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윈 혁명을 완성하기 위하여

스티븐 제이 굴드의 <풀하우스>

등록 2003.07.01 06:31수정 2003.07.01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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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생물학자 찰스 다윈은 미국 대통령 에이브라함 링컨과 같은 날 태어났다(1809년 2월 12일). 링컨이 노예 해방을 통하여 피부색의 차이를 불문하고 모든 인간의 권리는 동등하다는 사실을 인류에게 깨우쳐 준 것처럼, 다윈은 진화론을 통하여 자연 선택에 의해 진화해 온 지구상의 모든 생명은 크기와 종류를 불문하고 그 하나하나가 똑같이 소중하다는 것을 인류에게 갈파하였다.

그러나 링컨의 노예 해방은 성공했지만 다윈의 진화론은 <종의 기원>이 출간된 지 150년이 다 되도록 아직도 인류를 설득시키지 못하고 있다.


생명의 역사는 진보라고 주장하는 다른 저자의 책 여백에 ‘더 고등하거나 더 하등하다는 말은 있을 수 없다’고 메모했다는 그의 일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다윈이 <종의 기원>에서 주장한 진화론은 생명의 역사는 인간을 정점으로 하는 진화의 사다리를 오르는 진보의 과정이 아니라, 무작위한 환경변화에서 살아남기 위해 생명이 우연적으로 선택했던 국지적인 적응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진화’라는 단어는 <종의 기원> 초판에는 등장하지도 않는다. 다윈이 그 단어를 처음 사용한 것은 1871년에 발표한 <인류의 유래>에서였는데, 그것도 허버트 스펜서가 쓴 이 용어가 일반적으로 많이 통용되자 마지못해 따른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지동설로 이미 타격을 입은 바 있는 인류의 자존심은 다윈의 진화론을 인정하지 않았다. 인간은 거대하고 풍성한 생명의 나무에 엊그제 돋아난 작은 가지에 지나지 않으며, 인류의 출현에 있어 진보의 경향 같은 것은 존재하지도 않는 예측 불가능한 과정에서 우연하게 발생한 사건이라는 내용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진화론이 진보론으로 각색되고 인간이야말로 모든 생명들이 진화를 거쳐 이룩한 진보의 정점에 서 있는 가장 고등한 생명체라고 굳게 믿게 된 이유이다.

세계적인 진화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의 <풀하우스>는 인간의 오만에 의해서 이렇게 왜곡된 진화론의 진실을 밝히고 아직 완성되지 못한 다윈 혁명을 이루기 위해 다시 쓴 우리 시대의 <종의 기원>이다. 그러나 굴드의 <풀하우스>에는 우리가 흔히 과학 서적에서 예상하는 전문적인 용어나 딱딱한 문체는 찾아보기 힘들다.


대신 쉽고도 일상적인 용어와 유머러스하면서도 재기 넘치는 그의 글 솜씨로 인해 과학 서적을 읽는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을만큼 매우 재미있게 읽힌다. 그것은 또한 그가 다윈의 진화론에 이르는 길잡이로 삼은 두 가지 독특하고도 흥미로운 사례 연구 덕택이기도 하다.

그 하나는 그가 마흔 살 때인 1982년에 ‘중간값 생존율이 8개월 이하’라고 알려진 복부중피종이라는 희귀한 암에 걸렸을 때 얻게 된 통계학적 깨달음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중간값 생존율 8개월’을 ‘당신은 거의 틀림없이 8개월 이내에 죽을 것이다’라는 사망선고로 받아들였겠지만, 굴드는 중간값과 변이에 대해 숙고한 후에 사망자의 분포가 통계학적으로 오른쪽에 기울어져 있다는 것, 즉 8개월 이후에 생존할 수 있는 가능성은 인간 수명의 한계까지 연장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통찰했다. 즉 자신이 그 분포 곡선의 오른쪽 꼬리의 한 지점에 있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실제로 그가 죽은 것은 지난 2002년 5월이니까 그는 진단을 받고도 20년을 더 산 셈이다.

이러한 개인적인 경험을 통하여 굴드는 흔히 전체를 대표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중심경향성의 값(이 경우에는 ‘중간값 생존율 8개월’)은 추상적인 것이고 실제로 일어나는 것은 변이(이 경우에는 ‘진단 후에도 20년을 더 생존한 것’)라는 매우 중요한 통찰을 얻게 된다.


또 하나의 사례는 야구광으로서 ‘야구에서 왜 4할 타자가 사라졌는가?’라는 매우 이색적이고도 흥미진진한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얻게 된 해답이다. 1941년 미국 프로 야구 타자 테드 윌리엄스가 시즌 통산 4할 6리의 타율을 기록한 이후 아무도 4할 타율을 기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많은 사람들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전반적인 타자의 타격 능력이 예전보다 저하되었거나 또는 투수의 투구 능력 향상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님을 그는 꼼꼼한 데이터 분석을 통하여 보여주고 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4할 타자의 절멸은 전반적인 야구 경기 수준의 향상으로 선수들의 평균 실력이 인간 한계인 오른쪽 벽을 향해 행진해 가면서 변이가 줄어들면서 생긴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즉 이 경우에도 평균 타율 4할은 하나의 변이일 뿐이지 전체를 대표하는 경향으로 읽을 수 있는 값이 아니어서 4할 타자가 사라진 것을 타자들의 타격 능력 저하로 해석하는 것은 오류라는 것이다.

이 흥미로운 두 사례가 보여주는 것은 평균값이나 또는 변이에만 근시안적으로 초점을 맞추어서는 전체의 경향이나 방향성을 읽어낼 수 없다는 진실이다. 굴드는 이러한 사례 연구가 가져다준 깨달음에 입각해서 ‘생명의 역사를 움직이는 일차적 힘은 진보’라는 널리 퍼져 있는 믿음 역시 전체 즉, ‘풀하우스’를 보지 못한 데서 오는 오류이자 인간의 지독한 자기중심주의가 낳은 망상임을 밝히고 있다.

만약 그래도 부분으로 전체를 대표하고자 고집한다면 호모 사피엔스가 아니라 박테리아를 생명의 대표자로 내세워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행성은 35억 년 전 화석으로 보존된 최초의 생물(물론 박테리아)이 출현한 이래 언제나 ‘박테리아의 시대’였기때문이다. 또한 공간적으로 따지더라도 박테리아는 바다와 지표면, 다른 생물의 몸 속, 심지어는 전혀 생물이 살지 못할 것이라고 여겨지는 섭씨 250도가 넘는 해저 열수 분출공과 지표면에서 5킬로미터 지하에 있는 암석의 내부 속에서조차도 살고 있다고 밝혔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박테리아의 생물량이 지구상의 모든 생물을 합친 것보다도 더 무겁다는 충격적인 사실(하나의 무게가 그렇게 미세함에도 불구하고)에 이르면 생명의 역사가 호모 사피엔스를 정점으로 하는 진보의 역사라는 주장이 얼마나 기만에 가득 찬 주장인가를 깨닫게 된다.

왼쪽 벽을 출발점으로 삼고 다양성이 팽창하는 생명 진화라는 게임을 여러 번 되풀이하면 그때마다 오른쪽 꼬리가 출현하겠지만, 가장 복잡한 생물들이 살게 될 이 영역에 들어갈 주민은 매번 달라지는 것이며 예측할 수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인류는 운 좋게 당첨된 것뿐이지 생명의 방향성이나 진화 메커니즘의 필연적인 결과가 아니라는 것이 굴드가 내리는 진화론의 진실이다.

스티븐 제이 굴드는 누구인가

이 책을 쓴 스티븐 제이 굴드는 1941년 뉴욕에서 태어나 1963년 안티오크 대학을 졸업하고, 1966년 안티오크 대학의 지질학 교수가 되었다. 1967년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진화생물학 및 고생물학 박사 학위를 받은 후, 같은 해부터 하버드 대학교 지질학 교수로 활동하다가 2002년 5월 오랜 암 투병끝에 사망하였다.

고생물학자 엘드리지와 함께 수정 진화론인 <단속평형설>을 주창하였으며, 우아하고 명쾌한 필치로 20여권의 진화생물학 및 관련 대중서를 저술하였다.

그중 <판다의 엄지>는 1981년에 미국 과학도서상을, <인간에 대한 그릇된 평가>는 1982년에 전미비평가협회상을, <경이로운 생명>은 1990년에 우수과학도서상을 각각 수상했다.

이외에도 <개체발생과 계통발생>, <다윈 이후>, <홍학의 미소>, <건초 더미 속의 공룡>, <암탉의 이빨과 말의 발가락>, <진화와 절멸> 등의 저서를 남겼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와는 대조적으로 인류가 이룩해낸 문화는 계통의 융합과 라마르크적 유전을 통하여 진보라는 방향성을 뚜렷이 갖는다. 아마도 이러한 문화의 진보가 우리로 하여금 생명의 역사에서도 줄기차게 진보를 말하게 하는 숨은 이유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맥도날드가 지역 식당을 밀어내고, 대형 슈퍼마켓 체인점들이 구멍가게들을 내쫓고 있는 현상이 결코 바람직스러운 것이 아니듯이, 문화적 획일성도 우리의 적인 것은 마찬가지다.

따라서 변이와 다양성 전체를 자연의 현실로 이해하고 “진화는 진보가 아니라 다양성의 증가다”라는 진화론의 참 의미를 받아들이는 것은 갈수록 심해지고 있는 전지구적 문화적 획일성에서 인류의 문화를 구해내기 위한 일이기도 하다. 이것이 다윈 혁명의 진정한 의미이며, <풀하우스>는 그 다윈 혁명으로 가는 길의 첫 발자국에 놓아야 하는 책이다.

풀하우스

스티븐 J. 굴드 지음, 이명희 옮김,
사이언스북스,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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