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꽃 피는 밤 사전 베고 나눈 밀담과 사감 선생님

<만나고 싶은 우리 꽃과 나무16>등나무꽃

등록 2003.05.26 16:36수정 2003.05.26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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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나무는 참 이상하다. 나무인가? 나무라 하기엔 줄기가 곧지 않고 넝쿨인가 싶으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왜 넝쿨을 나무라 할까? 그렇다면 풀인가 하면 풀은 영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하여튼 이것저것 생각나게 만드는 등나무. 등나무에 얽힌 사연을 풀어놓고 싶다.


a 등나무꽃1

등나무꽃1 ⓒ 김규환

목사가 된 은호와 등나무 아래서 쌓아갔던 추억

등나무는 이렇든 저렇든 꽃 피어 사람을 즐겁게 하는 재주와 물기만 조금 있는 땅이면 나무든 쇳덩어리든 건물이든 바윗덩어리든 가리지 않고 휘휘 감아 타고 올라가 그늘을 만들어주니 감사할 따름이다. 담쟁이도 좋지만 꽃이 어디 등나무에 견줄만한가?

내가 다닌 고등학교에도 등나무가 있었다. 건물 쪽으로는 화단이 조성되었고 교실에서 운동장을 바라보면 반대쪽에 기다랗게 만들어진 100여 m나 되는 시멘트 스텐드에 줄줄이 등나무를 올렸다. 그 때는 아이들이 등나무를 올린 철로 만든 통 지주 사이를 빠져나가 광주로 땡땡이깨나 치던 곳이다. 바로 건너편이 ‘창평 5일장’이 바라보이는 논이었으니 그 학교 5회였던 내가 다닐 적에도 무럭무럭 자라 그 무성함을 한껏 자랑하고 있었다.

2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은호와 학교 기숙사에 있었다. 목사님 동생이었던 은호는 하동군 토지면과 섬진강으로 경계를 이루고 있는 구례군 문척면 출신이다. 우리 사이가 남다르게 친했던 까닭이 몇 가지 있다. 같은 반인데다가 1학년 1학기 잠깐 자취생활을 할 때 창평면 삼천리라는 마을에서 같이 살면서 오가다 만난 적이 여러 번 있었기 때문이다. 자율학습 시간에는 특별반에 같이 배정되기도 했다.

a 등나무꽃2

등나무꽃2 ⓒ 김규환

야간 학습을 마치고 기숙사 도서관에서 밤 11시 40분까지 2시간을 반(半) 강제로 공부를 더 해야했던 우리는 첫 시간은 조금 앉아 있는 척 하다가 사감선생님이 나가시는 틈을 보아 미리 사 둔 비스킷과 빵, 음료수 한 병을 들고 그곳으로 갔다. 겨울 한 철 빼고 한결 같았다.

5월 말 쯤 하양 바탕에 검정 버섯이 헤아릴 수 없이 그려진 나일론 70% 짜리 교련복을 위아래로 걸치고 슬리퍼 질질 끌고 운동장 흙바닥 먼지 풀풀 일으키면서 그곳에 도착해 보면 아까시 향기만큼이나 진한 내음이 현기증을 일으킬 정도로 코를 찔렀다. 늘 하던 대로 걸치고 간 윗도리를 벗어 시멘트 계단에 깔고 준비해간 영어사전을 베개삼아 얘기하기 좋게 서로 머리를 맞대고 반대로 누웠다.


서로 모로 누워 마주보다시피 하다보니 평소 입 냄새가 다소 있었던 그 아이였지만 오뉴월 등나무꽃 필 때는 어떤 냄새도 나지 않고 꽃향기만 풀풀 났다. 이슥한 밤이라 꽃이 하얗게 피는지 분홍인지 노랗거나 빨간 건지는 확인할 방법도 없었거니와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누워서 과자와 음료수를 먹다 가끔 올려다보면 3m쯤 되는 높이에 줄줄이 매달고 있는 꽃이 칡꽃 닮았다는 것만 알아차릴 수 있었다. 꽃이 지면 콩깍지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으니 선입관이 작용한 탓일까?

a 등나무꽃3

등나무꽃3 ⓒ 김규환

우리는 은호라는 친구가 짝사랑했던 여자친구, 내 중학교 때 있었던 몇몇 여자들 이야기를 기본 양념으로 하여 기독교도인 그 친구의 종교관과 철학이야기를 부재료로 쓰고 학력고사와 성적 등 대학진학에 관한 이야기를 주 메뉴로 하여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나갔다.


그러기를 2학년 봄부터 시작하여 3학년 가을까지 이어갔으니 나눴던 이야기가 대단히 많을 것 같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매번 하던 얘기가 그 얘기였으니 말이다. 공부해야 할 시간에 무슨 과목은 몇 개 틀리고 쉬운 과목은 다 맞춰 서울 소재 국립 ‘ㅅㅇ대학’을 가겠다는 허황된 꿈만 꾸고 있었던 것이다.

선생님이 우리를 찾고 있다는 사실도 잊고 시간이 어찌 되었는지도 모르게 보냈던 그 나날들. 매일 같이 그렇게 했어도 별일이 없었으니 ‘간댕이’가 부은 건 당연하다. 체육시간과 교련시간에야 나는 등꽃을 정확히 한 번 확인한 적이 있다. 등꽃 흐드러지게 피어있던 날 기분이 째지게 좋았던지 그 곳에서 이선희의 <아, 옛날이여!>를 주동하여 부르다가 반 전체가 기합을 받게 했던 장본인도 나였다.

그 친구도 등나무 꽃을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아이 셋을 둔 목사가 되었단다.

a 등나무꽃4

등나무꽃4 ⓒ 김규환

웃지 않고는 못 배길 사감선생님과 얽힌 이야기

1년을 넘기고 3학년 5월이었다. 하루는 천형(天刑)처럼 달고 다녔던 두드러기가 재발했다. 열흘이 멀다하고 나타났다. 원인은 ‘짜장밥’에 있었다. 짜장밥에 깨알같이 몇 점 들어간 돼지고기 때문이었다. 한 번 났다하면 손, 발, 다리, 겨드랑이, 어깨는 물론이고 머릿속을 견딜 수 없게 만든다. 심지어는 입술을 까뒤집어 놓고 눈탱이까지 밤탱이가 되게 만들고 사타구니 등 곳곳 아니, 온몸을 부어오르게 하여 공부를 도저히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체력이 고갈될 대로 고갈된 3학년을 그렇게 보냈다.

그 날은 은호와도 같이 있지 않았다. 그냥 보기도 15kg 정도는 더 나가게 보이는 이상한 사람이 되었으니 어디론가 피신을 하던가 밖에 나가 미친 놈 마냥 쏘다니고 와야 진정될 것 같았다.

창평 시장통에 몇 명이서 어울려 자취하는 아이들 몇을 알고 있었다. 조금 껄렁껄렁하기는 했으나 사고를 친 것은 아니었으니 한 번 가봐도 되겠다 싶었다. 더군다나 사감 선생님께 말씀드리고 보건소에 들렀다 오는 길이었으니 무슨 일이 있을까라는 안도감도 있었다.

막상 안에 들어가 보니 담배 연기 풀풀 나는 방에 다들 자빠져 있었다.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 기숙사 종례 시간이 다가옴을 느끼고 일어서려는 순간이었다.

한 친구가 내 몸에 병에 든 향수를 쏟아 부어버렸다.

“얌마, 너 어쩌려고 그래?”
“야 색꺄 괜찮아. 가다보면 다 사라진다니까.”
“너, 일부러 그랬지?”
“아냐 임마. 실수로 한 거야.”
“웃기고 있네. 하여튼 내일 보자잉.”

a 등나무꽃5

등나무꽃5 ⓒ 김규환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하고 뛰어서 등나무 울타리 사이를 통과하여 기숙사에 다다르니 아이들이 나를 불러 세웠다.

“야, 규환이 너 사감선생님이 벼르고 있던데?”
“왜야?”
“너 야간 종례 참석하지 않았잖아?”
“야 걱정마라. 그것가지고 내가 죽을 일이었으면 이미 몇 번 죽었어야.”
“하여튼 얼른 선생님께 가봐라.”

혹자는 스파르타식 기숙사 또는 학교라고까지 했다. 하지만 ‘크게 죄 짓지 않았는데 무슨 일 있겠나?’라는 심정으로 사감실에 가보니 안 계시고 옆에 있는 여학생 사감실에 계시다 오셨는지 12시가 넘어서야 돌아오셨다. 몸도 이만 저만이 아닌 상태에서 기다리기도 쉽지 않았다.

사감실로 불려갔다. 선생님은 나를 한 번 위 아래로 쳐다보셨다. 술 담배 어느 것 하나 입에 대지 않은 선생님이기에 내 몸에서 나는 향수 냄새를 맡는 건 시간 문제였다.

다짜고짜 “야! 김규환! 너 술마셨지?”
“아닌데요. 보건소 갔다가 오면서 친구 자취방에 들렀다 왔습니다.”
“술 마셨잖아? 너 여자랑 먹었지?”
“아닙니다. 놀다보니 시간에 늦은 것 뿐입니다.”
“요놈새끼 거짓말까지 하고 있어! 정말 안 불꺼야?”

a 등나무꽃

등나무꽃 ⓒ 김규환

밤이라 고성이 더 멀리 퍼져갔다. 아이들은 잠잘 시간인데도 방마다 문을 열고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

“김규환 너, 이리 나왓!”
“선생님 제 말씀 좀 들어보세요.”
“뭔 말을 더 들어 임마. 밖으로 나왓!”

밖으로 불려 나갔다. 기숙사 옆 야외 화장실 근처에서 대걸레 자루를 준비해 오셨다.

“정말 안 불 거야?”
“선생님 정말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술도 못 마시고 담배도 안 피는데 무슨 말씀하시는 거예요?”

‘안 불 거야?’ 하는 생각에 내가 승리했다는 걸 직감했다. 오늘 선생님은 나에게 된통 당하게 생겼다. 그러나 선생님 성질이 조금만 더 급했다면 이미 나는 초죽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 선생님께 마지막 한 마디를 했다.

“선생님~ 불어라고 하셨죠? 그럼 제가 불어도 되겠습니까? 죄송합니다. 그럼 불겠습니다.”
“알았어 임마. 잔소리말고 얼른 불어봐!”

“하~”
“세게 불어봐임마!”
“호~~~”
“얌마 얼른 들어가서 이 닦어!”

극적으로 살아났다. 저녁 먹고 보건소에 가는 터에 이를 닦지 않고 나갔는데 그 입 냄새를 확 불어 버렸으니 여선생님이었으면 아마도 쓰러졌을 것이다.

그 선생님을 좋아한다. 제 작년 창평에 살 때도 막걸리와 창평국밥을 심심찮게 나누는 사이다. 그 일을 기억하고 계신 선생님은 내가 더 친근해 보이는지 몇 번인가 찾아 오시기도 했다. 담배도 피라 하신다. 김원영 선생님은 목소리만 컸지 인격적으로는 대단한 분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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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나무꽃7 ⓒ 김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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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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