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때때로 검고 붉게 바뀐 내 입과 얼굴

[어릴 적 허기를 달래주던 먹을거리-8]산딸기, 메꽃뿌리, 마

등록 2003.06.14 11:38수정 2003.06.14 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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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곰때왈 복분자는 이제 막 익기 시작한답니다. 제가 따 먹은 건 이것이 아닙니다.

곰때왈 복분자는 이제 막 익기 시작한답니다. 제가 따 먹은 건 이것이 아닙니다. ⓒ 고창명산품복분자주

붉은 산딸기 따러 가는 길


나무에 열리는 딸기를 ‘때왈’이라 한다. 때왈은 키 작은 관목(灌木)에 달리는 일반 때왈과 넝쿨성 가시가 4~5m 까지 너울너울 퍼져 가는 ‘곰때왈’ 또는 ‘먹때왈’이 있는데, 이 곰때왈은 ‘복분자’(覆盆子)라는 약재 또는 과실주 담그는 재료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맛과 색깔, 익는 시기도 다르다. 때왈은 불그스름한 다홍색이지만 곰때왈은 익으면 검정색에 가깝고 열매에 흰 가루가 묻어 있는 듯 하다. 일정하게 달콤한 맛만 나는 때왈과 달리 곰때왈은 달콤하면서도 약간은 누린내 나는 듯 하고 딸기라기보다 잘 익은 오디 맛이라 생각하면 된다. 꼭지 없이 그냥 따먹는 게 곰때왈이지만 따기가 증상스럽게 옹삭하다.

때왈이 밭가 평평한 곳이나 산자락에 널리 퍼져 있는 반면 곰때왈은 사람이 접근하기 힘든 협소한 곳에 “터억” 영역을 만들고 웬만해선 제 열매를 내주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는 것 같다. 익는 시기는 일반 때왈이 1달 가량 빠르다. 보리 패서 익는 시기에 때왈이 따라서 익고 모내기 마친 시기에 복분자가 익으니 한 달여 터울을 두고 입을 심심찮게 해주었다.

그럼 산딸기 때왈 따먹으러 밭 가상으로 가보자. 다른 길을 갈 때와는 달리 혀를 낼름낼름거리고 있는 뱀 소굴을 통과해야 하므로 여간 긴장되는 게 아니다. 일단 두꺼운 나일론 양말을 신어 발을 보호하고 부엌에서 대접 하나 들고 기다란 작대기를 하나 지참한다. 한 마장은 가야한다. 휘파람 불면 뱀이 다가올 수 있으므로 나지막이 노래를 부르고 침을 간혹 뱉어주면 그네들도 별 힘을 못 쓴다지만 혼자 나서는 음습한 그 길은 작대기로 풀숲을 헤치지 않고는 앞으로 나아가기 겁난다.

마음 졸여가며 그곳을 통과하면 밭 두렁을 올라서서 산자락에 도착하게 되는데 이 때 부터는 마음을 조금 누그러뜨려도 된다. 하지만 ‘뱀때왈’(뱀딸기)에 하얀 침이 묻어 있는 걸 발견하는 순간에는 바짝 긴장하게 되니 산딸기 따먹으러 가는 길은 이래저래 순탄치 않다.(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붉은 뱀 딸기에 뭍은 하얀 침은 뱀이 뱉어 놓은 것이 아니라 개미가 칠해 놓았다.)


주변에는 칡넝쿨이 길게 퍼져 있다. 물기가 별로 없는 건조한 쪽에 있는 때왈나무는 이른 봄 꽃 필 적에 이미 확인해 둔 바 있으니 따로 자리를 찾느라 시간을 허비할 필요는 없다. 붉은 열매가 멀리서도 보인다.

a 복분자도 아닌 제 3의 산딸기 입니다. 제가 따 먹은 것은 이것도 아닙니다. 고향이 멀다는 것이 이리 사람을 힘들게 하는군요.

복분자도 아닌 제 3의 산딸기 입니다. 제가 따 먹은 것은 이것도 아닙니다. 고향이 멀다는 것이 이리 사람을 힘들게 하는군요. ⓒ 김규환

“야! 정말 많이 달렸다. 옴메! 저걸 언제 다 딴다냐? 이것 따다가 해 넘어 가겠다.”


100여 평에 듬성듬성 널린 산딸기는 내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그릇은 옆에다 던져 놓고 먼저 잘 익었는가 맛을 보았다.

‘음~ 잘 익었군!’

처음에는 꼭지를 잡고 알맹이만 입에 넣어 맛을 본다. 그 다음부터는 그 달콤하고 약간 씹히는 듯한 맛에 매료돼 열매와 꼭지를 같이 붙인 채 바로 통째 입에 집어넣고 이와 혀를 활용하여 이리저리 굴려가며 꼭지를 자르고 “툭” 뱉어버리며 허기와 추억을 채운다. 한 개, 두 개, 열 개도 모자라 100여 개쯤 따먹고 나서야 제 정신이 돌아왔다.

그때서야 다시 그릇을 가져와 동생과 집에서 나눠 먹을 분량을 정성스럽게 따서 담는다. 얼마 안되어 그릇 가득 채우니 ‘모자라도 쓰고 올걸’ ‘막걸리 주전자 갖고 왔으면 더 많이 따 갈 수 있는데...’하며 아쉬워하지만 도리가 없다. 대안을 찾은 수밖에. 그래 조금만 더 따자. 칡 잎을 다섯 장 뜯어 바닥에 두고 다섯 번에 걸쳐 한 줌씩 갖다 놓으니 그것도 그릇에 있는 분량은 충분하겠다. 차분히 때왈이 빠지지 않게 싸고 나뭇가지 뽕나무 껍질을 벗겨 잘 처매서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중학교 가기 전 까지 해마다 그 ‘가는골’에 이맘때면 들러서 내 정체를 확인해 줬다.

a 꽃이 더 예쁜데 뜻대로 안 나왔군요. 논두렁이나 밭두렁에 가도 많이 피었습니다.

꽃이 더 예쁜데 뜻대로 안 나왔군요. 논두렁이나 밭두렁에 가도 많이 피었습니다. ⓒ 김규환

나팔꽃 같은 메꽃 뿌리 구워먹기

보리와 밀 꼬실라 먹고 앵두 따먹고 나면 나팔꽃과 비슷한 분홍 메꽃이 대밭 가에 줄줄이 이어 피었다. 나팔꽃은 아침나절 해 뜰 무렵 이슬을 먹고 피어 해가 활짝 뜨면 서서히 지기 시작하는데 반해 메꽃은 그렇지 않다. 메꽃은 아침이고 저녁이고 아무 때나 피어 24시간은 느긋하게 수줍어하며 웃고 있다.

나팔꽃이 서양에서 온 여자친구라면 메꽃은 나의 영원한 우상 어머니 같은 모습이다. 그러니 이 꽃을 발견하기는 쉽다. 또한 뿌리를 땅 속에 숨겨두고 다음해를 준비하니 부엽토(腐葉土)가 많은 기름진 땅에서는 제법 쓸만한 알맹이를 들어있다.

괭이나 호미도 없이 돌을 하나 둘 들춰 헤집어 파 보면 ‘똥 마’ 같이 얇으면서도 약간은 도톰한 뿌리를 만나게 되는데 집으로 가져와 소죽 쑤면서 구워 먹었다. 그 맛은 조금은 입안이 아르르 하지만 몇 번 먹다보면 길들여진다. 이 걸 먹었던 사람들은 흔치 않다. 산골 아이들 몇 명이나 알만한 먹을거리였다.

a 마, 참마, 천마의 뿌리. 생으로 갈아서 먹어도 좋지만 구워서 먹으면 더 맛있습니다.

마, 참마, 천마의 뿌리. 생으로 갈아서 먹어도 좋지만 구워서 먹으면 더 맛있습니다. ⓒ 김규환

깊숙이 박힌 참마 캐서 구워먹기

아무리 큰 메꽃 뿌리를 캐도 그 양이 작아 허기를 채우기에는 부족하다. 그래도 입이 궁금하면 살모사(殺母蛇) 보다 더 길게 쑥쑥 자란 마 넝쿨을 찾아간다. 마는 메꽃 뿌리 보다 더 깊게 묻혀 있다. 그러니 이 걸 캐는데는 약(藥) 괭이가 필요하다.

처음에 주위를 넓게 파 들어가다 보면 돌에 치이고 대 뿌리에 치여 동글납작한 참 마 뿌리가 나온다. 마는 최소 한 자(尺) 30cm에서 두 자(尺)는 파 들어가야 한다. ‘똥마’는 덜하지만 ‘참마’는 캐다보면 감자 알맹이보다 속살이 훨씬 부드러워 툭툭 떨어지고 끊어지게 되는데 그게 대수랴! 한 자(尺) 가웃이나 되는 긴 뿌리가 열 덩어리로 나뉘기 쉽상이지만 모아서 가져오면 그만이다.

마를 캐다보면 겉은 감자지만 속살은 하얗다. 그 하얀 살에 진득진득한 액체가 무수히 흘러 나온다. 그걸 ‘불잉그락’(불 잉걸)이 서서히 그 붉은 빛을 잃고 삭으러 들면 씻을 필요도 없이 조금은 재가 묻어도 게의치 않고 파묻어 두면 껍질은 사르르 분리되고 알맹이만 남게 되는데 그 포근포근하고 부드러움 맛이 지극하다.

사시사철 가리지 않고 마 넝쿨 찾아다니는 것이 꼬마들의 일이었다.

*내 입과 얼굴은 시시때때로 붉게 혹은 검게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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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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