돛ㆍ덫ㆍ닻

장 그르니에의 <지중해의 영감>

등록 2003.07.05 08:08수정 2003.07.05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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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돛 - 지중해로 떠나는 여행

지중해로 떠나는 장 그르니에의 여행은 북아프리카의 알제리에서 시작된다. 오랑의 싼타 크루즈 언덕에 가득 쏟아지는 빛은 명상의 돛을 둥글게 부풀린다. 부풀어 오르는 그 둥근 빛의 취기 속에서 행복은 저절로 익어가고, 그 열매를 따먹기 위해서 우리는 단지 손을 내밀기만 하면 된다. 그래서 시(詩)와 쾌락은 결국 하나의 길에서 만나는 것이다.


그 길은 사막으로 향한다. 사막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위험인 동시에 오아시스를 감추고 있는 매혹이기도 하다. 사막의 광막함 속에서 나와 세계는 더 이상 구별되지 않는다. 사막 속의 도시 메디나의 밤은 이 단일성으로 빛난다.

메디나의 밤의 어둠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빛을 발견한다. 그 빛은 사물들과 세계를 뚜렷이 선을 긋고 갈라놓는 대낮의 햇빛이 더 이상 아니다. 그 빛은 우리의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흘러나와 우리 앞에 있는 사물들과 세계를 비춘다.

그 순간, 우리가 죽을 힘을 다해 찾고 있던 그 무엇인가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 빛 속에서 우리는 비어 있는 꽃병에서 풍기는 향기를 맡고, 깊은 우물에 던진 돌이 만드는 메아리를 들으며, 연극이 끝난 후 어둡고 적막한 무대에 아직도 남아있는 몇 마디 대사를 생생하게 듣는다.

그 때 우리는 행복에 완전히 압도되어 있다. 장 그르니에는 이것을 삶의 충만함, 또는 절대의 감정이라고 부른다.

2. 덫 - 비문(碑文)을 읽다


장 그르니에는 홀로 여행한다. 이탈리아로, 프로방스로, 그리고 그리스로 계속되는 그의 지중해 여행은 고독하다. 그러나 그는 외롭지 않다.

로마의 부서진 신전의 우아한 회랑 사이에서, 프로방스의 팔로 두른 듯이 바다를 안고 있는 만(灣)의 풍경 앞에서, 아테네의 눈부신 영광의 빛을 거느린 석상과 돌기둥 앞에서 그는 알 수 없는 어떤 대화에 끼어드는 것이다. 은밀하면서도 또 우아한 회랑과 신전과 바다와 하늘과 제신(諸神)과의 대화에. 우리는 살아있는 것들과 함께 있을 때 오히려 훨씬 더 많은 외로움을 느끼는 법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언제나 하나의 증인이 필요하다. 우리의 속내 이야기와 고백을 들어줄 친구가 필요하다. 장 그르니에는 죽어서야 비로소 자기 몫의 땅을 마련한, 묘지에 묻힌 자들을 증인으로 불러 세운다. 삶을 증거하기 위하여 죽음을 불러 세우다니!

그는 천천히 묘지를 산책하며 비문(碑文)을 읽는다. 거기 몇 줄로 요약된 한 사람의 삶이 있다. 덧없고 허망한 한 생애가 거기 누워 있다. 우리는 길을 가다가 꽃을 꺾는다. 그리고 잠시 후에 그 꽃을 바라본다. 그 꽃은 이미 시들었고, 썩었다. 묘지에 누운 인간의 삶 또한 그러하다.

그래서 죽음은 인간이 피할 수 없는 덫이 된다. 그 덫에 발목이 잡히는 순간, 아니 삶은 항상 그 덫에 한 발을 집어넣고 살아가는 것이라는 진실을 깨닫는 순간, 행복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나의 행복은 다만 묵주를 만들 수조차 없는 낱알들에 불과할 뿐이다. 나는 모든 것을 소유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어느 한 순간이 지나면 내게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삶에 깃들어 있는 죽음, 쟝 그르니에가 보여주는 것은 이 무서운 진실이다.

3. 닻 - 영원과 절대에 이르기 위하여

행복의 뿌리에 도사린 죽음을 목격한 쟝 그르니에의 여행이 영원과 절대에의 탐구로 향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그는 인간은 시간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이지만 창조 작업을 통하여 영원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한다.

시인은 순간에 의해 영원에 다다른다. 창조의 순간에는, 인간을 감싸고 있는 숙명적인 유한성(有限性)은 마치 애벌레가 탈피하듯이 벗겨진다. 이 변신의 꿈이 우리를 영원을 향해 날아갈 수 있게 만든다.

"위대한 사람에게 너무 작은 것은 전혀 없다"라는 나폴레옹의 말은 "창조하는 인간에게……"로 수정되어야 마땅하다. 창조 작업을 통해 변형될 수 있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소홀히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술가는 하찮은 것에 대해 집착하는 사람이다.

육체도 정신도 아닌 절대를 획득하는 일 또한 쉽지 않다. 그에 의하면 절대는 대자연과 정신(신에 대한 성찰)이라는 두 가지 기원을 가지고 있다.

대자연이 보여주는 풍경 앞에서 우리의 정신은 텅 비고, 그 무심의 상태에서 세계의 비어있음은 우리의 영혼을 가득 채운다. 그것은 '신(神)적인 것'이다.

반면에 정신은 무심을 거부한다. 정신은 사물들마다 차이를 둔다. 정신은 '신적인 것'이 아닌 '신(神)'을 추구한다. 그러나 정신은 새롭게 질문을 던지는 시대 앞에서 변화한다. 이전의 모든 개념은 앞서 있던 만큼 거짓말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쟝 그르니에는 항상 '신적인 것'을 '신'으로 바꾸고 싶어했다고 고백한다. 그는 태생적으로 플라톤의 후예이기 때문이다.

절대가 대자연으로부터 나왔든, 정신으로부터 나왔든 간에, 절대와의 결합은 중개자를 필요로 한다. 그 중개자는 그가 분명하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행동'인 것처럼 보인다.

"이리하여 지중해는 절대의 숭배와 행동의 숭배를 같은 거리에 두고 있는 하나의 형이상학을 불러일으킨다."

장 그르니에(Jean Grenier)는 누구인가

장 그르니에(1898~1971)는 프랑스의 작가이자 철학자이다. 파리에서 태어나 북부 브르타뉴 생 브리외에서 젊은 시절을 보내며 시인 막스 자코브와 소설가 루이 기유와 폭넓게 교유했다.

『N.R.F』지에 기고하면서 집필 활동을 시작했고, 알제리,릴,카이로,알렉산드리아의 여러 대학에서 철학과 불문학을 가르쳤다. 말년에는 소르본 대학에서 미학을 가르쳤으며, 1968년 국가에서 수여하는 문학 대상을 받았다.

주요 작품으로 <섬>, <카뮈를 추억하며>, <어느 개의 죽음>, <일상적인 삶>, <모래톱> 등이 있다. 이 밖에도 30여 권의 철학서와 감성적인 에세이집이 있다.

시적 명상, 철학적 반성, 풍부한 서정으로 가득 찬 그르니에의 글은 제자였던 알베르 까뮈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섬>과 <지중해의 영감>은 까뮈에게 ‘태양 에세이’라고 이름붙여진 작품의 직접적인 모델이 되었다.
그러나 그가 닻을 내리고자 하는 영원과 절대는 결코 쉽게 도달할 수 있는 항구는 아니다. 그가 비록 이 책 <지중해의 영감>에서 그 항구에 이르는 길을 우리에게 보여주고는 있지만, 아니 보여주려고 시도하고는 있지만, 어쩌면 그 항로는 항해자에 의해서 매번 새롭게 발견되어야만 하는 그런 항로가 아닐까 싶다.

장 그르니에의 <지중해의 영감>은 돛에서 덫으로 그리고 다시 덫에서 닻으로 계속되는 정신의 항해를 보여주고 있지만, 그 항해 일지를 온전히 파악하기란 그의 방대한 저작을 모두 읽고 난 후에야 겨우 가능한 일일 것이다.

지중해의 영감

장 그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이른비,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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