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공계 학생들은 '앵벌이'가 아니다

한국과학기술원 풍동실험실 폭발사고에 부쳐

등록 2003.05.14 10:28수정 2003.05.14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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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3일 오후 3시쯤 한국과학기술원(KAIST) 풍동실험실에서 폭발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고로 실험실 안에 있던 항공우주공학 전공 박사과정 2년차 조정훈(25)씨가 숨졌으며 같은 전공 박사과정 4년차 강지훈씨(28)가 다리가 절단되는 중상을 입고 충남대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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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사고는 한국과학기술원(KAIST)이 일반 대학보다 실험실 안전에 관해 상대적으로 관리가 잘 되고 있었다는 사실에 비추어볼 때 이공계 대학원생들의 안전 문제에 큰 경종을 울려주고 있다.

이와 비슷한 대학 실험실에서의 인명 사고는 지난 1999년 9월 18일 서울대 원자핵 공학과에서 발생했다. 당시 한 중소업체가 의뢰한 다이나마이트 대체 폭발물을 개발하던 석박사 학생 3명이 실험물질 폭발로 귀중한 생명을 잃었다.

작년 9월에 과학기술인연합(www.scieng.net)이 국내 이공계 대학원 학생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 조사에서 나타나듯 현재 이공계 대학원생들은 노동력 착취와 불안정한 미래 등으로 그 사기가 바닥에 떨어져 있다. 이런 상황에서 사고를 당할 위험이 높다는 사실까지 여실히 드러남으로써 최근 가속화하고 있는 이공계 대학원 공동화 현상이 더욱 심화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선다.

현재 우리나라의 이공계 대학 연구개발 현장이 대형사고가 나지 않는 것이 신기하다고 할 정도로 사고 위험에 노출되어있는데도 정부 차원에서 근본적인 대책을 미루고 있는 것이 한심하고 답답하다.

이미 오래 전부터 이공계 대학원생들 사이에서는 '학위를 따기 위해서 목숨을 건다'는 자조섞인 얘기가 흘러 나오고 있다. 그나마 '목숨을 걸' 가치라도 있던 10여 년 전에는 자신의 안전을 돌보지 않고 위험이 가득한 실험실에서 밤을 새면서 연구에 열중을 했지만 이제는 목숨 걸고 학위를 딸 당위성 마저 사라졌다. 이러한 현실이 우리나라의 미래를 몹시 어둡게 하고 있다.

현재 전국 이공계 대학의 대학원 실험실은 대부분 교수 개인이 책임지고 운영한다. 실험실 1년 예산도 교수가 기업이나 정부에서 따오는 프로젝트 연구비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따라서 교수들은 원하는 실험 결과를 되도록 빨리 얻어야 실적을 인정받고 이후 다른 프로젝트를 따낼 수 있다.


당연히 시간에 쫓기고 학생들을 독려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다. 학생들 역시 1주일에 한번 있는 교수와의 회합에서 실험 결과를 내놓아야 하는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기 때문에 안전문제는 항상 뒷전일 수밖에 없다.

이런 현실을 살펴볼 때 대학 실험실 사고 발생의 근본적인 원인은 정부가 대학을 학문하는 '교육의 장'으로 바라보기보다는 돈 버는 것을 개발하는 '사업장'으로만 보려는 태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투자 대비 이윤'이라는 획일화 된 척도에 맞추기 위해 이공계 대학은 가능한 적은 투자로 당장 돈 버는 실적을 올리는데 혈안이 될 수 밖에 없다.


정부 당국자들은 이 한가지를 알아야 한다. 대학은 결코 기업이 아니며 이공계 학생들은 이른바 '노가다'나 '앵벌이'가 아니다. 앞으로 계속 이런 왜곡된 정책으로 나아간다면 이공계 실험실은 텅비어버리고 먼지만 쌓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번 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고인의 명복을 빌며 지난 1999년 원자핵공학과 사고로 과 친구를 잃은 한 학생이 게시판에 남겨둔 낙서를 소개한다.

'학교에서마저 산업 재해라니 이건 정말 곤란하다. 그저 도서관에서 책 잡고 공부하는 걸로 족한 길을 택했다면 이런 재난을 당하지는 않았을 텐데. 마음이 착잡하다. 특별한 대상은 없지만 몹시 분하기도 하고(정확히 이야기하자면 분개의 대상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대상이라는 것이 관료 우선의 중세적 사회 분위기라든가 혹은 그런 류의 인식 부재이니. 구체적인 대상이라기엔 약간 어폐가 있다. 그런 사고를 가진 사람들을 미워할 수 있다면 얘기가 또 다를 것이지만 그렇지는 않으니까).

엔지니어를 홀대하는 나라에 미래란 없다는 걸 아직도 잘 모르는 모양이다. 엔지니어들이 냉소적인 아나키스트가 되어버리고 나면 그야말로 다들 들판에 나가 아귀다툼하며 삽질이나 해서 근근히 먹고 살게 될 텐데. 이 사실을 잘 모르는 모양이다. 이토록 흥청거릴 수 있는 물적 기반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무도 모르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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