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살아남은’ 자가 삶을 ‘사는’ 힘이 된다

장 그르니에의 <어느 개의 죽음>

등록 2003.07.08 17:54수정 2003.07.08 19:07
0
원고료로 응원
a

ⓒ yes24.com

다시 장 그르니에를 읽는다.

<섬>에서 고양이 물루의 이야기를 더없이 아름답게 들려주던 그가 <어느 개의 죽음>에서는 '자기 나름대로 충직함과 사랑을 지니고' 있던 개 타이오를 추억하고 있다. 모두 그르니에가 사랑했으며 한편으로는 의지했던 대상들이었다.


고양이 물루는 '내가 잠깰 때마다 세계와 나 사이에 다시 살아나는 저 거리감을 지워'주고 '황혼녘, 대낮이 그 마지막 힘을 다해 가는 저 고통의 시각이면 나는 내 불안감을 진정시키기 위하여' 곁으로 부르곤 했던 대상이었으며, 개 타이오는 '그 가혹함과 광대함을 두려워하던 대자연에 내가 접근할 수 있도록 한 중재자'였다고 그는 고백하고 있다.

그러니 그들의 죽음에서 그가 느낀 슬픔과 상실감은 클 수밖에 없었으며, 그들에 대한 글을 씀으로써 그는 자신을 위안하고자 한 것이리라. 그러나 그 위안의 방식은 사뭇 달라 보인다. 두 이야기 모두 인간의 삶에 깃들인 숙명적인 죽음에 대한 통찰을 그 바탕에 깔고 있기는 하지만, 그르니에는 그것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즉, 고양이 물루의 이야기가 한 편의 짧은 소설처럼 경쾌하게 단숨에 읽혀지는 반면, 개 타이오에 대한 추억은 조각조각 나눠진 단장들이 여러 방향으로 뻗어나가면서 변주되기 때문에 자주 쉬게 된다. 이러한 차이는 의도적인 것일까? 아니면 우연한 것일까? <어느 개의 죽음> 뒤에 붙은 '인간과 동물의 관계에 대한 짧은 글'에서 우리는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그 글에 의하면 개는 친밀감, 고양이는 거리감을 그 생활 방식으로 갖고 있다. '결합을 도모하는' 개와 '결별을 꾀하는' 고양이의 이 대조적인 속성이 그로 하여금 무의식적으로 이처럼 다른 방식의 글쓰기를 채택하도록 한 것이 아닐까?

즉, 고립과 자유를 즐기는 고양이 물루의 이야기를 개 타이오의 이야기처럼 조각조각 나눠진 단장의 형식으로 썼다면 하나의 흐름을 갖는 한 권의 책으로 완성하지 못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4주간에 걸쳐 쓰여진 90편의 단장으로 이루어진 개 타이오의 이야기가 '맥락없이 가쁜 숨결처럼 이어지는' 것처럼 보여도 그 속에 나름대로의 질서가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이러한 글쓰기의 방식 자체가 개의 속성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나의 해석이 지나친 억측일는지도 모르겠지만, 개 타이오를 잃은 슬픔은 고양이 물루를 잃은 슬픔보다는 확실히 커 보인다.

물루를 정원에 묻은 그르니에는 물루는 '쒜레느 근처의 섬에 매장되는 파리의 고양이들보다 더 행복하고, 무엇보다도 가슴이 조여들도록 답답한 공동묘지에 묻히는 사람들보다 더 행복하며, 아피에나 대로를 따라 자기네 시골 영지에 묻히는 부유한 로마사람들만큼이나 행복하다'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일상으로 복귀하지만, 타이오를 잃고 나서는 그는 글쓰기를 계속하면서도 모든 것이 공허하게 느껴지는 '말라비틀어진 상태'에서 쉽게 헤어나지 못한다.


왜냐하면 타이오는 '(인간처럼) 죽음 뒤의 천국에 대한 믿음도 없이 (고양이처럼) 지상에서의 천국마저 누리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회한이 그르니에로 하여금 4주간이나 타이오를 추억하게 만든 힘이 되었으리라.

그러나 타이오의 죽음을 통해서 그르니에가 결국 응시하게 되는 것은 인간의 죽음이다. 개나 사람이나 '우리의 운명은 모두 같다'는 이 비극적인 인식이야말로, 그르니에가 '한 마리 개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이다.'

삶에 깃들어 있는 이 숙명적인 죽음 앞에 항상 노출되어 있는 "우리는 살고 있다고 믿지만 사실은 살아남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꽃들, 가축들, 우리의 부모들을 잃고도 살아남는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잃고도 살아남는다. 생존하는 동안 육신의 여러 부분들이 우리에게서 벗어나지만 그래도 우리는 살아남는 것이다. 훗날 우리는 미래에 대한 꿈과 추억들을 잃고도 살아남는다. 그러고서도 우리는 '산다'고 말한다."

그렇다. 우리는 살아남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살아남은'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다'라고 말해야 한다. 죽음에 대한 깨어있는 의식은 역설적으로 삶에 대한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힘이 되기 때문이다.

그르니에의 많은 글에서 항상 죽음을 읽게 되는 것은 다름 아니라 그가 삶을 끔찍이 사랑했기 때문일 터이다. 따라서 그가 <어느 개의 죽음>을 진부하고 어쩌면 통속적으로까지 보이는 다음과 같은 단장으로 마무리하고 있는 것도 당연해 보인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를 사랑하는, 또는 사랑할 마음을 지닌 대상을 사랑하자. 보잘것 없는 설득력을 이용하려 들지 말고, 우리가 더 나은 존재라고 믿지도 말자. 우리에게 베풀어지는 놀라운 은총을 기꺼이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우리들을 고립시키는 커튼을 걷고 누군가 우리에게 손을 뻗는다. 서둘러 그 손을 붙잡고 입을 맞추자. 만일 그 손을 거두어들인다면 당신의 수중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테니까. 오직 사랑이란 행위를 통해서만 당신은 당신 자신을 얻을 수 있을 테니까."

그렇다. 사랑은 '살아남은' 자가 삶을 '사는' 힘이 된다. '삶'은 '사랑'의 준말인 것이다.

(장 그르니에 선집 3 <어느 개의 죽음> : 장 그르니에 지음, 지현 옮김, 민음사 펴냄, 2001년 9월)

접어놓은 페이지들

질병, 노화, 죽음에 대해 종교와 철학이 제시한 해결책은 '결국' 하나뿐이다. 즉, 환자'처럼', 노인'처럼', 시체'처럼' 살라는 것이다. 삶의 즐거움을 잃지 않을까 두려워하지 않으려면 스스로 그 즐거움을 금할 것, 젊은 시절의 쾌락에 환멸을 느끼지 않으려면 노인처럼 굴 것, 삶이 주는 상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가능하다면 송장처럼 지낼 것! - 42쪽 -

고통이란 그 표현 수단을 찾게 되면 이슬처럼 증발해 버리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술가는, 누구보다도 불행한 이들인 반면 누구보다도 불평할 것이 적은 이들이다. - 48쪽 -

다른 사람들, 혹은 우리 자신을 가엾게 여길 때, 우리는 삶이 마련해 준 기쁨들을 잊고 있다. 고통이란 기쁨의 결핍에서 비롯될 뿐인데, 삶의 기쁨을 모른다면 어떻게 고통을 알 수 있겠는가? 동물들은 삶을 행복한 것으로 여긴다. 나중에 겪은 고통에 연연해하며 일생 동안 누렸던 기쁨을 부정할 이유는 없지 않겠는가? - 67쪽 -

어느 개의 죽음

장 그르니에 지음, 지현 옮김,
민음사, 1997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2. 2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3. 3 일타 강사처럼 학교 수업 했더니... 뜻밖의 결과 일타 강사처럼 학교 수업 했더니... 뜻밖의 결과
  4. 4 알고도 대책 없는 윤 정부... 한국에 유례 없는 위기 온다 알고도 대책 없는 윤 정부... 한국에 유례 없는 위기 온다
  5. 5 꼭 이렇게 주차해야겠어요? 꼭 이렇게 주차해야겠어요?
연도별 콘텐츠 보기