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은 느릿느릿, 내 몸은 여전히 빨리빨리

박철의 <느릿느릿이야기>

등록 2003.07.08 06:32수정 2003.07.08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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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교동향교. 교동에 오면 꼭 들러보는 곳이다.

교동향교. 교동에 오면 꼭 들러보는 곳이다. ⓒ 느릿느릿 박철

우리 집 가족홈페이지 이름이 <느릿느릿 이야기>이다. 여러 경로를 통해서 홈페이지이름을 왜 ‘느릿느릿’으로 했는가는 설명한 바 있다. 현대인들의 삶은 브레이크가 고장 난 것처럼 속도전의 양상을 띠고 있다. ‘바쁘다 바빠’라는 말이 입에 붙어 다닐 정도이다. ‘느릿느릿’은 차 한 잔 마시는 여유이다.


조금 천천히 가자는 것이다. 그러면서 더 깊이 생각하고 삶의 내면에 충실하자는 것이다. 이렇게 저렇게 해서 ‘느릿느릿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고, 제법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우리나라에서 뿐만 아니라, 호주 일본, 캐나다, 베트남, 미국, 독일, 아프리카에서도 찾아온다. 모두 반가운 손님들이다. 사람들의 공통적인 반응은 ‘느릿느릿’이라는 말에 공감한다고 한다.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아 지다보니 홈페이지를 관리하는 일이 조금 부담되기도 한다.

a 대룡리에서 바라본 연백의 산. 날이 좋은 날은 북한의 산야가 한눈에 들어온다.

대룡리에서 바라본 연백의 산. 날이 좋은 날은 북한의 산야가 한눈에 들어온다. ⓒ 느릿느릿 박철

이번 달 새로 창간하는 <여행스케치>라는 잡지사에서 내 글을 계속 싣고 싶다고 연재를 요청해 왔다. 제목이 ‘논두렁에서 온 편지’이다. 사진을 곁들인 포토에세이다. 지난주 토요일 <여행스케치> 김연미 기자가 우리집 가족사진을 찍는다고 교동을 찾아왔다. 두 번째 발걸음이다.

잡지에 실을 가족사진을 교회주변에서 찍고, 시간이 남아 교동을 한바퀴 돌았다. 시장풍경도 찍고, 교동향교에도 갔다. 내가 길을 안내하면서 연신 키메라 셔터를 눌러대는데 뒤에서 따라오는 김연미 기자가 절절맨다. 내 발걸음이 조금 빠른 편인가? 사진을 다 찍고 저녁을 먹으러 가는데 김연미 기자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목사님 좀 천천히 가요. 너무 빨라요. 걸음도 빠르고 사진도 너무 급하게 찍으시는 것 같아요. 앞으로 ‘느릿느릿’을 ‘빨리빨리’로 바꿔야 할 것 같은데요.”

뒤에서 따라오던 아내도 한마디 거든다. “당신 혼자 앞장서서 마구 사진을 찍어대고 '다 찍었다, 이제 가자' 그러면 어떻게 해요?”


a 여행스케치. 김연미 기자.

여행스케치. 김연미 기자. ⓒ 느릿느릿 박철

말로는 ‘느릿느릿’을 외치면서 여전히 내 몸은 ‘빠르게 빠르게’에 익숙해져 있는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내가 너무 급하다. 밥을 먹을 때도, 일을 할 때도 말을 할 때도, 내 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는 조급함이 결국은 밖으로 다 드러나는 것이다.

어젯밤에 있었던 일이었다. 무슨 일을 하다가 밤 9시가 넘었다. 보통 9시에서 9시30분에 자야하는데 9시 20분이 되었다. 귀찮더라도 좀 씻고 자야겠다고 생각해서 화장실 문을 열었더니 넝쿨이가 샤워를 하는 종이었다. 대뜸 이렇게 말했다.


“야. 빨리 씻어라. 아빠 자야 되는데 얼른 씻어!” 하고 다소 신경질적이었다.

잠시 아내와 얘기를 하는데 넝쿨이가 화장실에서 나올 생각을 안 한다. 내가 화가 나서 화장실 문을 확 열자 그제야 넝쿨이가 벗은 몸으로 나온다. 화장실 안은 더운 김으로 가득하다. “야, 이 녀석아 몸을 씻는데 30분도 더 걸리냐?” 하고 화를 내고는 내 몸을 대충 씻고 거실로 나왔다.

a 인사리. 문닫은 방앗간 위에 참새가 한마리 앉아 있다.

인사리. 문닫은 방앗간 위에 참새가 한마리 앉아 있다. ⓒ 느릿느릿 박철

그때까지 안자고 있던 은빈이가 코맹맹이 소리를 한다. 은빈이는 분위기 파악이 전혀 안되어 있다.

“아빠는 오빠보고 왜 빨리빨리 씻으라 그래요. 천천히 때도 씻고 화장실 구경도 하지요. 가만 화장실에서 뭐가 있더라. 맞아! 치약, 칫솔, 수건, 의자, 컵, 세숫대야, 세탁기, 샴푸, 빨래비누 때밀이수건…. 볼 게 얼마나 많은데요. 천천히 목욕하면서 저런 걸 보고 생각할 수 있잖아요.”

은빈이에게 한방 맞았다.

내가 껄껄 웃으면서 아내보고 내일 아침 은빈이 이야기를 소재로 해서 글을 써야겠다고 했더니, 또 은빈이가

“아빠, 소재가 뭐예요? 내 얘기 쓴다는 거예요? 그런데 아빠 건망증이 심해서 내일 아침 생각 안날 텐데? 내일 아침 나한테 물어보세요. 천천히 목욕하면서 무얼 볼 수 있나 내가 말해 드릴게요. 치약, 칫솔, 세탁기, 때밀이 수건….”

와! 졌다. 완전 KO패이다. 느릿느릿 이라는 망치로 요즘 흠씬 두들겨 맞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 조금 나아지겠지?

a 인사리에서 지석리로 흐르는 수로. 나는 여기서 영감을 많이 받는다.

인사리에서 지석리로 흐르는 수로. 나는 여기서 영감을 많이 받는다. ⓒ 느릿느릿 박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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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 기자는 부산 샘터교회 원로목사. 부산 예수살기 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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