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네티즌에게 고합니다
도구와 과업을 혼동하지 마십시오"

[민경진칼럼] 하워드 라인골드가 한국 인터넷 세대에 보내는 충고

등록 2003.06.05 10:03수정 2003.06.16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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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결과가 확정된 지난 해 12월 19일 저녁, 필자는 정치 웹진 <서프라이즈>에 기고한 글에서 세계 최초의 인터넷 정치혁명이 한국에서 벌어졌다고 선언하고 그 의미를 <사이버 코리아, 사이버 대통령>이란 슬로건으로 갈음한 바 있다.

독자들과의 만남에서 필자는 지난 해 대선의 세계사적 의미를 재차 역설했지만 정작 세계의 언론들은 한국에서 얼마나 놀라운 역사적 사건이 벌어졌는지 정확히 알지도 못 했고 제대로 전하는 언론도 드물었다.

하긴 당시는 북핵 문제라는 급박한 현안에 밀려 한국 대선의 사회.문화적 의미를 차분히 분석할 여유가 없기도 했다.

목 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고 한국 사이버 세상의 형편에 대해서는 그래도 눈여겨 지켜 본 내가 나서자고 결심했다.

a 하워드 라인골드

하워드 라인골드

이미 <오마이뉴스>를 비롯해 무선 인터넷, 아바타 서비스 등 한국의 인터넷 문화에 대한 영문 자료를 꾸준히 써 왔던 필자는 미국의 사이버 문화 전문가 하워드 라인골드, 신세대 미래학자 브루스 스털링 등에게 필자의 문건을 보내기 시작했고 지난 4월부터는 하워드 라인골드와 직접 이메일을 주고 받기 시작했다.

6월 2일자 하워드 라인골드의 블로그에 실린 한국 대선에서 인터넷과 휴대전화의 역할에 대한 필자의 기사(www.smartmobs.com)는 이렇게 해서 나오게 된 것이다.

아래는 하워드 라인골드가 한국의 독자들에게 소개해 줄 것을 부탁하며 필자에게 보내 온 그의 최신작 <참여군중-Smart Mobs>의 한국판 서문이다.


이미 우리의 사이버 문화가 세계 최첨단을 달리고 있어 한국의 네티즌들에게는 피부에 와 닿지 않을 내용도 있을 수 있지만 지난 20여년간 사이버 문화에 관한 한 가장 폭 넓은 경험과 심층적인 연구를 해 온 그가 한국의 젊은 사이버 세대에게 전하는 충고에 한 번쯤 귀를 기울여 보도록 하자. 그가 보내온 글의 제목은 <한 미국의 늙은 네티즌이 한국의 사이버세대에 드리는 충고>였다.



<한 미국의 늙은 네티즌이 한국의 사이버세대에 드리는 충고>


하워드 라인골드(민경진 역)

하워드 라인골드 소개

하워드 라인골드(Howard Rheingold)는 미국 애리조나 출신으로 테크놀로지의 사회적 함의에 관한 연구 분야에서 전세계적인 권위자이다. 지난 20년 이상 그는 세계 곳곳을 방문하여 이 분야의 권위자들과 만나 컴퓨팅 기술의 새로운 조류와 커뮤니케이션, 문화 현상들에 대해 고찰하고 이에 관한 연구서를 집필했다.

그는 `HotWired`의 초대 주필을 역임했고, `The Whole Earth Review`, `The Millennium Whole Earth Catalog`의 편집자로 활동했으며 1995년부터는 인터넷 공동체 'The Well'을 관리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가상 공동체(The Virtual Community)> <가상 현실(Virtual Reality)> <사고를 위한 도구(Tools for Thought)> 등이 있다. 그의 최신작 ‘Smart Mobs’는 황금가지에서 <참여군중>이란 제목으로 번역 출간되었다.
아직 한국을 방문한 적은 없지만 한국의 왕성한 IT산업과 일상생활에 폭 넓게 확산된 인터넷에 대한 소식은 저 역시 지난 몇 년간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필자의 책 <참여군중-Smart Mobs>의 영문판이 출간되고 몇 달이 지나지 않아 한국의 신세대들이 인터넷과 휴대전화를 이용해 대통령 선거에서 결국 노무현 대통령을 당선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흥미를 느꼈습니다.

필자는 또 노무현 대통령이 세계의 정치지도자 중에 가장 IT기술에 해박하고 인터넷에 능숙하신 분이라는 것, 한국이 초고속 통신망 보급률에서 세계를 선도하고 있으며 아울러 노무현 대통령을 만들어 낸 한국의 젊은 신세대 네티즌들이 자신들을 소속감을 지닌 하나의 커뮤니티로 이해하기 시작했다는 것 또한 알고 있습니다.

이 커뮤니티는 컴퓨터와 인터넷, 무선휴대장치 그리고 이를 능숙하게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이 결합하면서 탄생한 것입니다. 비록 한국 문화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지난 20년간 온라인 문화에 직접 참여하고 연구해 온 사람으로서 제가 미국의 온라인 시민운동에서 얻은 몇 가지 조그마한 교훈을 여러분께 전하고자 합니다.

첫째, 도구를 과업과 혼동하지 마십시오. 컴퓨터와 인터넷, 이동통신장비를 통해 이룩한 출판, 커뮤니케이션 그리고 결사의 광범한 민주화는 풀뿌리 시민운동에 있어 진정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민주주의에 힘을 실어주는 것은 투표를 하고 정치적 결단이 내려지고 전쟁이 벌어지고 시위가 일어나는 현실 세상에서 얻은 지식과 의지 그리고 사람들의 결단입니다.

네티즌들이 상대방에 비난을 퍼 붇는 대신에 배움을 얻고, 키보드만 두드리는 대신에 현실 세상에서 행동을 함께 하기 위해서는 단지 기술에 대한 전문지식 외에 더욱 폭 넓은 것들을 공유하고 있어야 합니다. 장기간에 걸친 정치적 결사는 고단한 작업입니다.

둘째, 똑똑한 군중이 반드시 현명한 군중은 아님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폭동과 민주적 절차를 가름하는 기준은 정치적 의식화입니다. 만약 유권자의 상당수가 그날 그날의 중요한 이슈에 대해 무지하고 그런 이슈와 그에 따른 정치적 집행과정을 어떻게 토론해야 할 지 알지도 못 한다면 비록 공정한 선거로 지도자를 선출한다 해도 민주주의는 공허할 뿐이며 또 누군가 쉽게 조작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려 깊은 토론은 정치지도자 뿐 아니라 일반 시민 모두에게 똑같이 중요한 것입니다.

셋째, 민주주의 근간인 자유롭고 열린 정치과정 즉 공공영역과, 감정에 치우치고 무지하며 구호만 앞서 결국 정치적 논의과정 자체를 좌초시키고 마는 온라인 싸움을 가름하는 기준은 시민의식, 지성 그리고 뚜렷한 증거들입니다.

인터넷은 경이로운 지식의 보고이며 검색엔진은 강력한 도구입니다. 온라인 상에서 논쟁을 벌일 때는 단 2분이라도 검색에 시간을 들여 그 결과를 당신의 논증에 링크해 놓으시기 바랍니다. 비록 증거의 신뢰성에 의혹을 제기할 수는 있겠지만 증거를 의심하는 과정 자체가 학문과 합법성을 이룩하는 기초입니다. 예컨대 핵심은 이슈와 증거는 공격하되 논쟁하는 상대방의 인격을 공격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넷째, 인터넷에 대한 검열을 막고 혁신의 공유지를 독점하려는 시도에 맞서 싸우십시오.

분산, 개방된 인터넷의 구조(end-to-end architecture)로 인해 우리의 후손들이 인터넷과 관련된 결정을 내릴 때는 어느 누구도 중앙 집권적 통제력을 휘두를 수가 없습니다.

팀 버너스리가 월드 와이드 웹을 만들었을 때는 어느 누구의 허락도 얻을 필요가 없었으며 특정 기업을 위해서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인터넷의 분산, 개방형 구조가 혁신이 네트워크의 표면에서 벌어지도록 부추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커뮤니케이션과 미디어 산업에 관한 부와 권력이 세계적으로 소수에게만 집중되고 자유로운 혁신에 제한을 가하려는 압력이 지속되면서 국제저작권법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있고, 고속인터넷 사업자들은 분산, 개방구조를 훼손시키려 하며 아울러 상호신뢰에 근거한 전산구조에 “디지털 저작권 관리” 기술을 도입하라는 압력을 받고 있습니다.

비록 이러한 게임의 법칙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혁신적 기술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돈 많은 이권집단의 힘을 과소평가하지는 마십시오.

향후 수년간 우리는 무선통신과 인터넷 그리고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혁신을 좌우할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범 세계적인 투쟁이 벌어지는 것을 목격할 것입니다.

한국에는 다중에게 분산된 쌍방향 매체의 파급력을 잘 이해하고 있는 정치 지도자들이 있습니다. 한국의 기업과 벤처 업체들은 세계를 선도하고 있습니다. 한국인들은 세계 어느 곳의 유권자들보다 더 많은 수가 인터넷에 접속해 오랜 시간을 소비하고 있으며 젊은 세대는 신기술에 열광하고 있습니다.

인터넷의 분산,개방형 시스템을 지키고 기업이 먹여주는 컨텐츠를 수동적으로 소비하는 대신에 인터넷의 모습 자체를 스스로 만들고 혁신의 공유지를 독점하려는 시도를 물리치는 싸움을 선도하는데 있어 한국은 필요한 모든 요소들을 갖추고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더 중요한 요소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남들이 먹여주는 지식을 수동적으로 받아 먹는 대신에 스스로 생각해 깨달음에 이르는 도구로 인터넷을 활용하는 방법을 배워야만 합니다. 또 온라인 상에서 합리적으로 시민답게 논쟁하는 방식 역시 습득해야 할 것입니다.

a 민경진 칼럼니스트

민경진 칼럼니스트

합리적인 논쟁은 종종 무례한 이들로 인해 쉽게 좌절되곤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예의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민주사회의 시민이라면 설사 동의를 하든 하지 않든 상대방에 대한 기본적인 존중의 정신을 가지고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이제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젊은 신세대에게 전합니다. 사려 깊게 생각하고 지금 당신이 하는 일에 대해 고민하며 논쟁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당장의 승리와 현란한 기술에 현혹되어 정작 민주주의가 요구하는 진정한 책무에는 무지해지는 실수를 저지르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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