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정당' 마루에서 맛보는 고즈넉함

[대구인근 한나절 여행지]도동서원 400년 고목은 여린잎 펴들고

등록 2003.06.02 12:56수정 2003.06.07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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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광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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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광재

은행나무

은행나무는 아직 연둣빛 채 가시지 않은 잎을 펴들고 서 있다. 둥치는 굳은 살 두껍게 박혀 세월의 깊이를 말해주지만, 새로 난 이파리들은 여리다. 그러나 한달만 지나면 짙푸르고 무성한 잎들이 따가운 햇살에 도리질할 것이다. 가을에는 노란 잎 흩날리며 한해의 기억을 나이테로 그리고 있을 터이다.


많은 비가 내린 다음날, 도동서원 앞 은행나무는 흙탕으로 흘러가는 낙동강과 씻긴 하늘에 떠가는 흰 구름을 보고 있다. 그렇게 400년을 서 있었다. 속도 썩을 만큼 썩었으리라. 팔을 내려 지친 어깨를 쉬게 하고 싶었으리라. 긴 가지 하나는 급기야 팔꿈치를 땅에 대고 말았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시커멓게 썩은 속을 모르타르로 채워 놓았다. 큰 포탄처럼 생긴 콘크리트 기둥 다섯개로 겨드랑이를 받쳐 놓았다. 30여년 전 나무는 며칠동안 울음소리를 내고는 큰 가지 하나를 스스로 잘랐다고 전한다. 이젠 돌아가서 편히 쉬고 싶은 나무를 사람들이 한사코 붙잡아 두고 있는 건 아닌지….

황동규의 시가 생각났다. 이 나무도 저 강물에 몸 던질 꿈을 꾸어왔던 건 아닐까? 더 이상 사람이 간섭하지 않는다면, 어느 날 모르타르 덩어리만 땅에 내려 어리둥절하지는 않을까?

a 땅에 닿은 가지

땅에 닿은 가지 ⓒ 김광재

어떤 나무

다시는 세상에 출몰하지 않으려고
배에 돌을 달고 물 속에 뛰어든 사람
그 중엔 밧줄 풀어져
막 풀어진 눈으로
세상 구경 다시 한 사람도 있다.
안부 궁금하다,
한 오백 년 살며
몇 차례 큰 수술하고
사람 머리보다 더 큰 돌덩이 여럿 배에 넣고
넉넉하게 서 있던 나무
a 젊은 은행나무

젊은 은행나무 ⓒ 김광재

제주 애월에선가 만난 팽나무.
그 몸으론 어디 뛰어들어도
되떠올라 어리둥절할 일 없으리.
어느 날 돌덩이들만 땅에 내려
어리둥절하리.


-황동규



스무 걸음쯤 떨어진 비각 옆에는 젊은 은행나무가 균형잡힌 몸매를 뽐내고 서 있다. 젊은 나무는 좀더 멀리 보려는 듯 발돋움을 하고 있지만, 늙은 나무는 가지를 옆으로 뻗어 제 그늘 닿는 끝을 살피고 있다.


이 은행나무는 도동서원 사액기념으로 1607년에 심은 것이다. 심을 때 10여년 자란 나무를 심었을 것이라 보면 수령이 400년은 넘었다. 은행나무는 종의 역사가 수억년에 이르는 '살아있는 화석'이고, 장수나무로 유명하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은행나무 20여그루 중에는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 등 천년 된 것도 여럿 있다. 요즘 시골에서 환갑노인은 '젊은이'이듯, 은행나무 노거수 모임이 열리면 이 400살 나무는 심부름해야 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백년 살지 못하는 사람의 눈에는 도동서원 앞 은행나무가 장하기도 하고 지친 듯 보이기도 한다.

a 중정당

중정당 ⓒ 김광재


a 중정당 대청 창을 통해 본 조망

중정당 대청 창을 통해 본 조망 ⓒ 김광재

도동서원

한훤당(寒喧堂) 김굉필(金宏弼)을 추모하기 위해 1605년 퇴계 이황과 한강 정구의 주도로 건립된 이 서원은 보로동(甫老洞)서원으로 불리다가, 1607년 선조로부터 도동서원(道東書院)이란 이름의 현판을 받고 사액서원이 됐다. 도동이란 공자의 도, 성리학의 도가 동쪽으로 왔다는 뜻이다.

도동서원은 크게 세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수월루가 있는 입구공간과 중정당이 있는 강학공간, 그리고 사당이다. 이 셋은 각각 담으로 둘러쳐져 있고 좁고 가파른 계단과 문으로 연결돼 있다.

중정당 입구 환주문(喚主門) 옆과 사당 입구 정원에는 꽃 진 모란잎이 무성하다. 수월루, 중정당, 사당은 터의 높이 차가 심한데도, 정원을 여러 단으로 꾸며 놓아 단절의 느낌을 줄여준다. 또 암기와와 수막새를 함께 사용해 쌓은 토담에 비치는 햇살을 바라보는 맛도 빼놓을 수 없다. 이 아름다움 때문에 토담으로는 최초로 보물로 지정됐다.

a 보물로 지정된 토담

보물로 지정된 토담 ⓒ 김광재

각 계단과 길에는 거북이 머리, 꽃봉오리 등 조각들이 눈길을 끌고, 중정당 기단에는 네 개의 용머리 조각이 있다. 훤칠한 중정당 기단은 다듬은 돌을 이용했는데 그 모양과 크기가 다 다르고 서로 맞물려 있어 견실한 느낌을 준다. 기단의 돌과 중정당 목재의 색깔은 갈색 톤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찬찬히 살펴보면 돌은 푸른빛이 감도는 것, 보랏빛이 배어 나온 것 등 색깔도 다양하다.

도동서원이 주는 가장 큰 즐거움은, 중정당 대청에 걸터앉아 마음을 가라앉히고 느껴보는 고요함인 것 같다. 온갖 새소리도 시끄럽게 들리지 않는다. 소박한 기숙사 건물 거인재(居仁齋), 거의재(居義齋)와 나지막한 토담 안의 공간이 고즈넉하다. 절제되고 균형잡힌 공간은 옛 선비들이 추구한 정신과 미의식을 전해 주는 듯하다.

a 중정당 기단

중정당 기단 ⓒ 김광재

시선을 멀리 하면 수월루 지붕이 정면 전망을 막아 다소 답답함을 느끼게 한다. 아무리 도학에 뜻을 두고 서원에 들어왔다 해도, 젊은 유생에게 봄기운은 다스리기 힘겨운 것이었으리라. 그렇지만 중정당에서는 탁 트인 경치, 즉 밖의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내면을 성찰하라는 뜻은 아닐까? 그리고 이완이 필요할 때는 수월루(水月樓)에 올라 이름 그대로 물에 비친 달을 보며 풍류를 즐기라는 배려는 아닐는지….

작은 것들에 관심을 가지면 도동서원에는 보고 느낄 것이 많다. 이름난 관광지와는 달리 찾는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아 방해받지 않아도 된다.

a 사당 단청

사당 단청 ⓒ 김광재

구석구석 돌아보며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해보고 상상해보는 즐거움이 있다. 중정당 나무 창의 옹이 구멍으로 신혼방 훔쳐보듯 뒷정원을 보아도 좋고. 사당 입구 계단 돌 조각상의 콧구멍을 보고 깔깔 웃어도 좋다.

나머지 정보

승용차를 이용할 때는 구지 쪽보다는 현풍에서 강둑길을 따라 다람재를 넘어 오는 길을 권한다. 누렇게 익은 보리밭 사잇길을 걸어도 보고 강둑에 올라 낙동강을 바라보기도 하며 쉬엄쉬엄 오면 좋다. 현풍에서 66-1번 버스를 타도된다. 운전 기사 말로는 약 두시간 간격이라 한다.

문화유산 해설사가 금·토·일요일과 공휴일에 근무를 한다. 10인 이상 단체관광객이 일주일 전 사전요청을 하면 근무일 외에 특별근무도 가능하다. (tour.daegu.go.kr →여행안내→문화유산해설사) 도동서원 (053)617-6720

도동서원에 관한 설명은 http://www.photomegabox.com/daegustory/dodong/dodog-001.htm가 자세하고 충실하다. 도동서원 건축에 관해서는 www.korealike.com이 잘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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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에서 사회부 문화부 편집부 등을 거쳤습니다.오마이뉴스 대구/경북지역 운영위원회의 제안으로 오마이뉴스 기자로 일하게 됐습니다. 앞으로 대구경북지역 뉴스를 취재해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오마이 뉴스가 이 지역에서도 인정받는 언론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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