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갈고, 모찌고, '놉' 얻고, 장만하느라 바쁜 모내기 전야

<농번기와 영농6> 모찌는 일과 보리타작이 제일 힘들다.

등록 2003.06.02 12:21수정 2003.06.02 14:12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a 현대식 못자리. 모판에 미리 싹을 틔워서 논 비닐 터널에 넣고 하니 예전보다 쉬워졌습니다.

현대식 못자리. 모판에 미리 싹을 틔워서 논 비닐 터널에 넣고 하니 예전보다 쉬워졌습니다. ⓒ 김규환

농사는 어른들이고 아이들이고 구분없이 각기 쓰임새가 있다. 단지 일의 경중에서 차이가 날 뿐이었다. 논을 가는 건 아버지의 몫이고 그 외 다수는 어머니 몫이지만 아이들 손 하나가 아쉬운 판이다. 학교 가기 전 나에게도 심부름이라고 말하기 버거운 일들이 시시때때로 기다리고 있었다.


모심기 전날, 미리 모를 찌는데 힘을 보태야 하는데 그저께 오후 무렵에 탐진 짚 석 단을 꺼내와 쥐가 쪼아 먹어버린 부분을 털어 내고 한 줌씩 겉잎을 벗겨 꽁지를 가지런히 끝박아 두세 줌을 한 묶음으로 묶어 나갔다. 이런 짚단을 3~40개는 만들어 둬야 안심할 수 있다.

한 뼘 길이로 자란 못자리에서는 개구리가 헤집고 다녀 둥둥 떠다니던 허전한 모판이 모가 빼곡이 들어서 빈 공간이 사라졌을 만큼 알차다. 토요일 오전이라 일찍 학교에 가서 조퇴를 맡아 온 형제들이 다 모이자 인원수가 늘어 이제 어머니, 큰 형, 둘째 형, 누나, 셋째형과 나를 포함하여 여섯 명이다.

아버지 논갈이하시는데까지 쇠죽과 막걸리를 옮겨 드리고는 집에 들러 짚단을 지고 못자리로 갔다. 하우스 터널이 아직 없던 때는 물못자리뿐이었다. 씨나락을 담가 방에서 이리저리 이삼일 굴려 싹을 틔우고 고르게 모판을 만들어 볍씨를 직접 뿌려 물 대고 빼기를 60여일 하는 것이 ‘물못자리’다. 2모작 심을 때 쯤 되면 네 조각으로 쪼갠 대(竹)나 플라스틱 휠 대를 꽂아 비닐을 덮는 것보다 3~4일 늦을 뿐 한 낮 따뜻한 기온에 쑥쑥 자라 더 튼실하기만 하다.

아침녘에는 차갑기도 하고 못자리 사이사이에 무엇이 있을지 몰라 들어가기가 겁난다. 그래도 항상 맨 먼저 들어가는 이는 어머니다. 간혹 물어도 독이 없다는 ‘물자수’, ‘물뱀’뿐만 아니라 ‘독사(毒蛇)’, '꽃뱀', '화사(花蛇)’와 검붉은 ‘능담’이 혀를 “낼름낼름~”거리며 개구리 잡아먹을 채비를 하고 있는 경우도 있어 겁먹는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다.

어디 이 뿐인가? 장화도 신지 않았었고, 스타킹은 한참 뒤에 나왔던 소시적이라 얼마간 일을 하다가 따끈한 느낌이 있어 손을 대보면 흡혈귀 ‘거머리’가 빨판을 뒷다리 보드라운 살갗에 바짝 붙이고 쭉쭉 빨아대며 피 잔치를 해서 다리 부근은 늘 중간 점검을 해서 떼어 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것으로 끝나면 다행이다. 물 속에 사는 톡 쏘는 벌레인 ‘철구’ 등이 사람을 잔뜩 긴장하게 한다. 그 놈에게 쏘이고 나면 아리는게 보통이 아니다.


모를 찌는 것이지 모를 뽑는다고 한 적이 없었는데 '모찌기'는 간단한 일이 아니다. “실겅실겅”, “슬겅슬겅”, “잇야잇야”,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 보자’며 양손 주먹을 꼭 쥐어 붙이고 모판 물컹거리는 바닥에 바짝 대 쪄나가면 되는데, 어린 나는 형들의 1/3에도 미치지 못했고 어머니의 1/5도 따라가지 못하고 간혹 모를 쥐어뜯고 있을 뿐이었다.

시쳇말로 모를 뽑는 모찌기는 내 작은 손으로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설사 두세 줌 넘게 쪄 한 데 모아서 한 손으로 잡고 다른 손으로 모를 묶어내는 일은 더디기만 했다. 묶어놓아도 옮길 때 보면 사르르 풀려 사람 기분 잡치게 했다. 이러니 농사 일 중에서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모찌기와 보리타작이라는 결론까지 내렸던 것이다.


차차 따뜻해진 물에서 해나갈 만 하면 온 몸이 흥건해진다. 이내 허리가 아파 오기 시작한다. 밥 먹을 때를 빼고, 진종일 허리를 구부정하게 한 채로 그 자잘한 모를 쪄내는 일은 단순 작업에 이골이 난 웬만한 사람도 하기 힘든 것이다. 이 때는 미리 가지고 간 플라스틱 대야나 양푼, 세수 대야를 뒤집어 엉덩이에 푹 깔고 앉아서 모를 찌는 수밖에 없다.

“아이고 허리야~”하면, “쬐끔한 것이 무신 허리가 있다고 그려?” 하셨지만 소용없다. 내 작은 허리는 아직 세상사 고난을 얼마간이나마 겪어보지 못한 고로 더 아프다고 생각해야 따름이다.
“에고고 허리야~”
“자꾸 허리 아프다싸면 허리가 없어진당께. 그려도 좋겄냐?”
“아푼 걸 어떡하라고라?”

못자리에서 며칠 전 ‘피사리’를 해뒀어도 모와 함께 섞인 피는 아침이나 저녁이 아니면 쉬 눈에 띄지 않는다. 해가 얇아진 틈에 반투명 노란 빛이 도는 게 피였다. 줄기 가운데 무지개 빛이 도는 게 피다. 못자리에는 피만 성가시게 하지 않는다. 수렁이나 늪에 사는 이름도 가물가물한 ‘도사리’, ‘가래’, ‘대패지심’, ‘왕골’등 예닐곱 가지 지심이 죄다 모여있게 마련이니 이들을 골라 내지 않으면 모를 따라가 새 논을 장악해 버린다. 그러니 여간 골칫덩어리가 아니었다.

a 농로가 잘 뚫린에는 경운기나 차로 실어 나르면 되었지만 예전엔 지게로 다 져 날라야 했으니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농로가 잘 뚫린에는 경운기나 차로 실어 나르면 되었지만 예전엔 지게로 다 져 날라야 했으니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 김규환

오후 새참을 먹고 한계에 이른 나는 꾀를 낼 수밖에 없었다.

“엄마.”
“왜 그런댜?”
“거시기 말이요. 지가 모 찌는 것보담 모쟁이 하는 게 낫겠구만이라우~”
“뭔 심(힘)이 있다고 근다냐? 그건 셋째형한테 해라고 할라 했는디~”
“글도 그렇제. 모 찌는 것보담은 수월한게라우~”
“글면 쬐끔씩 갖다 날라라. 뱀 있응께 꼭 신을 신거라와~”
“알았어라우~”

이렇게 그 자리를 빠져나온 나는 바지게를 얹을 필요도 없이 미리 건져둔 모를 차곡차곡 쌓아 30여 단을 올렸다. 굳이 바지게를 멀리한 까닭은 다른데 있지 않았다. 아직 덜 빠진 물기가 발채에 스며들면 맨 지게로도 그 무게를 감당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누리끼리한 모 뿌리가 완전히 말라버리면 생존율이 떨어지는 까닭에 잠시 건져 놓았을 뿐 물기가 다 빠지지 않은 관계로 등줄기를 타고 좔좔 흘러내린 흙물이 바짓가랭이를 적시고 신발까지 흥건하게 했다. 하릴없이 신발을 벗었다. 신발을 벗고 다니면 더 편했고 논두렁길에서나 좁다란 길에서도 미끄러질 일도 없었다. 한 마장은 너끈해 보이는 ‘욋등’ 논까지 가는 길은 멀기만 했다.

오가는 길 마을 들판 곳곳에서 논 가는 소리가 요란하다.
마저 못 다 찐 모는 내일 아침 놉들이 한데 엉겨붙어 찌면 되니 적당히 찌는 걸 멈추고 형들과 나는 각자 자신의 지게로 모를 날랐다. 먼 곳은 미리 준비해 놓아야 별일 없기 때문이다.

어머니와 누나는 집으로 들어가셨다. 그래봐야 밤 7시였다. 내일 모내기 할 때 먹을 밥을 준비하고 반찬을 마련하느라 조금 일찍 들어갔을 뿐 해야 할 일은 너무나 많다. 제사보다 더 많은 대식구가 먹어야 하니 그렇고 일년 중 모내기 할 때나 갖가지 음식을 배불리 먹으니 넉넉하게 해서 남아야 한다.

혹 지나가는 이라도 있으면 그냥 모른 체 그냥 보낼 수 없고 옆에서 자신의 일을 혼자 하시는 아저씨들 몫도 있으니 말이다. 초등학교 5학년이던 누이는 어머니께서 품앗이로 맞춰 둔 놉과 새로 몇 명을 더 얻으러 간 사이 혼자서 빠뜨리지 않고 야물딱지게 재료를 준비했다.

9시가 다 된 때에야 밥을 먹고 어머니는 또 놉을 얻으러 가셨다. 우리 마을 양지에서 “놉 셋이 자드러졌다.”며 타는 속을 삭이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나자빠진 결원을 채우려는 것이다. 질펀한 신작로를 따라 호롱불 하나도 들지 않고 이웃 강례마을로 가셨다.

이렇게까지 하는데는 우리 일을 하루에 마치고 품앗이로 얻은 놉은 품삯으로 돌려 줄 수도 없는 관행상 여간한 일이 아니면 품앗이로 갚아야 하니 한갓진 것은 차치하고 하루에 일을 끝마쳐야 하는 절박한 심정에서다. 제 아무리 사람 좋아도 하루하루 집집마다 날을 잡아뒀기에 한 번 순번에 밀리면 이만 저만이 아니었던 때다.

a 이사갈 준비를 하고 있는 모. 예전 모 길이의 절반도 안됩니다.

이사갈 준비를 하고 있는 모. 예전 모 길이의 절반도 안됩니다. ⓒ 김규환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이 기자의 최신기사 역시, 가을엔 추어탕이지

AD

AD

AD

인기기사

  1. 1 "아버지 금목걸이 실수로 버렸는데..." 청소업체 직원들이 한 일 "아버지 금목걸이 실수로 버렸는데..." 청소업체 직원들이 한 일
  2. 2 "부영, 통 큰 기부로 이미지 마케팅... 뒤에선 서민 등쳐먹나" "부영, 통 큰 기부로 이미지 마케팅... 뒤에선 서민 등쳐먹나"
  3. 3 깜짝 등장한 김성태 측근, '대북송금' 위증 논란 깜짝 등장한 김성태 측근, '대북송금' 위증 논란
  4. 4 탐욕스러운 기업이 만든 비극... 괴물을 낳은 엄마 탐욕스러운 기업이 만든 비극... 괴물을 낳은 엄마
  5. 5 윤석열 정부에 저항하는 공직자들 윤석열 정부에 저항하는 공직자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