 제 자신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 솔직하게 표현할 줄 알고, 부모의 마음까지도 어느 정도 궤뚫어 볼 줄 아는, 제 외할머니 말씀대로 표현하자면 속에 꼬리 아홉 달린 여시가 몇 마리나 든 애어른이었다.

내가 막 큰딸의 편지를 다 읽고 뿌듯한 마음으로 푸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있을 때, 제 방에 들어가 무언가를 열심히 찾고 있던 빛나의 표정이 갑자기 뾰루퉁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금새 두 눈에 눈물방울이 글썽글썽했다.

"빛나야! 갑자기 왜 그래?"
"아빠! 아빠에게 써 놓은 편지가 없어졌어"
"그래. 괜찮아. 그 대신 빛나는 아빠한테 카네이션을 두 송이나 달아줬잖아"
"한송이는 선물로 만들었던 거란 말이야"
"???"
"아빠! 잠깐 기다려"

큰딸 푸름이는 엄마와 아빠에게 보내는 편지를 같이 썼다. 하지만 빛나는 엄마와 아빠에게 보내는 편지를 따로 따로 썼다고 했다. 그리고 한 통은 어버이날 아침에 엄마에게 전해주고, 나머지 한 통은 내가 집에 오면 전해주기 위해 제 책상 서랍에 넣어뒀다고 했다. 그런데 그 편지가 아무리 찾아도 없다며 다시 쓴다는 것이었다.

a 작은딸 빛나의 편지

작은딸 빛나의 편지 ⓒ 이종찬

To 엄마에게

엄마 안녕하세요? 저 빛나예요 ^-^ *
오늘은 어버이날이에요. 그래서 오늘은 딸이 학교에서 땀을 흘리면서 카네이션을 만들었답니다. 그리고 제가 엄마에게 카네이션을 달아드리고, 제가 엄마 도와드리는 일을 할 거예요.

엄마. 제가 오늘은 특별히 어버이날이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맨날 그러고 싶었지만 엄마가 항상 그러시잖아요~ "가만이 있는 게 도와주는 거다" 이러시면 저는 어떻게 엄마를 도와요.
그래서 저는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답니다~

엄마, 있잖아요. 어버이날인데 있잖아요. 저희가 놀아드려야 되는 거 아니에요? 이런.. 킥킥.. 하지만 엄마 저는요 <아까 그거 장난이에요> 이제부터 엄마가 말하는 말에 틱틱거리지 않고 말 잘 듣는 빛나가 될게요~. 그럼 오늘 하루 즐겁게..

2003년 5월 8일 화요일
-빛나 올림-


빛나가 엄마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장난끼가 제법 배어 있었다. 하지만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거다" 란 제 엄마의 말만 아니었다면 빛나는 제 나름대로 무언가를 돕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그랬다. 빛나는 평소에도 내게 아빠, 나도 설거지 한 번 해봤으면 좋겠다고 했다. 왜냐고 물으면 늘 그냥, 이라고 대답했다.

그랬다. 큰딸 푸름이는 대체적으로 성격이 꼼꼼하고 빈틈을 잘 보이지 않았다. 그에 비해 작은딸 빛나는 무엇이든지 대충 대충하는 성격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빛나는 모든 일에 늘 여유가 있어 보였고, 푸름이는 늘상 바쁘게 지내는 것만 같았다.

식사를 할 때에도 그랬다. 푸름이는 편식이 심했다. 또 제가 좋아하는 음식 외에는 젓가락 한번 가지 않았다. 하지만 빛나는 달랐다. 빛나는 김치뿐만 아니라 무엇이든지 잘 먹었다. 그리고 어떤 때 새로운 음식이라도 상에 올라오면 아빠, 이건 무슨 음식이야, 그리고 어떻게 먹어, 라며 호기심 어린 눈으로 묻곤 했다.

"아빠! 상치가 왜 이렇게 생겼어?"
"왜?"
"상치가 꼭 파마를 한 것 같아"
"그래? 그럼 지난번에 먹었던 상치는 어땠는데?"
"그때 먹은 상치는 생머리 상치였잖아"
"생머리 상치?"
"그래"
"그럼 오늘 먹는 이상치는 파마상치겠네?"

하여튼 새로운 음식이 상위에 올라올 때마다 빛나의 상상력은 어디로 튈지 모른다. 게다가 빛나는 무엇이든지 새로운 것만 보면 반드시 내게 물었다. 그리고 왜? 하면서 늘 그 이유를 묻곤 했다. 그런 빛나의 풍부한 상상력은 종종 내가 글을 쓸 때 도움이 될 때도 제법 있었다.

"아빠! 다 썼어"
"벌써?"
"근데 날짜가 왜 5월 8일이야?"
"그때 쓴 거거든"

받는 사람:우리 아빠
보내는 사람:이빛나
날짜:2003년 5월 8일. 어버이날

To 우리 아빠

아빠 안녕하세요? 저 빛나예요.
오늘은 어버이날이에요. 어버이날이 되면 아빠한테 카네이션도 달아드리고 편지도 주어야 하는 날 ^_^
아빠는 일하기도 바쁜데 이거 볼 시간이 있을라나 모르겠네요. 아빠..
아빠! 내가 메일로 아빠한테 보내면 안돼? 그럼 아빠가 확인하면 되잖아요.
아빠 그러니까 메일에서 만나요?!
지금은 손에 힘이 없어서 그래요 ㅠ_ㅠ
아빠 그럼 오늘 하루 즐겁게 보내세요~ ^_^


그랬다. 채 1분도 되지 않아 아빠에게 보내는 편지를 다 썼다며 빛나가 들고 온 그 편지에는 별다른 내용이 없었다. 하지만 편지지 곳곳에는 코고 작은 하트 모양이 수없이 그려져 있었다. 그날도 빛나는 평소 습관대로 대충대충 처리하는 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한 것이었다.

"이게 다야?"
"아빠 메일로 다시 보낼게"
"하여튼 우리 빛나는 못말려"

그 이후 이틀이 지나도록 빛나는 내게 메일을 보내지 않았다. 오후에, 빛나가 학교를 파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메일을 보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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