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호 주도, 왜 나를 먼저 부르냐"

특검팀, 이근영 전 금감위원장 구속 수감

등록 2003.05.23 16:15수정 2003.05.24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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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22일 저녁 7시 40분경 이근영 전 금감위장이 23일 법원의 영장실질심사 앞두고 서울구치소로 이송됐다.

22일 저녁 7시 40분경 이근영 전 금감위장이 23일 법원의 영장실질심사 앞두고 서울구치소로 이송됐다. ⓒ 오마이뉴스 유창재

<3신: 24일 오전 3시 10분>

이근영 전 금감위장 구속영장 발부...서울구치소 그대로 수감


'대북송금' 의혹사건을 수사중인 송두환 특별검사팀은 2000년 산업은행이 현대상선에 4000억원을 대출해 줄 당시 산은 총재였던 이근영 전 금융감독위원장을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업무상 배임혐의'로 구속 수감했다.

서울지법 최완주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이씨에 대해 "도주 및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다"면서 영장을 24일 발부했다.

이근영씨는 전날(23일) 오전 11시부터 2시간 동안 이근영씨에 대한 구속영장 실질심사를 벌였으며, 이후 서울구치소에 임시 유치돼 있다가 그대로 수감됐다.

특검팀은 수사개시 이후 처음으로 이씨를 구속 수감함으로써 지금까지 소환, 조사를 받은 인물뿐만 아니라 앞으로 소환될 관련 핵심 인사들에 대한 사법처리 여부가 주목된다.

<1, 2신 최종 종합 편집: 24일 오전 2시 40분>


"이기호 전 경제수석이 현대대출 직접 관여했다"


"이기호 전 경제수석에게서 현대건설에 돈을 지원해 주는 것이 어떻겠냐는 지시를 받았고, 이에 박상배(당시 산은 영업1부장)씨에게 현대건설은 자금지원 여건이 안되고 현대상선에 대출해 주는 것이 어떻겠냐는 보고를 받았다. 이런 내용을 전화로 이기호 전 수석에게 보고했더니 수긍했다."


이기호 전 청와대 경제수석이 지난 2000년 6월 경제관계장관회의 때 산은이 현대 측에 4000억원을 대출해 주도록 지시하는 등 사실상 대출과정을 주도했다는 진술이 나와 파문이 일고 있다. 이같이 진술한 인물은 이근영 당시 산업은행 총재. 23일 서울지법 319호 법정에서 최완주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구속영장 실질심사 과정에서 불거져 나왔다.

이씨는 또 당시 회의에는 이용근 금감위원장도 참석했으며, 이 전 수석은 처음부터 현대그룹 계열사 중 현대건설을 지목해 자금을 대출해 주라고 했다고 주장했다. 이씨는 당시 이 전 수석이 여러 차례 전화해 와 현대그룹에 자금을 지원해 줄 것을 전해 들었다고 한다.

이근영 전 총재는 이 전 수석의 말을 듣고 박상배 당시 산은 영업1부장을 통해 현대그룹에 대한 실태조사를 했으며, 박씨는 "현대건설에 대출은 불가능하나 유가증권이나 회사채 매입은 가능하다. 왜냐면 언제나 매각이 가능하기 때문에 이를 통해 지원 가능하다"는 보고를 받았다고 한다. 이런 내용을 이 전 수석에게 전화로 보고하자 "그럼 현대상선만 해라"고 '수긍했다'고 주장했다.

특히 이근영씨의 다음 진술은 당시 회의에서 이기호씨가 한 말로 현대 대출에 외압이 있었다는 의미와 대북송금 사이에 연관성이 있는 게 아니냐는 의혹을 뒷바침하고 있다.

"현대는 햇볕정책, 남북경협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현대가 어려워지면 햇볕정책에 지장이 생기고 남북 경협에 많은 어려움이 따를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국정원도 알고 있다. 대우가 부도나면서 우리 경제가 위기를 맞았다. 현대가 망하면 우리 경제도 망한다."

하지만 이씨는 '국정원이 같은 생각이란 게 무슨 의미냐'는 질문을 받자 "국정원이 대북정보 보고를 하는 위치에 있기에 (이기호씨가) 그렇게 말한 것 같다"면서 "현대 지원자금이 대북송금에 쓰인다는 얘기는 없었고 (전혀 듣지도 못했으며) 남북 관계에 연관됐는지, 돈이 북한으로 보내지는 줄 전혀 몰랐다"고 말했다.

이근영씨는 대출을 승인한 것은 단지 당시 유동성 위기를 겪고 있는 현대그룹이 부도가 나면 국가 경제전체에 타격을 입을 것이라는 판단이 내려져 대출을 승인해줬다고 진술을 했다.

이와 같은 이근영씨의 진술은 결국 당시 현대 측 대출과정은 '박상배↔이근영↔이기호' 세 사람의 보고라인이 구성됐다는 의미로 분석된다. 나아가 대출과정에 이기호 전 경제수석이 직접 관여했고, 정계 고위층의 외압이 있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때문에 '대북송금' 의혹사건 1차 수사 결과가 한달여 남은 시점에서 특검팀이 사실규명하고 있는 현대대출 문제 및 남북정상회담 대가성 문제 등 전체적인 수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이근영 전 산은 총재 "왜 나만 구속하려 하냐, 억울하다"

a 22일 특검팀으로부터 구속영장이 청구된 이근영씨는 이날 오후 7시 40분경 특검사무실을 빠져나오면서 기자들 질문에 "법원에서 이야기합시다"라고만 답하고 서울구치소로 향했다.

22일 특검팀으로부터 구속영장이 청구된 이근영씨는 이날 오후 7시 40분경 특검사무실을 빠져나오면서 기자들 질문에 "법원에서 이야기합시다"라고만 답하고 서울구치소로 향했다. ⓒ 오마이뉴스 유창재

특검 수사개시 이래 처음으로 '사법조치'를 받은 이근영씨는 엄무상 배임 혐의에 대해 "책임을 회피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왜 나만을 구속하려하는지 억울하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이근영씨는 특검 시작 며칠 전 특검의 소환을 준비하면서 대출 전결권자인 박상배 전 부총재를 자신의 역삼동 사무실로 불렀다고 한다. 이 자리에서 당시 현대 상황과 언론 보도 정리, Q&A 등의 내용이 담긴 16장 짜리 서류를 박씨에게 보여주며, "나이가 들어 내 기억이 맞는지 적어봤다. 기억이 틀린 것들을 지적해 달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에 박상배씨는 "안경을 가져오지 않아 안보여서 모르겠으니, 집에 가져가서 보여주겠다"고 말했고, 그래서 이씨는 본인이 직접 만든 자료를 아무 생각없이 박씨에게 전냈다고 한다. 이후 특검팀은 박상배씨 자택 압수수색에서 이 자료를 발견, 압수했다.

이씨의 변호사는 "지금 생각해 보니 당시 박상배씨가 이 자료를 가져간 것이 여차하면 이근영씨에게 뒤집어씌우려고 했던 것 같죠"라고 묻자, 이씨는 "그렇게까지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참고인 조사 받으면서 생각해보니 그런 의도였던 것 같다"고 대답했다.

특히 이씨는 "이기호씨가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는데 왜 그를 조사하지 않고 나를 먼저 부르느냐"면서 "특검은 (내가) 증거인멸 우려가 있다고 하지만 이기호씨의 확인없이 왜 나만 구속하려 하냐, 언제라도 부르면 (나는) 올 것인데 구속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외에도 이근영씨는 영장실질심사에서 △한광옥 전 비서실장과의 통화 여부 및 내용 △현대의 주거래 은행인 외환은행이 아닌 산업은행에서 대출된 경위 △김충식 전 현대상선 사장과 대면 등 당시 현대 측 대출문제를 둘러싼 전반적인 배경에 대해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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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호 전 경제수석 "현대그룹 전체 유동성 극복 차원에서 대출 이뤄진 것"

이날 이근영씨의 발언이 파문이 일자 이기호 전 경제수석의 변호를 맡은 최재천 변호사(법무법인 한강)은 곧바로 특검취재진을 찾아와 이 전 수석의 입장을 전했다.

최 변호사는 "현대건설의 유동성 문제는 당시 누구나 알고 있던 부분으로 그때 언론보도를 봐도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다"면서 "현대그룹 전체의 유동성 극복이라는 맥락에서 이뤄진 대출을 마치 이 전 수석이 북측으로 송금될 것을 알고 대출을 지시 내린 것으로 진술한 것에 대해 유감을 표한다"고 해명했다.

다음은 최재천 변호사와의 일문일답.

- 이 자리에 직접 나와 해명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근영씨가 마치 이기호 전 경제수석이 (대북송금이 이뤄질 것을) 다 알고 주도한 것처럼 이야기했는데 사실과 다르다. 특히 이 전 수석은 (이근영씨 진술에) 외압이 있을 것이라는 불필요한 오해가 내려질 것을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다."

- 당시 산은의 현대상선 대출을 이기호 전 수석이 요청했다고 했는데?
"(현대 대출은) 당시 채권단회의에서도 논의됐던 부분이며, 그때 언론보도를 보면 이에 대해 자세하게 나와있다. 이 전 수석은 산은에서 대출된 부분에 대해 국책은행인 산은 쪽에서 대출을 해주면 어떻겠냐는 의견을 전했을 뿐이지 직접 관여하지 않았다."

- 이근영씨는 이기호씨가 '경제관계장관회의'에서 현대 측에 돈을 대출해 주라고 했다고 했지 않냐.
"이근영씨가 주장하는 2000년 6월 3일 '경제관계장관회의'의 정확한 명칭은 '경제관련대책회의'다. 이 회의는 당시 경제관련 실무자들이 비공식적으로 정기적으로 만나 경제 위기 사항 등 전반에 대해 논의하던 연속적인 회의였을 뿐이다. 여기서 현대그룹의 위기극복에 대한 '논의'는 분명히 있었지만, (현대건설에) 대출하라고 '지시'는 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 이기호 전 경제수석의 최근 동향은 어떠하며, 이근영씨 진술에 대해 뭐라고 하나.
"최근 '대외경제연구원'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이기호 전 경제수석은 이날 이근영씨의 진술에 대해 '대단한 유감으로 생각한다'는 입장이다."

이근영씨, 법원에서 '이야기했다'
이근영씨 구속영장 실질심사 현장 이모저모

▲ 출입문 틈으로 들려오는 이근영 전 산은총재의 진술을 듣기 위해 기자들이 소위 '귀대기'를 하고 있다.
ⓒ오마이뉴스 유창재
'대북송금' 의혹사건을 수사중인 송두환 특검팀은 지난 20일 밤 11시 45분경 이근영씨를 '긴급체포' 했으며, 22일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업무상 배임혐의로 서울지법에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23일 오전 10시 30분으로 예정된 영장청구 실질심사가 있을 서울지법 319호 법정 앞에는 이근영씨를 취재하기 위해 오전 9시경부터 기자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특히 전날 서울구치소로 이감된 이근영씨는 기자들의 카메라를 피하기 위해서인지 예정시간보다 이른 오전 9시 10분경에 서울지법에 도착했다. 특검팀 김종훈 특검보와 박광빈 특검보는 이날 오전 10시 30분경 시간에 맞춰 왔다.

서울지법 최완주 부장판사 심리로 오전 11시부터 시작된 이근영씨 영장실질심사에는 이씨를 비롯해 변호인으로 문영식, 이건행 변호사가 함께 자리했으며, 김종훈, 박광빈 특검보가 배석했다.

심리에 앞서 김종훈 특검보는 "영장실질심사는 변호사에게 변론할 기회를 주는 것"이라며 한시간 정도면 영장실질심사가 끝날 것으로 예상했다. 또한 특검팀에서 두 명의 특검보가 나온 것에 대해 "법원 및 상대방에 대한 예우 차원"이라며 취재기자들과 가벼운 이야기를 주고받고 심리가 시작되길 기다렸다.

이근영씨의 변호인인 문영식 변호사는 "업무상 배임 혐의라 하는데 이근영씨는 금감원 내부 절차와 규정에 따라 대출을 진행한 것이며, 만일 위배했다하더라도 돈은 돌려 받기만 한다면 죄가 안되는 것은 아니냐"면서 "이근영씨는 내부 정비가 안돼 있는 상황에서 업무를 했으며, 대출 사실을 실제로 보고 받고 업무를 한 것은 2000년 8월부터로 금감원의 구체적인 규정 실은은 8월부터 됐다"고 말했다.

319호 법정에서 진행된 영장실질심사는 비공개로 진행됐으며, 심리가 시작되자 밖에 있던 10여명의 기자들의 취재는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취재방식은 법원 출입기자들이 말하는 소위 '귀대기(또는 벽치기)'. 잠겨진 법정 출입문의 틈새를 통해 작게 들려오는 소리를 귀를 문에 붙이고 듣는 것으로 기자들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달라붙었다.

문틈으로 들리는 피고인의 진술 내용을 조금이라도 듣기 위해 밀착.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목 근육이 쑤시고, 다리가 절여오는 데도 하나라도 더 듣기 위해서 그 누구도 문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귀가 빨개지도록 찰싹 붙어있던 고생의 대가인지 이날 특검 수사에 파문을 몰고 온 이근영씨의 진술을 기자들은 확보(?)했다.

한 시간 가량 걸릴 것으로 예상됐던 영장실질심사는 뜻하지 않는 이근영씨의 발언으로 두 시간에 걸쳐 진행됐으며, 오후 1시가 조금 넘어서 끝났다.

영장실질심사가 시작되기 전까지 누구도 이근영씨가 어떤 진술을 할 것인지 몰랐었다. 이근영씨는 전날(22일) 특검사무실에서 3일간의 조사를 받고 나오면서 기자들에게 "법원에서 이야기합시다"는 말을 남겼었는데, 결국 파장을 예고하겠다는 의미를 남겼던 것으로 풀이된다.

심리가 끝나고 나오는 김종훈 특검보와 박광빈 특검보의 얼굴은 담담한 표정이었으며, 이씨의 변호인 측 문영식 변호사의 표정은 약간은 붉게 상기돼 있었다. / 유창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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