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노라면'이란 노래에 얽힌 일화

13년 전 철원으로 농활 가서 집이 무너진 사건

등록 2003.07.06 11:39수정 2003.07.07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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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고대 농악대들의 농활지신밟기1 2003

고대 농악대들의 농활지신밟기1 2003 ⓒ 무네미닷컴

벌써 학교 후배들이 농활(農活)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제 대학생들뿐만 아니라 대학 성적담당자에게도 필수 과목이 되어버린 농활! 집에서 농활가지 말라고 말리던 일이 엊그제 일 같은데 농활은 이제 학점으로 당당히 인정받고 있다. 농촌봉사활동이 한때 '농민이념교육'이라해서 금지되었던 시기가 있었는데 말이다.

그럼에도 대학을 오래 다닌 죄로 나에게 농활은 각별했다. 그만큼 내가 겪은 농활은 유별나다. 농활 다닌 횟수로 보면 우리나라에서 상위에 있을 것이다. 예닐곱 번은 다녔으니 말이다. 군대 마치고 복학해서도 갔다. 87년 대학에 들어가 94년까지 농활을 다녔으니 몇 해였던가. 졸업 후 사회에 나가서도 대학생들을 따라 농활에 참여했다. 동네마다 내가 오기를 기다리던 형님들-팬이 생겼을 정도다.


이러니 잊지 못할 일도 있다. 하나는 자고 있는 집이 무너진 사건이었고 또 하나는 논 김매다 작은 일 보러 갔던 여학생이 뱀에 물리는 바람에 1주일 여 병원을 지키며 의사 선생님을 말렸던 기억이다. 앞날이 창창한 여학생 다리를 자른다고 하니 내 주위의 경험에 비춰 절대 그럴 수 없다고 버티며 학생 부모님이 승낙하지 않도록 말리던 일이었다.

<사노라면>이라는 노래가 좋아선지 여러 가수가 돌아가며 노래를 불렀다.

“사노라면 언젠가는 좋은 날도 오겠지~”로 시작하여 “흐린 날도 날이 새면 해가 뜨지 않더냐 새파랗게 젊다는 게 한밑천인데 쩨쩨하게 굴지말고 가슴을 쫙 펴라 내일은 해가 뜬다 내일은 해가 뜬다.”로 끝나는 노래다. 이 노래에 얽힌 사연에 이 때가 되면 몸서리치게 농활이 가고 싶어진다.

농촌출신인 내가 농활갈 때면 늘 고민하던 게 있었다. 3학년 여름 농활 때까지는 차라리 집에 가서 일을 돕는 게 낫다는 생각에 방학하면 곧장 고향으로 내려가 농사를 지었다. 그런데 막상 과(科) 학생회장을 맡고 보니 상황이 달라졌다. 한 명이라도 더 데리고 가고 싶어졌다. 학과 설립 1회인 터라 후배들을 집요하게 설득하고 얼러 끌고 가다시피 했다.

a 고대 농악대들의 농활지신밟기2 2003

고대 농악대들의 농활지신밟기2 2003 ⓒ 무네미닷컴

나는 농활이라는 부뚜막에 늦게 올라갔다. 농활도 3학년 2학기 때 벼 베러 간 게 처음이었다. 신설학과의 설움을 톡톡히 맛보았다. 그렇게 나선 첫 번 농활은 다른 과에 얹혀 갈 수밖에 없었는데 인원은 겨우 여섯 명이었다.


그 해 여름 이미 학생들은 여러 고초를 당했다. 내가 다닌 학교 학생들은 마을 어른들에게 돌팔매를 당해 동네에서 쫓겨나 여러 차례 진입을 시도한 끝에 마을 입구에서 텐트를 치고 동네 어른들 눈치를 보며 밤엔 보초까지 세웠다 했다. 이건 약과다. 이야기하자고 불러 세우고선 담배를 피다 눈에 담뱃불을 던져버린 바람에 학생이 병원으로 실려가기도 했단다. 강원도 철원으로 농활지를 개척하러 갔던 고려대생들의 이야기다.

강원도 평창으로 간 성균관대학 학생들은 원주까지 경찰차가 세 번이나 실어 나르는 수고를 한 일도 있었다. 그래도 끈질기게 다시 시도를 해서 결국 동네에서 받아들였던 일도 있었다. 말이 농활이지 지난한 만남의 시작이었고 전투에 다름 아니었다.


80년대 농활은 무지 힘들었다. 그렇게 힘들게 유지되어 오던 농활이 90년대 초반 최고조에 달했다.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로 가던 농활이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의 결의에 따라 주요 대학이 황무지에 가깝던 강원도 각지로 몰려들었다.

1990년도는 내가 4학년 때인데 총학생회 간부로 일했던 해다. 학과 출범 4년째를 맞이한 한문학과에서도 농활대가 꾸려져 한 마을을 맡게 되었다. 철원군 서면 사곡2리 새사곡이라는 마을은 농활대를 처음 접한 터라 작년에 다른 과에서 겪었던 일을 고스란히 겪어야 하는 통과의례를 준비하고 있었다. 미리 사전에 찾아간 아이들이 동네 형님들과 이장님을 설득해 보았으나 결국 실패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나는 총학생회에서 이런 과들을 위해 운동회 때 쓰던 대형 천막을 구해서 차로 실어가 배당하는 일을 맡았다. 여섯 마을이 그런 처지였다. 한문학과도 마찬가지였다. 천막을 배달하던 중 후배들이 고른 집터가 마땅치 않아 한마디 거들고 갔다.

농활대장은 2학년 이경학이라는 친구가 맡았다.

“경학아! 이곳은 안되겠다. 형의 경험상 지형이 좋지 않아.”
“형, 왜요?”
“한 번 봐봐. 비바람이 확 몰아쳐서 올라갈 지점이야.”
“그래요?”
“태풍이 올라오면 위험천만한 곳이야. 더군다나 흙구덩이잖아. 모든 물이 이곳으로 몰려들게 돼 있어. 또한 남향이어서 비바람이 쓸고 갈 자리다. 확 치고 올라오면 감당 못한다.”
“아무리 돌아 다녀봐도 넓은 곳을 찾기가 쉽지 않은데요.”
“그래도 얼른 다른 자리를 알아봐라. 절대 이 자리는 안 된다.”
“알았어요. 한 번 알아볼게요.”

마침 문과대 부학생회장 성특경이라는 친구도 와 있었다.
“부학생회장님 이 자리는 안될 것 같으니 다른 곳을 물색해주세요.”
“그렇게 해보겠습니다.”

a 고대 농악대들의 농활지신밟기3 2003

고대 농악대들의 농활지신밟기3 2003 ⓒ 무

다른 학과에 천막을 모두 배달하고 한문학과로 다시 돌아왔다. 실제 단독으로 농활을 오기는 처음이라 나라도 돌봐줘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그렇게 해서 3일간 머무르기로 했다.

돌아와 보니 어쩔 수 없었던지 피하라던 곳에 그냥 천막을 치고 있었다. 일기예보를 들을 필요도 없이 태풍이 밀려오고 있는 듯 바람이 심상치 않게 불어온다. 밤하늘도 까맣게 변해갔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거들어 주는 수밖에.

밥하는 조만 빠지고 나머지는 집으로 쓸 천막을 만드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고르지 않는 땅에 나뒹구는 쓸모없는 돌을 골라내고 흙을 평평하게 다져 기둥을 세워나갔다. 비가 들이치지 않게 가져온 비닐로 사방을 붙여 막는다. 큼지막한 돌을 구해와 나일론 줄에 몇 번이고 돌려 튼튼하게 묶고 물길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갯산치기를 어둠 속에서 해나갔다. 9시가 넘은 시각까지 밥도 먹지 못하고 했으니 잠자리 만드는데 몇 시간이나 공들였을까?

밥을 먹고 나니 11시가 넘었다. 24명이나 되는 인원이 대형텐트에서 회의를 했다. 12시가 넘은 시각 전체 회의를 마치고 집행부 회의를 작은 텐트로 옮겨 진행했다. 마침 비가 한 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했다. 빗소리가 커지고 텐트가 '휘청' '뒤뚱' 하니 회의를 마저 하라하고 옆 대형 텐트로 가보았다. 이윽고 회의가 끝나고 각자 자리에 눕는다. 그 사이 나는 밖을 한 번 돌아보았다.

그 큰 텐트에 20명 넘는 학생들이 잠을 자고 있다. 피곤한 탓인지 '드르렁 꺽' '드르렁 컥' '흡' 어떤 학생은 숨이 멎는가 싶더니 긴 숨을 내쉬며 '꺽' 한다. 안에서 들으면 바깥 날씨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게 심하게 코를 골며 곤한 잠에 빠져 있다. 엎어가도 모를 지경이다.

가운데 받침대를 세웠던 지점에 물이 한두 방울 떨어지더니 주룩주룩 암소가 '쏴-'하는 소리를 내며 오줌을 누듯 흘러내린다. 이거 안되겠다 싶었다.

“야, 창주야 일어나 봐.”
“왜요?”
“얼른 일어나 봐 임마.”
“왜요, 잠자…”
“안되겠어. 빨리 일어나 봐.”

아무리 흔들어도 일어날 줄을 모른다. 다른 아이 세 명을 깨웠다. 바람이 더 거세지고 비 오는 양도 엄청 늘었다. 가만두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위험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기둥마다 가서 잡고 있어라. 한 명은 후레쉬 찾아서 나 따라 밖으로 나오고.”
“예.”

밖에 나가 바닥에 흐르는 물이라도 들이치지 않게 물길을 잡아주고 다시 들어왔다. 시계를 보니 어느덧 새벽 2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 상황에서도 아무 것도 모르고 자고 있는 아이들이 더 많았다. 일어난 아이들이 예닐곱은 되었으니 기둥 하나씩을 잡고 남쪽 방향 비닐에 기대 몸으로 막고 앉아 있는 아이들도 있었다. 피곤함을 잊은 채 도란도란 소곤거린다.

“쟤는 안 일어날려나 보다.”
“곧 일어날 걸요. 다리에 빗물이 떨어지는 걸로는 안되고 코로 물이 들어가면 일어나지 않고 배길 수 있을까요?”
“하하, 그러게.”

a 고대 농악대들의 농활지신밟기4 2003

고대 농악대들의 농활지신밟기4 2003 ⓒ 무네미닷컴

그 때였다. '슁'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툭'하고 줄 하나가 끊어졌다. 천막이 휘청하고 한쪽으로 기울었다. 그 때 코로 물이 들어가니 창주도 일어났다. 평근이, 은지, 지은이, 민선이도 일어났다. 이렇게 버티는 것도 이제 한계에 이른가 싶다. 절반에 가까운 아이들이 일어나 비바람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몇 시 쯤 되었을까? 그 센 비바람을 막고 있기를 두 시간 넘게 하고 있어 다들 지쳐가고 있었다. 심한 폭풍우가 한 번 세차게 불어왔다. 삽시간에 줄이 끊어지고 벗겨졌다. 집이 와르르 무너져 자고 있는 아이들을 덮쳤다. 어찌 손 써 볼 틈도 없었다.

"악!"
"억!"
"엄마~”

한 여학생의 비명은 더 가늘게 귀를 찢는 듯 했다.

정확히 새벽 3시 50분에 더는 버티지 못하고 힘없이 주저앉고 말았던 것이다. 상황을 수습할 틈도 없었다. 흔들어 깨우니 죄다 일어났다. 그 때 누군가 노래를 불렀다. 바로 2절부터 시작했다. 다들 따라했다.

“비가 새는 판잣집에 새우잠을 잔대도~고운 님 함께라면 즐거웁지 않더냐~오손도손 속삭이는 밤이 있는 한~ 한숨일랑 쉬지 말고 가슴을 쫙 펴라~ 내일은 해가 뜬다 내일은 해가 뜬다.”

다 부르고 난 뒤 아이들은 1절부터 시작해서 2절까지 몇 번이고 반복했다. 기둥을 다시 세우고 끈으로 세찬 비바람을 맞아가며 그 노래만 불렀다. 집이 무너진 사태에 다들 한 몸 한마음이 되어 뭉치게 해줬던 이 노래의 힘이 그렇게 클 줄은 미처 몰랐다.

1시간 여 뒷수습을 하고 나니 아침이 서서히 밝아오고 있었다. 비도 가늘어지고 바람도 잠잠해졌다. 그 긴 밤을 그렇게 지샜다.

다음날 아침 라면으로 때우고 이틀 째 일을 나갔다. 일 오라는 집이 없어 아무 논밭으로 가서 일을 거들었다. 학생들이 다가오자 어떤 어르신은 빨갱이라며 들어오지 말라고 고래고래 고함을 치시고는 서둘러 일을 접고 집으로 들어가신 분도 있었다.

마을 청소를 하고 이틀 간 무작정 일을 나갔다. 숙소가 무너졌다는 소식도 마을로 전해졌다. 이장님께서 마을 회관으로 들어오라는 결정을 내린 건 점심을 먹고 난 후였다. 그렇게 해서 우린 지독한 하룻밤을 지새고 당당히 마을 회관과 교회로 들어가게 되었다. 사흘 후 나는 서울로 돌아왔다. 떠나기 전날에는 족구대회를 비롯해 온동네 사람들이 다 나와서 마을 잔치를 벌였다.

전체 농활이 끝나고 철원 천변에 모여 해산을 했다. 시상식장에서 우리 한문학과가 대상을 받았다. 정리MT를 산정호수로 가던 중 생감자를 버스 안에서 먹었던 일도 잊을 수 없다.

a 고대 농악대들의 농활지신밟기5 2003

고대 농악대들의 농활지신밟기5 2003 ⓒ 무네미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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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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