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 분위기의 창을 지닌 세 곳

[창이 있는 풍경1] 창의 의미를 다시 새기다

등록 2003.07.07 19:35수정 2003.07.10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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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강진의 어느 초등학교 건물. 창 안을 바라보며 추억과 동경에 빠진다. 늘어진 전선만큼 나른한 오후다.

강진의 어느 초등학교 건물. 창 안을 바라보며 추억과 동경에 빠진다. 늘어진 전선만큼 나른한 오후다. ⓒ 박태신

한가로운 지난해 여름날, 강진 다산 초당을 들렀다가 시내로 돌아오는 길에 강진읍의 어느 시골 학교 앞에서 내렸습니다. 학교가 예쁘기도 했거니와 워낙 시골 초등학교에 들르기를 좋아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방학 때라 학교 안은 한적했습니다. 건물 사이를 거닐며 키 낮은 창을 통해 복도와 교실을 넘겨다보았습니다. 아기자기한 책상과 의자들, 예쁘게 꾸민 게시판, 정성껏 갖춘 실험실을 보았습니다.


아이들과 선생님이 없으니 건물 안은 적요하고 온갖 사물들은 기나긴 낮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불청객이 오는 바람에 저희들 잔치를 잠시 멈추고 숨죽이고 있었는지도 모르죠. 전기줄에 쪼르르 앉은 참새들이 구경꾼이었고요.

초등학교 건물의 창은 성마른 감정의 샘을 자극해서 어릴 적 추억을 더듬게 합니다. 누구나 그렇듯이 저 창 너머에서 저도 오랜 기간을 살았지요. 창을 통해서 과거를 보았습니다. 가만히 생각하니 저 창문 안에는 불안도 늘 공존했습니다.

성인들만이 현실을 어렵게 견디고 실존을 말하며 사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를 표현하는 방법을 잘 모르는 아이들도 다 그런 고민을 안고 살지요. 그래서 복도를 거닐고 또래들과 어울리고, 선생님을 만나 공부하는 것도 의지가 동반되는 일이기도 합니다.

창 안의 세계를 바라보며 아이들을 보듬는 위치에서 복도를 거니는 꿈을 꾸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일 중의 하나이기도 한 것을 동경하기도 했습니다. 창이라고 하는 존재는, 자기 자신은 영원한 객체가 되면서 방문자들과 거주자들에게 사유와 삶의 공간을 제공해 줍니다. 참새들이 어서 가라고 재촉합니다. 한참을 서성이다 아쉬운 마음으로 교문을 나섭니다.

a 아시아 공원 모퉁이에 있는 교통 안내소. 벽에 그림만 그려 놓으면 어린이집이라고 해도 되겠다.

아시아 공원 모퉁이에 있는 교통 안내소. 벽에 그림만 그려 놓으면 어린이집이라고 해도 되겠다. ⓒ 박태신

원래는 삭막하고 어두워도 뭐라 할 이가 없을 곳인데, 유독 밝은 곳이 있습니다. 잠실의 아시아 공원 모퉁이에 자리잡은 경찰서가 그곳입니다. 엄격히 말하자면 교통 안내소이지만, 경찰서 산하에 있고 교통 경찰들이 상주하는 곳입니다.


유치원이 들어서도 괜찮을 정도로 산뜻하고 깨끗했습니다. 여기 ‘용(用)’자 창 안을 통해서 내부의 모습도 훤히 보입니다. 텔레비전과 컴퓨터가 있고, 여러 가지 집기도 가지런하게 정리되어 있습니다. 창 아래에는 화초들도 정돈되어 있습니다.

많은 경찰서와 파출소가 이런 안내소같이 한가로움마저 느껴질 정도로 세상에 할 일이 없으면 좋겠습니다. 자신을 감출 필요가 없음을 또 누구든지 올 수 있음을 이 예쁜 집과 투명한 창이 말해 줍니다. 포돌이 로고도 그렇고요. 남과 가까워지기 위해서 자신을 변화시킨 곳입니다.


a 성북동의 어느 꽃집. 건강한 사람이 사는 집은 창문이 많을 것 같다.

성북동의 어느 꽃집. 건강한 사람이 사는 집은 창문이 많을 것 같다. ⓒ 박태신

지난해 여름 들렸던 성북동 간송 미술관 가는 길목에는 좀 특이한 꽃집이 있습니다. 외부로 창을 노출시키고, 그 창턱에 화분을 잔뜩 올려놓았습니다. 창 디딤대에도 한아름씩 꽃을 장식했고 길가에는 통행을 방해하지 않는 한에서 화분을 진열해 놓았습니다. 이 꽃집 주인은 창을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마음껏 알리고 있습니다.

마치 행복을 주체하지 못해 창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낸 것 같습니다. 단지 꽃을 하나라도 더 팔기 위한 목적으로만 그런 것이 아니라면 이 꽃집 주인은 아름다운 거리를 만드는 데 한몫을 하는 여유로운 사람일 것 같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지나가고 싶은 길로 만들었습니다

밝은 분위기의 창을 지닌 세 곳을 보았습니다. 투명한 창을 통해 자신을 알린 곳들을 만나는 일은 흐뭇한 일입니다. 우리도 이렇게 마음에 투명한 창을 달면 창 밖을 더 잘 이해하게 되고, 남들도 우리 창 안을 덜 오해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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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어 번역가이자, 산문 쓰기를 즐기는 자칭 낭만주의자입니다. ‘오마이뉴스’에 여행, 책 소개, 전시 평 등의 글을 썼습니다. 『보따니스트』 등 다섯 권의 번역서가 있고, 다음 ‘브런치’ 작가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https://brunch.co.kr/@brunoclou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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