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랴!” “워워~” 논 가느라 산촌 하루가 간다

<농번기와 영농5> 모내기 논 가는 아버지와 소

등록 2003.06.02 03:55수정 2003.06.02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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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애벌논갈이.

애벌논갈이. ⓒ 농협

‘감자꽃’은 겨울 시린 기운을 머금고, ‘감꽃’은 연노랑으로 피어 비바람 없이도 '감똘개’ 후두둑 떨어지는 늦봄 산길 따라가 보면 ‘때죽나무꽃’이 노란 암술을 달고 하얗게 피어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담벼락이고 기둥이고 들 쑤셔대는 벌은 이제 꿀 따느라 넋을 놓고 있다.야릇한 내음 풍기는 ‘밤꽃’은 아직 이르다.


보리베기가 끝나자마자 보릿단을 묶어 비 오기 전에 ‘비설겆이’를 하는 농부의 마음은 급하기만 하다. 비라도 맞히면 보리 싹이 나서 하곡수매(夏穀收買)는 글러버리므로 베어서 하루를 넘기지 않고 대강 묶어 달구지에 가득 싣고 동구 밖 너른 공터에 집집마다 눌러 두거나 논가에다 논물이 들지 않게 ‘갯산쳐’ 급하게 쟁여 두었다.

이렇게 하는데는 보리야 모내기 끝내고 수매 날에 맞춰 장마 이전에만 타맥(打麥) 하면 되기도 하려니와 무엇보다 시급을 다투는 중요한 일이 모 심는 일이었쟎은가?

천수답은 1모작으로 일찌감치 끝내 놓았으나 보리나 밀, 삼 혹은 지역에 따라 마늘, 양파를 심어 놓은 2모작 논이 더 많았던 남부지방에서 본격적인 농사철은 망종 무렵이니 이제 본격 시작이다.

a 때죽나무꽃

때죽나무꽃 ⓒ 김규환

이 때는 사람 못지 않게 바쁜 게 논 가는 소다. 사람보다 더 바쁘다고 하는 게 맞다. 자기 논 갈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집 저 집 불려 다니며 스무날 중 하루 이틀 쉬고 사람 대신 날품팔이를 하니 하루에 이틀 삯은 더 쳐줬다.

그래서 몇 년 째 늦가을이나 초봄 논밭을 갈아 엎어본 경험에다 무논을 휘젓고 다녀봤고 해마다 어김없이 한 번은 새끼를 낳아 목돈을 마련해줬지만 이 집 암소는 쉴 틈이 없다.


그래도 삼월삼짇날 이전에 새끼를 낳으면 별 문제 없었지만 주인의 늘어터짐으로 인해 사월초파일을 넘기면 일하는데 지장을 받는다. 하지만 어쩌랴? 주인님의 일손이 달리는 것을! 소라도 열심히 일해 이 집안을 일으켜 세워야 하는 마당에 예전의 어머니들이 삼일째부터 아이를 뉘어두고 논밭에 다시 일을 나갔으니 소라고 산후조리에 신경 쓸 여유가 따로 있었겠는가.

풀 먹고 크는 초식동물이 그렇듯 태어난 오후부터 기다란 다리를 요리조리 움직여 거동을 시작하므로 일찌감치 일 머리라도 보여줄 겸 송아지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는 수밖에 없다. 젖이라도 먹으려면 따라 다서야지 별 도리가 없다.


“메에~” 하며 염소 소리에 가까운 소리를 내며 귀엽게 울어대는 송아지를 데리고 고갯길 넘어 물 건너 논을 갈러 가야 한다. 앞에서 “음머~” 한 번 해주면 언덕길도 졸졸 잘 따라온다.

a 막걸리 주전자가 누렇다가 하얗게 벗겨지면 쇠 냄새도 났던 것 같습니다. 갖고 가다 아부지 뒤에서 몰래 먹던 사람 많았지요.

막걸리 주전자가 누렇다가 하얗게 벗겨지면 쇠 냄새도 났던 것 같습니다. 갖고 가다 아부지 뒤에서 몰래 먹던 사람 많았지요. ⓒ 김규환

보리를 쟁여두고 비 오기를 기다려 보지만 그럴 가망은 없는지라 밤새 뜬눈으로 물꼬를 지켜 3일 째 되는 날에야 소를 끌고 한 번 나가 보는 것이다. 보막이를 아무리 잘 했다고는 하나 물이 보(洑)에서 보 또랑을 거쳐 몇 백 미터 내려오다 보면 어디론가 다 새 버리고 논에 이르러서는 푹푹 찌는 햇살과 더위에 말라 비틀어져 증발하는 양이 훨씬 많다. 이러니 웬만해서는 사흘 안에 논에 물을 잡는다는 것은 쉽지 않다.

하루 열댓 번이고 상류 쪽을 따라 올라가 보지만 아무 일 없는데도 내려오는 양은 갈수록 줄어든다. 하늘이 타고 물 잡은 논바닥이 타고 목구멍이 타 들어간다. 농민의 속마음도 타들어 간다. 밤새 어른 아이 번갈아 가며 보또랑 가에 있는 풀 쥐어뜯고 높은 논바닥은 삽으로 파서 고르게 하고 물꼬에 물 한 점이라도 샐까 무서워 단도리를 수 십번 해 댄다.

논이 한 곳에 몰려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집에서 가까운 소쟁이에 서마지기 600평, 참난쟁이에 한말 갖지기 300평, 핵꾜모탱이에 네 다랭이 두 마지기가 있으니 밤 잠 자기는 글렀다. 이리저리 왔다갔다하면 먼동이 왜 이리도 빨리 트는지?

a 써레질 하고 있는 농부와 소.  이 때는 그래도 편합니다.

써레질 하고 있는 농부와 소. 이 때는 그래도 편합니다. ⓒ 장성군


이른 아침 소죽 쑤는 일부터 하루가 시작된다. 아직 남은 짚에 새 풀을 잔뜩 넣고 보리 벨 때 두 다발 묶어온 아직 덜 마른 먹기 좋은 보리를 작두(斫刀)로 썰어 알곡을 집어넣어 소죽을 쑤면 얼마 안가서도 푹 퍼진다.

아침에 양껏 먹여야 해질 녘까지 일을 해낼 수 있으니 여간 공을 들이지 않을 수 없다. 소죽을 먹기가 바쁘게 입에 ‘주둥망’을 씌우고 집을 나선다. 그래야 남의 곡식을 뜯어먹어 싸움 벌어질 일 없으니 소가 답답해 해도 어쩔 수 없다.

아침을 드시고 지게에 쟁기며 써레, 멍에를 몽창 짊어지고 소를 몰고 나가는 아버지는 세상사 모든 힘겨움을 지고 있음이다. 팍팍하기 그지없는 들일 나가시는 당신은 그래도 농사를 지어 놓으면 또 한 해 밥 굶기지 않고 아이들 키웠다는 보람은 있었을 터다. 이 고단한 일터로 나가시는 길에 풍경소리가 “딸랑딸랑” “딸랑딸랑” 하며 박자를 맞춰주므로 잠시 시름을 놓을 수 있을 뿐이다.

한 두 걸음 뒤쳐져 오는 송아지는 세 살 배기 아이에 다름 아니게 귀엽다. 졸졸 따르는 송아지 뒤에는 ‘드레죽’으로 줄 소죽을 한 바케스(양동이) 퍼들고 아버지 드실 탁주 한 주전자에 김치라도 한 그릇 챙겨 따라 나서는 아이는 조금 힘겨워도 아버지에 비견할 바가 아니다.

a 써래질 하는 소. 전남농업박물관에서 박제 해 둔 것을 찍었습니다.

써래질 하는 소. 전남농업박물관에서 박제 해 둔 것을 찍었습니다. ⓒ 전남농업박물관

무논에 다다르자 굴레와 도래를 씌우고 코뚜레와 등에 지운 멍에를 쟁기에 차례차례 연결하여 소 뱃대끈을 거쳐 손에 쥘 긴 끈을 쟁기에 연결하여 움켜쥔다. 이래야만 잘 길들여진 소라 할 지라도 오늘 하루 일을 해낼 수 있다. ‘소양배양’ 날뛰는 ‘부사리’나 황소를 데리고 나오지 않은 것은 세상사 다 알 것 같은 암소가 그래도 부리기가 편하기 때문이다.

어차피 논에 들어가야 할 어미 소는 짚신을 신을 필요가 없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아직 물이 완전히 자리잡지 않아 푸석푸석한 기운이 남아 있고 물러 터지지 않은 보릿대와 돌부리가 억세게 휘집고 들어와 굳은살이 배긴 발바닥을 콕콕 찔러 피투성이가 되게 한다.

하지만 이런 건 대수가 아니다. 장화가 없던 때이기도 하지만 뭐라도 하나 신으면 오히려 걸리적거린다. 그래도 논 갈 때는 맨발로 따라 나서는 게 상책이다.

“이랴!” 쩌렁쩌렁한 아버지의 첫 고함에 애벌갈기가 시작되었다.

한바퀴 빙 돌아 고랑 사이로 물이 조금 고이기 시작하자 논배미 전체로 물이 돌았다. 그래도 마른 흙을 득득 긁듯 지나가며 땅을 가는 밭갈이와 달리 아무리 보채도 싸목싸목 앞으로 가야 한다.

쟁기 보습 ‘새밑바닥’이 훑고 지나간 자리는 보드랍고 그 촉감이 좋았으며 볏이 마치 아이스크림을 퍼줄 때처럼 왼쪽으로 둘둘 말아 가지런히 모아 넘겨준다. 끝에 이르러 쟁기에 붙은 흙을 툭 털어 내는 그 무게가 말이 아니다.

a 써레질도 두 번은 해야 반반해져서 고르게 됩니다. 아직 한 번 더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써레질도 두 번은 해야 반반해져서 고르게 됩니다. 아직 한 번 더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 김규환

논갈이는 첫 번부터 너무 몰아붙였다가는 소가 언제 지칠지도 모르는 일이다. 논가를 한 바퀴 빙 돌아 전체 가닥을 잡아 주고 나서 야금야금 먹어 들어가면 물과 흙이 적당히 섞여 일 해나가기 쉽다. 소와 사람 뒤로 물이 서서히 따라 다닌다. 골과 골이 아직 보인다. “철퍼덕 철퍼덕” “첨벙첨벙” 왼발 오른발 앞발 뒷발 어기적어기적 기어가는 품새는 한우 일소의 다부진 엉덩이만으로도 설명이 가능하다.

“이랴!”하면 앞으로 가서 우로 돌고, “자랴!”하면 좌로 돌아간다. 끝자락에 이르러서는 “워~워~”하며 꼬뺑이를 지그시 당겨주면 속도를 늦췄다. 속도를 늦추고 방향을 바꿔주면 “이랴!” 하기도 전에 제가 스스로 앞으로 가야 주인 일 할 몫이 덜하고 목청도 쉬지 않는다. 이리저리 연결한 줄을 밟았을 경우 “들어~들어~” 하며 살살 꼬드기면 뒷발을 들어 응해준다.

농사일이 힘들지 않은 일이 있을까마는 이런 ‘센일’을 하는 동안에는 금새 지치고 만다. 아무리 고함을 쳐보지만 소가 앞으로 갈 리 없다. 지치기는 마찬가지만 소가 사람이 지쳐서 따라오지 못하고 힘에 부친다는 것을 먼저 알아차린다. 이 때는 제 아무리 힘을 내 별 욕을 다 해보았자 사람 목만 아플 뿐이다. 따라서 칼로리를 섭취하지 않으면 해가 질 때까지 써레질을 하여 내일 모내기 하기는 틀린 것이다. 가져온 소죽을 한 '바케스' 부어주고 사람은 막걸리로 한 모금 축여 힘을 다시 솟게 한다.

a 논 갈 때도 삽과 낫이 필요합니다.

논 갈 때도 삽과 낫이 필요합니다. ⓒ 김규환


다시 시작된 논갈이는 점심을 먹고 두어 시가 지나서야 애벌갈기가 끝나고 두벌 갈고 나면 너덧 시는 지난다. 이 때부터 무거운 쟁기를 벗기고 멍에에 써레를 연결하여 흙 죽 위를 “철푸덕철푸덕” “첨벙첨벙” “펑! 펑! 펑!” “풍! 풍! 풍!” 뛰어가는 소를 뒤쫓아가기 바쁘다.

얼굴에 흙탕물이 튀건 말건 그게 문젠가. 하루 두 벌 갈기가 쉽지도 않으나 이리 바쁜 철에는 써레질까지 해서 바닥을 고르게 해놓지 않으면 당장 내일 모심기가 힘들어지니 해가 지는 줄 모르고 갈아 놓아야 한다.

써레질을 시작하자 강남갔던 제비가 아직까지 새끼 깔 집을 다 짓지 못했는지 물을 한 번 “탁” 차고는 보릿대를 물고 집으로 갔다. 바쁠 게 없는 암수는 “지지배배” “지지배배” 지저귀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긴 해는 백아산을 넘어 무등산 쪽으로 뉘엿뉘엿 넘어간다. 못자리에서 모를 찌던 어머니와 다섯 형제자매들도 집으로 돌아가려 한다.

제일 힘든 일을 하신 아버지는 오늘 이후로 조금은 여유가 있을지 모르지만 오늘부터 제일 바빠지는 것 어머니시다. 어머니는 조금 있다 놉 얻으러 가야하고 내일 놉에게 먹일 음식을 준비해야 한다. 누이도 마찬가지였다.

a 산 골짜기로 모를 지고 소 몰고 가는 농부

산 골짜기로 모를 지고 소 몰고 가는 농부 ⓒ 농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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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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